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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나를 좋아한다고? (26/145)

26화. 나를 좋아한다고?2021.05.30.

16549569260575.jpg“미안하다!”

붉은 머리의 기사, 러크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최대한 진심을 가득 담아 한 사과였으나, 그 주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멜라니는 그를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고, 그 옆에 선 엘리아는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1654956926058.jpg“더 숙여.”

16549569260575.jpg“끄악!”

사나운 얼굴의 리처드가 러크의 머리를 자비 없이 꾹 눌렀다. 허리가 반으로 접히는 고통에 러크가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까지 혼날 일인가. 러크는 억울한 마음에 눈을 치켜떴으나 이내 주변의 냉정한 반응을 확인하고 다시금 사과했다.

16549569260575.jpg“미, 미안해, 로제타.”

1654956926058.jpg“어딜 감히 반말질이야.”

16549569260575.jpg“죄송합니다, 로제타 님!”

리처드가 다시 화낼 조짐이 보이자 러크는 자존심이고 뭐고 몽땅 던져버리곤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제 동기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베론 백작가의 차남, 리처드 오베론은 젊은 나이에 상급 기사의 자리에 올라 황태자의 호위를 맡은 실력자였다. 무서운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무뚝뚝했고, 쉬는 날이면 여자를 찾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홀로 수련에 열중하는 등 몹시 고지식한 면모가 있었다. 그런 그가 난생처음으로 관심을 둔 여자가 바로 눈앞의 하녀, 로제타였다. 신분 차가 걸리기는 하나,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로제타는 무척 예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니까. 다른 하녀들과는 달리 귀족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러크의 취향은 아니었다. 다들 로제타가 바보 같지만 귀엽다고 말할 때, 러크는 그녀에게서 종종 왠지 모를 싸함을 느꼈다. 황실기사단의 단장에게서나 느끼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기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취향은 엘리아였다. 탐스러운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정석 미녀. 안타깝게도 이번 일로 안 좋은 인상을 남겨버렸지만. 어쨌든 리처드는 로제타에게 아주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었고, 러크를 포함한 동료 기사들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녀를 매우 조심스럽게 대했다. 오늘 아침, 한순간의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16549569260575.jpg‘데미안한테만 말했던 게 어떻게 소문이 난 거야? 그 자식, 비밀이라고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

러크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한 명에게만 몰래 얘기했던 것이 고작 몇 시간 만에 온 곳으로 퍼져나갈 줄이야! 게다가 그는 단지 ‘로제타가 어제 새벽 전하의 방에 오래 머무르더라’라고 말했을 뿐인데 어느덧 소문은 ‘로제타가 황태자 전하의 승은을 입었다’라고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비밀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로 시작하는 말은, 부풀리고 부풀려져 곧 모두가 알게 되는 법이다. 특히, 좁디좁은 황실에서 황족과 관련된 추문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퍼져나가기 일쑤였다. 아직 황궁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러크는 이를 알지 못했던 죄로 이러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었다.

16549569260608.jpg“러크 경.”

여태껏 가만히 침묵하던 로제타가 입을 열자 러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는 제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여인을 떨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로제타는 늘 그렇듯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으나, 어쩐지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녀에게서 원인 모를 기백이 느껴졌다. 기사단장에게서 느낀 것보다도 더 흉흉한 기백이.

16549569260608.jpg“일을 저질렀으면…….”

꿀꺽. 러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16549569260608.jpg“스스로 해결을 해야겠죠?”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있다면요.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로제타의 기운에 압도된 러크는 홀린 것처럼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16549569260575.jpg“그, 그럼! 내가 해결할게! 걱정 마, 로제타. 오늘 안에 수습해 놓을게.”

16549569260608.jpg“네, 경만 믿을게요.”

예상외로 로제타는 그를 빠르게 용서해주었다. 이에 안심한 러크가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리처드가 끼어들었다.

1654956926058.jpg“로제타, 정말 이걸로 되겠습니까? 다른 보상도 받으셔야지요.”

16549569260575.jpg“맞아, 로지. 이 자식은 더 당해도 싸.”

그가 러크를 더욱 뜯어낼 것을 종용했고, 멜라니가 험한 말투로 동조했다. 어떻게 친구보다 여자를 선택할 수가! 러크는 배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나운 시선을 마주함과 동시에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16549569260608.jpg“아니야, 괜찮아. 소문만 확실히 해결된다면 난 더 바랄 게 없어.”

16549569260575.jpg“로제타……!”

다행히도 로제타는 아주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주었다.

16549569260575.jpg“여태껏 내가 너를 잘못 봤었어! 이런 천사를 두고 단장님을 떠올렸다니.”

러크가 감격한 얼굴로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제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으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리처드가 그의 팔을 내리쳤다.

1654956926058.jpg“어딜.”

그 더러운 손으로 로제타를 만져. 리처드가 주인을 지키는 대형견처럼 으르릉거렸다. 멜라니와 엘리아 또한 로제타를 방어하듯 막아서서 그를 사납게 째렸다. 러크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얼얼한 팔을 감싸 쥐었다.

16549569260608.jpg“너무 그러지 마세요. 러크 경이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닌걸요.”

로제타가 상냥한 말투로 그를 위로했다. 러크는 그런 그녀를 자비의 여신이라며 칭송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6549569260608.jpg“안 그래도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시던데, 실수할 수도 있죠. 얼마나 힘들면 근무 중에 꾸벅꾸벅 조시더라니까요. 안쓰러워라.”

1654956926058.jpg“……예? 전하를 호위하던 중에 졸았단 말입니까? 러크, 네놈……!”

그녀의 제보에 안 그래도 험했던 리처드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흉악해졌다. 반면에 러크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고지식한 리처드가 이 일을 그대로 넘길 리가 없다. 오늘 내로 기사단장에게 일러바칠 것이 분명하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러크가 원망을 담아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로제타는 전혀 몰랐다는 듯 뻔뻔하게 응수했다.

16549569260608.jpg“어머,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죄송해요……!”

로제타가 그의 시선에 깜짝 놀란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안절부절못했다. 갈고닦아온 연기 실력을 살려 겁먹은 척을 하는 것이었다.

16549569260575.jpg“이게 어디서 감히 우리 로지를 째려봐! 당장 눈 안 깔아!”

16549569260575.jpg“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

예상대로 멜라니와 엘리아가 나서주었고.

1654956926058.jpg“……자네 나 좀 보지.”

리처드는 이를 으득 갈며 따라올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모두의 분노를 산 러크는 핼쑥한 얼굴로 리처드에게 끌려갔다.

16549569260608.jpg‘잘한다, 릭!’

러크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며 로제타는 남몰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리처드가 이렇게까지 든든한 적은 또 처음이었다. 그때,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리처드가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근심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몹시 환했다. 눈길이 닿자 그가 인사하듯 눈웃음을 지었다.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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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69260575.jpg“오올, 로제타. 대단한데.”

16549569260608.jpg“응? 뭐가?”

멜라니의 느닷없는 칭찬에 로제타가 눈을 껌뻑거렸다. 에이, 알면서. 멜라니가 팔꿈치로 그녀의 허리를 쿡 찍으며 속삭였다. 무얼 안다는 건지, 로제타에겐 영문 모를 소리였다.

16549569260575.jpg“리처드 경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16549569260575.jpg“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니, 이렇게 안타까울 데가 있나.”

멜라니가 오페라 가수처럼 과장되게 말했고, 엘리아가 재빠르게 이어받았다. 만담을 하는 것 같은 모습에 로제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딴청을 부렸다. 신경 쓰이던 것도 처리했겠다, 이제 다시 전하를 지키러 갈 시간이었다. ***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슬프게도 로제타에게는 이 문구가 반대로 적용되었다.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없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게 생겨난 것이었다. 로제타는 제 불운에 슬퍼하며 심각한 얼굴로 입을 뗐다.

16549569260608.jpg“전하, 어디 아프세요?”

1654956930491.jpg“……아니.”

아르문트는 홱 고개를 돌리며 단답했다. 그가 짧게 대답하는 거야 이제 익숙했지만,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의 얼굴이었다. 해가 따뜻할 때 바깥에 나갔다 온 것도 아니고, 종일 방에만 있던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16549569260608.jpg“얼굴이 좀 붉은 것 같은데…… 혹시 감기 아닐까요? 저번에 호수에 빠졌던 것 때문에 아픈 거면 어떡해요.”

1654956930491.jpg“아니라니까. 이틀 전에 빠진 것 때문에 지금 와서 아프겠나.”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 이 개복치야.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꿍얼거렸다.

16549569260608.jpg“신관을 불러오는 건…….”

1654956930491.jpg“괜찮다고 했다.”

아르문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이 또한 늘 그랬기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다만 두 번째로 이상한 것은…….

16549569260608.jpg“저, 그런데 왜 자꾸 시선을 피하세요?”

아르문트가 자신과 시선을 맞추지 못한다는 거였다. 무언가 못 들을 거라도 들은 사람처럼. 그녀의 일침에 아르문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눈치는 또 왜 저렇게 빨라. 그가 조용히 혀를 찼다. 그러곤 곧장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1654956930491.jpg“자, 이러면 됐나?”

아르문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를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거침없었다.

16549569260608.jpg‘음, 잘생겼군.’

로제타가 새삼 감탄했다. 과연 수차례 회귀를 해서라도 지킬 맛이 나는 얼굴이었다. 로제타는 자신이 오해했다며 헤헤 웃었다. 개복치가 무사한 걸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분명 오늘은 청소할 필요가 없다고 했거늘, 아무렇지 않게 그의 명령을 무시하는 모습이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았기에, 아르문트는 포기하고 다시 시선을 책에 고정했다. 그러나 잘만 읽던 책이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쿵, 쿵, 쿵……. 또다시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몸 안에서 울려 퍼졌다. 마주 본 것뿐인데 심장이 빠르게 뛰다니. 아무래도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우연히 하녀들의 밀담을 듣고 난 뒤로 쭉 이 상태였다.

1654956930491.jpg‘나를 좋아한다고?’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흘끔 시선을 던졌다. 한쪽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묶고 열심히 창틀을 닦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귀엽다니. 그가 다시 기함했다. 심장만 이상한 게 아니라 시력까지 맛이 간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이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1654956930491.jpg‘……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행동했던 건가.’

대신 독을 마시고, 호수에 몸을 던져가며 그를 구해주고, 제 광증을 보았는데도 끊임없이 곁을 지키려 한 것. 이 모든 헌신에 대해 지겹도록 의문을 품고 또 의심하던 그였다. 그러나 연정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의혹이 해소되었다. 연정이란, 가장 비합리적이면서도 또 합리적인 이유였다. 아르문트가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오히려 의심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어째서 자신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아르문트 스스로도 제 잘난 외모와 지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귀족 영애들이 그를 탐냈고,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꿈꿨다.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실속 없는 바람인지 알지 못하고 말이다. 다만 여태껏 자신을 연모하던 이가 한두 명이 아니었음에도, 아르문트는 이번의 경우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를 좋아하던 이는 대부분 제 열렬한 마음에 취해 아르문트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고백해오거나, 더 나아가서 몸부터 들이대기 바빴다. 그러나 로제타는 아르문트를 좋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에게 감정이나 몸을 요구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길 원할 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제 연심을 숨기고 그에게 헌신했다. 꼭,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화악!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르문트의 얼굴이 또다시 달아올랐다.

1654956930491.jpg‘그럴 리가 없다.’

아르문트가 책을 꽉 쥐어 잡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만에 하나 진심이라고 한들 그 마음을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은 저 하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죽을 몸이지 않나. 아르문트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치열하게 고민했다. 정작 로제타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결국, 그는 그녀가 먼지를 털고 닦는 내내 책장을 한쪽도 넘기지 못했다. 이윽고 청소를 모두 마친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16549569260608.jpg“전하. 청소는 이제 끝났어요! 아, 그리고 아까 방도 다 옮겼답니다. 저기로요.”

그녀가 방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가리키자, 아르문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방을 옮기라 했었지. 별생각 없이 제안한 것이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괜한 여지를 준 건 아닐까 싶었다.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니 뭐든 다르게 해석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사르르 웃어 보였다.

16549569260608.jpg“배려해주신 덕분에, 전하 가까이에 있을 수 있게 됐네요. 너무 좋아요.”

쿵. 또다시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저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가. 혹 고백을 저렇게 돌려서 하는 건가. 그가 이를 악물고 진의를 궁금해했다. 물론 그녀의 진의는 ‘앞으로 너를 가까이서 지킬 수 있어서 좋다’라는 것이었으나 이미 착각의 늪에 빠진 아르문트는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로제타는 그의 혼란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16549569260608.jpg“참, 전하.”

1654956930491.jpg“…….”

16549569260608.jpg“오늘치 소원, 들어주실래요?”

유혹하듯, 은근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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