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특별한 사람2021.06.03.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아르문트가 몹시 긴장한 낯으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매일 한 가지씩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왜 해서는. 그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후회했다. 물론 만약 그녀가 무리한 것을 요구한다면 거부권을 행사하면 되는 일이나, 그와 별개로 저런 표정을 보는 것 자체가 곤란했다. 기다란 눈매를 곱게 휘고, 자신을 그윽하게 응시하는 얼굴. 그녀의 마음을 인식하고 나니 저 눈만 보아도 그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자신과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리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어떻게 저리 노골적일 수가.’
어찌나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지금까지 그녀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바보 같을 정도였다. 아르문트가 다시금 입술을 꾹 깨물며 민망함을 참았다. 마음만 같아선 그런 감정은 받아줄 수 없으니 접으라고 단호히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건 너무 못 할 짓이었다. 자신을 좋아해 죽음까지 불사한 이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대할 수야 없다.
‘저렇게 마음을 잔뜩 티 내고는 있긴 하나, 그렇다고 제대로 고백을 한 것도 아니니까.’
아르문트는 이렇게 그녀를 거절하지 않는 이유를 합리화했다. 다른 이였다면 고백을 했든 안 했든 미리부터 선을 그었을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얼 원하나.”
그가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물었다. 일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고작 하녀 때문에 긴장할 리가 없다. 단지 원하지 않던 호감이 부담스러운 것뿐이다. 그가 열심히 합리화를 이어갔다.
“제가 뭘 원하냐면요.”
로제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뜸을 들였다. 그러자 또다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긴장하지 않았다기엔 지나치게 몸이 굳은 그였다. 그녀는 그런 아르문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요구에 전신에 맥이 탁 풀렸다. 갑자기 이름은 웬 이름이란 말인가? 아르문트가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되물었다.
“뭐?”
“한 번도 제 이름을 불러주신 적이 없으셔서요. 임명장 읽어주실 때 빼면요.”
안 될까요? 로제타가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나?’
아르문트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는 원래 하녀의 이름을 알아두지 않는 편이었다. 어차피 금방 바뀔 하녀 이름을 알아서 무얼 하겠는가. 그러나 로제타는 여러모로 특이한 케이스였다. 임명장까지 써주다 보니 외우고 싶지 않아도 절로 이름이 외워졌다. 다만 그렇다고 그녀의 이름을 부를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이게 뭐 별거라고. 아르문트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름이나 애칭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그였기에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입술을 떼려는 찰나, 그의 침묵을 불쾌감으로 해석한 로제타가 다급히 순서를 가로챘다.
“저,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냥 전하께서 불러주시는 제 이름을 듣고 싶어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부르는 이름과 특별한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은 듣는 기분 자체가 다르니까요.”
로제타가 기름한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불쌍한 표정으로 아부함으로써 원하는 걸 얻어내려는 심산이었다. 그녀 또한 이름 따위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친해지려면 적어도 이름은 불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꺼낸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한껏 오해를 하고 있는 아르문트에게 그녀의 아부성 짙은 말은 그저 은근한 호감 표시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특별한 사람이라니.’
아르문트가 들고 있던 책을 꽉 움켜쥐었다. 힘 조절을 못 한 탓에 책의 일부가 완전히 구겨졌다.
‘티가 나도 너무 나는군.’
그가 옅게 달아오른 얼굴을 괜히 반대쪽으로 홱 돌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생각이었으나, 저런 말을 들으니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그가 예상한 것처럼 손을 잡아달라 하거나 포옹을 해달라 했으면 이보다는 덜 민망할 것 같았다.
“네? 부탁드려요, 전하.”
정작 로제타는 조금도 민망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그녀가 말한 ‘특별한 사람’은 그저 ‘내 주군’을 의미한 것뿐이었다.
“……그래.”
아르문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로제타의 낯빛이 순간 환해졌다. 그러나 그가 빠르게 초를 쳤다.
“부를 일이 생기면 불러주지.”
로제타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오늘 이후로 갑자기 부를 일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아르문트는 그녀의 얼굴 위로 드러난 불만을 읽었음에도 모른 척 주제를 바꿨다.
“그래서, 오늘 신관은 뭐라 하던가.”
이렇게 말을 돌리시겠다. 로제타가 못마땅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황태자더러 왜 말을 돌리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 그녀가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을 듣는 걸 포기하고 이죽거렸다.
“오늘 중에 죽을 거래요.”
반은 장난으로, 반은 그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오늘 방을 옮겼는데 바로 죽는다 하면 어이없겠지. 너도 한번 허탈해 봐라!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며 아르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뭐?”
시야에 담긴 그의 얼굴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공허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볼과 입술에 감돌던 장밋빛 혈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황금색 눈동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네가, 오늘-.”
“농담이에요!”
로제타가 황급하게 말을 잘랐다. 그대로 두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아르문트는 받아들이는 게 늦었는지 몇 초 정도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더니, 이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흉흉해졌다.
“……지금, 그딴 걸 농담이라고 하나?”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로제타는 포식자를 눈앞에서 마주한 초식 동물의 심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워낙 냉정하고 까칠한 아르문트이니 그녀가 당장 죽는다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줄만 알았다. 만약 로제타가 일반인이었다면 정말 지금쯤 죽고도 남을 시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늘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전하께 죽는 걸 가지고 농담하다니. 내가 심했어.’
로제타가 빠르게 반성했다. 동시에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번에 이게 효과가 좋았었으니까.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전하!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어요!”
“무릎은 또 왜……!”
아르문트가 기겁했다. 귀족 여인이 어떻게 저리 쉽게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그래, 학대를 당했다 했었지.’
그러니 이렇게 익숙한 듯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걸 테다. 정작 로제타는 학대라는 단어를 꺼낸 적도 없는데 아르문트는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메이필드 남작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죽는다는 소리를 쉽게 내뱉은 것은 몹시 못마땅했으나, 저 모습을 보니 화낼 마음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더 화를 냈다간 괜히 안 좋은 기억만 되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 탓이었다.
“……됐으니 일어나.”
아르문트는 드물게도 다른 이를 상대로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너그러운 모습에 로제타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게 저럴 놈이 아닌데. 이번 회차의 그는 정말 여러모로 다른 사람 같았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그녀는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일부러 더 과장되게 목소리를 키웠다.
“오늘 신관님이 그러시기를, 제가 생각보다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대요! 그, 아시다시피 타고나길 튼튼해서요. 몸이 독에도 잘 버티나 봐요.”
로제타는 방금 호되게 당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신관을 찾아간 것도 거짓말, 시한부인 것도 거짓말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계속 진실을 감춰둘 생각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아르문트의 마음을 얻은 다음에 안전하게 밝히고 싶었다. 혹 그가 거짓을 눈치채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지만, 신관을 직접 찾아가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테다. 황태자인 아르문트가 일개 평신관을 직접 찾아가 로제타의 방문 여부를 물을 리 없으니, 들킬 가능성도 전무하다 할 수 있다.
“……그렇군.”
아르문트는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그녀가 더 살건 말건 관심 없다는 듯, 담담한 반응이었다. 저럴 거면 굳이 왜 물어봤대. 로제타가 몰래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째렸다.
“볼일 다 봤으면 이만 나가봐.”
그가 다시 시선을 책에 고정하곤 명령했다.
“네, 전하.”
로제타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터는 그의 옆방에 머물 수 있으니 굳이 그의 방에 남아 있기를 고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는 책을 읽는 척하다, 뒤돌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로제타가 그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참,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이제 밤중에도 올 수 있으니까요.”
홱! 아르문트가 재빨리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 책 옆으로 드러난 귓가가 어쩐지 붉었다. 다급하게 제 얼굴을 책으로 가리는 모습을 발견한 로제타는 저 개복치가 또 왜 저러나, 의아해하며 방을 떠났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안심한 아르문트는 그제야 반쯤 구겨진 책을 내려놓았다.
-“오늘 신관님이 그러시기를, 제가 생각보다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대요!”
로제타의 해맑은 목소리가 잔상처럼 남아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붉은 입술이 위로 휘어졌다. 아르문트가 생선을 낚아챈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책을 읽었다. 종이가 좀 구겨지긴 했지만, 이제야 글자가 눈에 좀 들어왔다.
*** 그날 밤, 로제타는 혹 아르문트의 광증이 또다시 나타날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증상이라 했으니 잠을 자는 중에도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 때문에 내내 선잠을 자야 했으나, 새벽 중간중간 방에서 몰래 나와 아르문트의 기척을 살피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다행히 그날 밤에는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새벽빛이 걷히고 갓 떠오른 아침 해가 세상을 눈부시게 비추자 로제타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일을 나갈 준비를 마쳤다. 몇 시간 선잠을 자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이 끔찍할 법하나, 로제타에게는 매우 익숙하기만 했다. 호위기사일 적부터 해온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그녀는 연신 하품을 하며 방을 나섰다.
‘슬슬 아침 근무도 빠져야겠군.’
오늘을 마지막으로 아르문트 시중을 제외한 모든 일에 빠질 생각이었다. 미래가 바뀐 것을 안 이상, 더욱 확실하게 그를 호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제타. 좋은 아침입니다.”
“아, 리처드 경. 좋은 아침이에요.”
지나가던 로제타를 발견한 리처드가 곱게 웃으며 인사했다. 늘 인사성이 참 바른 친구구먼. 로제타가 잘 키운 손주를 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리처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는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로제타를 마주 보았다.
“저, 로제타.”
그가 주먹을 꽉 말아쥔 채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혹시 다음 휴일에, 약속 있으십니까?”
로제타는 두 눈을 껌뻑거렸다. 휴일? 내게 그런 게 있던가?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아르문트를 지켜온 그녀에게는 너무 낯선 단어였다. 그녀라고 이렇게 매일같이 일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하루 방심했다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 별도리가 없었다.
“만약에 없으시면…….”
꿀꺽. 리처드가 침을 삼켰다. 아르문트의 방해로 끝마치지 못했던 데이트 신청을 오늘에서야 할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어제부터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데이트 신청 또한 누군가의 개입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로제타.”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로제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