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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역시 질투 나는걸 (24/145)

24화. 역시 질투 나는걸2021.05.23.

165495688004.jpg“그놈이라면…… 설마 전하?”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황태자를 ‘그놈’이라고 지칭하다니. 그것도 황실의 본궁에서! 로제타가 그의 대담함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 또한 속으로는 아르문트를 이놈 저놈 이 자식 저 자식 부르기는 했으나 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된다는 상식은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에게는 그런 상식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연구실에는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이 로제타밖에는 없었다. 그녀가 본궁에 도착한 순간 그녀의 기척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다른 연구원들을 미리 쫓아낸 덕이었다.

165495688004.jpg‘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혹시라도 누가 들어서 황족모독죄로 붙잡히면 어쩌려고……!’

로제타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능력이면 누군가 엿듣는 걸 알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뿐더러,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165495688004.jpg“아니, 그런데 내가 새벽에 전하 방에 있었던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녀가 어젯밤 아르문트의 방으로 향한 것은 멜라니나 엘리아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괜한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비밀리에 움직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본궁에서 일하는 발레리안이 이를 알고 있단 말인가?

16549568800414.jpg“진짜…… 그놈 방에 있었다고?”

발레리안의 얼굴이 더욱 서늘해졌다. 의무적으로 걸치던 미소마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그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헉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사나운 모습이었다. 로제타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화난 얼굴에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전 소드마스터답게 금세 페이스를 되찾았다.

165495688004.jpg“가긴 갔지. 나름 소득도 얻었고. 그래서, 어떻게 안 건데? 자꾸 딴소리하지 말고 이것부터 대답해봐.”

그녀가 팔짱을 끼고 그를 부루퉁하게 올려다보았다.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흉흉한 기운을 뿜어대는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제타의 냉정한 반응에 발레리안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16549568800414.jpg“황태자궁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거든.”

165495688004.jpg“소문?”

얘는 어떻게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나보다 소문을 빨리 접하는 거지? 로제타가 짧게 감탄했다.

165495688004.jpg“무슨 소문?”

로제타가 그의 답변을 재촉했다. 발레리안은 무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16549568800414.jpg“네가 어젯밤에, 황태자의 승은을 입었다던데.”

165495688004.jpg“……뭐?”

내가, 뭘 입어? 로제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반면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발레리안의 낯은 언제 험악했냐는 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가 속눈썹을 나붓이 내리깔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49568800414.jpg“……아니지?”

165495688004.jpg“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감히 그딴 헛소리를 하고 다녀?!”

당장 데려와! 멱을 따버릴 테니까! 로제타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의 포악한 모습에 발레리안의 표정은 더욱 환해졌다. 그가 마구 성질을 내는 로제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응시했다.

16549568800414.jpg“역시 헛소문이구나. 그럴 줄 알았어.”

165495688004.jpg“그럴 줄 알긴 무슨! 방금까지 날 못 믿고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놓고!”

16549568800414.jpg“우리 로즈는 믿지만, 황태자를 믿지는 않으니까. 혹 그가 짐승 새끼처럼 네게 들이댄 건 아닌지, 오빠로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있어야 말이지.”

165495688004.jpg“오빠는 무슨…….”

로제타가 말을 어물거렸다. 그의 추측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짐승 새끼처럼 들이댔다’라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그녀는 괜한 의심을 사기 전에 서둘러 목소리를 키웠다.

165495688004.jpg“어쨌든, 그래서 누가 그딴 소문을 낸 거야!”

16549568800414.jpg“나야 모르지. 이미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발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제타는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이제야 왜 다들 자신을 훔쳐보고 수군거렸는지 이해가 갔다. 저번 생에는 발레리안과의 소문 때문에 연애 한 번 못 했는데, 이번 생에는 아르문트라니. 골이 쑤시는 기분에 로제타가 제 이마를 짚었다.

165495688004.jpg‘도대체 누가…….’

그녀가 애써 화를 다스리며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165495688004.jpg“아.”

그리고 금방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165495688004.jpg-“경, 수고하세요.”

16549568858213.jpg-“어, 어. 그래. 너도…… 잘 쉬어.”

붉게 달아오른 러크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아르문트의 방에 들어간 걸 아는 유일한 목격자였다. 시선을 못 맞추고 말을 더듬던 이유가 그거였나. 빠득. 로제타가 옆에 있는 탁자를 힘주어 잡았다. 고목으로 만든 예쁜 탁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6549568800414.jpg“로즈, 그 탁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165495688004.jpg“뭐?”

16549568800414.jpg“아냐. 마음껏 부숴.”

아무리 좋아봤자 우리 로즈만은 못하지. 발레리안이 제 탁자가 조각나는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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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는 탁자가 완전히 부순 후에야 평정을 되찾았다.

165495688004.jpg‘소문이야 얼른 정정하면 되고. 그 자식은 조만간 손봐줘야지.’

그녀가 쯧 혀를 차며 연구실 안쪽에 있는 소파에 피로한 몸을 던졌다. 소파는 아르문트의 방에 있는 것보다도 질감이 푹신했다. 발레리안에게서 나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그 덕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16549568800414.jpg“점심은 먹었어?”

발레리안은 오해한 것이 미안한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165495688004.jpg“아직……. 발레리는?”

16549568800414.jpg“나도 아직. 잠시만 기다려.”

그가 냉큼 돌아서더니 선반에서 조리기구를 꺼내 들었다. 연구실에 저런 건 왜 있는 거야. 로제타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발레리안의 향기 때문인지 잠이 솔솔 몰려왔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잠시 졸던 로제타가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팬케이크가 보였다.

16549568800414.jpg“여기 커피도.”

165495688004.jpg“고마워, 발레리.”

16549568800414.jpg“고맙긴.”

발레리안이 탁자에 팬케이크와 커피를 올려놓았다. 아기를 대하듯 태도가 아주 상냥했다. 로제타는 그 상냥함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시원한 우유를 반 정도 넣은 고소한 커피. 그녀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춘 맛이었다. 신선한 딸기를 듬뿍 올린 팬케이크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165495688004.jpg‘발레리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니까.’

로제타가 새삼 감탄했다. 커피와 팬케이크를 반 정도 비우고, 속이 든든해지고 나서야 그녀는 본론을 꺼냈다.

165495688004.jpg“발레리, 아직 내가 자세히 얘기 안 해줬지. 이 회귀에 대해서 말이야.”

발레리안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들은 것은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죽음을 막지 못해 무려 네 번이나 시간을 돌아왔다는 대략적인 정보뿐이었다.

165495688004.jpg“지금 얘기해줄게. 긴 이야기가 될 텐데, 시간은 괜찮아?”

16549568800414.jpg“그럼, 괜찮고말고.”

발레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마법석을 꾹 눌렀다. 그러자 연구실의 문이 굳게 잠기더니 방음 마법이 시전되었다. 사실 이 뒤에 약속이 여럿 있는 그였으나, 그깟 약속쯤 파기하면 그만이었다. 로제타의 얘기를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 연구실 주위로 방음 결계가 펼쳐진 것을 확인한 로제타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165495688004.jpg“저번에 말했다시피…… 나는 스무 살에 입단하여, 스물다섯에는 황실 기사단장이자 전하의 호위가 되었어. 스물여덟에는 세 번의 깨달음을 모두 얻고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올랐지.”

두려울 것도, 즐거울 것도 딱히 없는 삶이었다. 부, 권력, 명예. 이 모든 것을 얻었기에 더 목표할만한 것도 없었다.

165495688004.jpg“처음 시작은 독침이었어. 누군가 전하의 옷에 맹독이 묻은 침을 꽂아두었고, 그것에 찔린 전하는 고작 몇 분도 안 돼서 죽었지.”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 실패를 회상했다. 그때의 무력감이 떠오르자 목소리 끝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165495688004.jpg“황궁을 다 뒤져도 범인을 찾을 수 없었어. 아무런 증거가 없었거든.”

로제타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688004.jpg“그래서 결국 너를 찾아가서, 시간을 돌려달라 부탁했어. 저번에 본 그 검을 매개로 말이야. 보다시피 천재 대마법사인 너는 성공했고.”

16549568800414.jpg“성공했다면 회귀라는 부작용이 없었겠지.”

발레리안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녀가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로제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165495688004.jpg“아냐. 부작용이 아니라 기회지. 전하를 살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단지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르문트를 다시 살릴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로제타는 시간을 돌아온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아르문트의 사망 원인도 줄줄이 나열되었다. 두 번째 생에서 아르문트는 사냥제 중 자객에 의해 암살을 당했고, 세 번째 생에서는 로제타가 그에게 회귀 사실을 말해준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픽 죽었다. 금세 시간이 돌아온 탓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하인 중 누군가 심장마비라고 외치는 걸 들었다. 네 번째 생은 그나마 오래 갔다. 그러나 로제타가 서른이 되기 직전에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죽고 말았다. 그리고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기도 전에 다시 시간이 돌아왔다.

165495688004.jpg“짐작 가는 배후는 있어. 너도 알겠지만.”

말을 마친 로제타가 마지막 팬케이크 조각을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너무 욕심을 부렸는지 생크림이 입가에 묻었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앞에 휴지를 건네며 대답했다.

16549568800414.jpg“1 황자.”

165495688004.jpg“맞아, 유력하지.”

그레이한 이샤벳 폰 라그나르. 라그나르 제국의 1 황자이자, 현 황후의 소생으로, 아르문트의 이복형이다. 그가 3년이나 먼저 태어났음에도 아르문트가 황태자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문트가 적장자이니까. 1 황자의 친모, 현 황후 아르티나 모르트마르는 사실 전 황후의 시녀였다. 그러다 황제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되었고, 황후보다 먼저 아들을 낳았다. 라그나르 제국은 일부일처제를 엄격히 따르는 나라로, 제국법상 정부가 낳은 아들은 황태자는 물론 황자로 칭할 수도 없었다. 그레이한과 아르문트가 이복형제라곤 하나 실상은 감히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친모인 전 황후가 갑작스레 작고한 후 상황은 달라졌다.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 정부를 황후자리에 올렸다. 그로써 그레이한은 1 황자가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황태자의 자리까지 그에게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인정하는 황태자는 여전히 아르문트였고, 현 황후는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1 황자 측이 배후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정황만은 확실했다.

165495688004.jpg“그리고 그 증거를 찾는 게 내 목표야.”

16549568800414.jpg“쉽지 않은 일이네.”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한의 외척, 모르트마르 백작가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다. 루니엘라 공작가 다음으로 권력 있는 가문이기도 했다. 황궁 곳곳에는 황후가 심어놓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그녀의 손과 귀가 되어주다, 쓸모를 다하면 곧바로 자결할 만한 사람도 많았다. 충직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165495688004.jpg“그래서 말인데……. 발레리, 네 도움이 필요해.”

로제타가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발레리안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늘 떨렸다. 항상 그랬듯 그가 기꺼이 수락하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친구를 위험한 일에 끌어들인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레리안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16549568800414.jpg“당연히 도울 거야.”

165495688004.jpg“발레리…….”

16549568800414.jpg“말했잖아, 로제타.”

발레리안이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68800414.jpg“네가 위험해지는 꼴, 더는 못 보겠다고.”

그가 로제타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젯밤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었던 아르문트의 행동을 떠올린 로제타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쿡쿡, 발레리안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내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이 제 입가에 닿았다. 그가 로제타의 입술 옆에 한참 전부터 묻어있던 생크림을 엄지로 닦아냈다.

16549568800414.jpg“그렇지만, 네가 그의 전속 하녀로 일하며 온종일 붙어 있는 건…….”

할짝. 제 엄지에 묻은 것을 핥은 발레리안이 여우처럼 눈꼬리를 휘었다.

16549568800414.jpg“역시 질투 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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