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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이리와, 로제타 (29/145)

29화. 이리와, 로제타2021.06.10.

16549569797157.jpg“왜, 왜 그러세요?”

로제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벌벌 몸을 떨며 제게 다가오는 남자 둘을 곁눈질했다. 두 남자는 겉으로는 일반적인 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헐렁한 옷 위로 슬쩍 드러나는 굴곡과 각이 잡힌 걸음걸이로 보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물론,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이건 간에 로제타가 본 실력을 발휘한다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밀리엄 백작 부인 앞에서 힘을 드러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이번 회차의 핵심은 로제타라는 전력을 감추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얌전히 혀를 뽑혀줄 수도 없는 노릇. 로제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다급히 말을 이었다.

16549569797157.jpg“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로제타의 호소에도 밀리엄 백작 부인은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원하는 대답이 따로 있는 것처럼.

16549569797157.jpg“으앗!”

이윽고 한 남자가 로제타의 뒤를 덮쳤다. 그러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 팔을 잡고 무릎을 꿇렸다. 다른 남자는 작은 단도를 꺼내 들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날카로운 칼날이 시야에 들어오자 로제타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1654956979717.jpg“멀쩡한 혀로 남길 말은 그것뿐이냐?”

백작 부인이 오만한 얼굴로 로제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르문트에 대한 정보를 뱉어내라는 마지막 협박이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칼날을 보며 로제타는 짧게 득실을 따져보았다. 힘을 써서 탈출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혀를 내주고 아르문트에게 빌미를 만들어주는 것이 나을까. 전자의 경우 앞으로의 호위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의사소통이 어려워질 것이다.

16549569797157.jpg‘발레리한테 바로 부탁하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최소한 의사소통은 가능하겠지. 또 혀가 잘리면 광증에 대한 의심도 한동안은 피할 수 있을 테고.’

로제타가 억지로 눈물을 짜내며 고민했다. 일한 지도 오래되지 않은 하녀가 황태자의 비밀을 감춰주기 위해 이런 고통을 감수한다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16549569797157.jpg“흐, 흐윽, 정말이에요……. 살려주세요, 백작 부인.”

그녀는 엉엉 울음을 토해내며 빌었다. 결국, 고통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혀가 잘리는 아픔은 분명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아르문트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어온 사람이었다. 혼자 열 명이 넘는 자객들을 상대하다 수차례 칼에 찔리기도 했고, 이글거리는 불 속에서 아르문트를 구하려다 심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모두 다시 겪지 않고 싶은 아픔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제 주군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시 겪을 수 있는 고난이기도 했다.

1654956979717.jpg“가만있어, 지저분하게 잘리면 너만 더 아파.”

단검을 든 남자가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로제타는 서늘한 칼날이 제 입술 근처에 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누군가 이 상황을 타개해주길, 하는 헛된 바람마저 들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오직 스스로뿐이라고 믿었다. 스스로가 해결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남자의 두툼한 손이 억지로 그녀의 입을 벌렸다. 그와 함께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혀끝에 닿았다. 로제타가 고통을 참기 위해 제 옷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그리고 칼날이 살덩어리를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1654956979717.jpg“그-.”

16549569797192.jpg“뭐야, 재미있는 걸 하고 있네?”

밀리엄 백작 부인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한 남자가 불현듯 나타나 끼어들었다.

16549569797192.jpg“불쌍한 하녀는 왜 잡고 그래?”

백작 부인은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즉시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숙였다. 마리아와 두 하인도 남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무릎을 굽혔다. 놀란 것은 로제타도 마찬가지였다. 별안간 등장한 사내가 그녀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기억하는 것보다 얼굴이 훨씬 어려 보였지만 확실했다. 밝은 금발은 늘 깔끔하게 올라가 있고, 눈썹 산이 유독 뾰족하며, 눈동자는 피처럼 붉다. 객관적으로 미남형 얼굴이나 인상은 썩 곱지 않다. 이러한 특징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은 황실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16549569821674.jpg“1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레이한 이샤벳 폰 라그나르. 라그나르 제국의 1황자이자, 아르문트의 정적이었다.

1654956979717.jpg“황자님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밀리엄 백작 부인이 로제타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자 그레이한은 터벅터벅 걸어와 로제타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얹었다.

16549569797192.jpg“어머님을 뵈러 왔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길래. 내가 와보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불쌍한 하녀가 죽어 나갈 뻔했잖아.”

로제타가 황당한 나머지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레이한은 그녀를 향해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16549569797157.jpg‘이건 또 뭔 짓거리야?’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음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그레이한이 제 어깨를 감싸다니. 혀가 잘리는 것보다 이게 더 싫었다. 누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짜증 나는 놈을 꼽으라 한다면 로제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레이한을 선택할 것이다. 처음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호위가 됐을 때, 그레이한은 그녀를 검을 든 창녀쯤으로 취급하며 희롱하고 또 비웃었다. 그러다 그녀의 능력이 제대로 알려지자, 그제야 영입하러 애를 썼다. 당연히 로제타는 거절했고, 그 이후로 그레이한은 틈만 나면 그녀를 비난해댔다. 그런 그레이한이,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하녀에게 친절을 베풀다니. 너무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지라 로제타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1654956979717.jpg“그 아이는 동정할만한 것이 못 됩니다. 황태자 전하의 전속 하녀예요.”

16549569797192.jpg“뭐? 얘가 아르문트 놈이 끼고돈다는 그 여자야?”

그레이한이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로제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아르문트가 날 끼고 돌았다는 거야? 로제타가 날조된 소문에 답답해했다. 정말 끼고 돌아줬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레이한이 곧바로 태도를 바꿀 것이라고 짐작했다. 친절을 베푼 이유는 그녀가 아르문트의 소속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레이한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16549569797192.jpg“오, 정말 끼고돌만한 얼굴이네. 이봐, 그런 재미없는 놈 옆에 있지 말고, 내 궁으로 오는 건 어때?”

1654956979717.jpg“황자님!”

밀리엄 백작 부인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저지했다.

1654956979717.jpg“황후 폐하가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16549569797192.jpg“알았어. 까다롭게 굴기는.”

그녀의 잔소리에 그레이한은 귀찮다는 듯 제 귀를 후벼팠다. 그러곤 다시 로제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16549569797192.jpg“어쨌든, 이 불쌍한 여인은 내가 데리고 간다. 가자, 예쁜아.”

예쁜아?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로제타가 제 귀를 의심했다. 저 자식한테 예쁜이로 불리다니, 당장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뒤에서 밀리엄 백작 부인이 그를 말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으나 그레이한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로제타를 끌고 나갔다. 그녀가 원했던 도움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덕분에 혀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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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69797157.jpg“감사합니다, 전하.”

본궁을 나와 후원에 도착한 로제타는 못내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삼대가 걸쳐 남을 업보였다. 그레이한은 답지 않게도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는 말했다.

16549569797192.jpg“살려줘서 고맙지, 예쁜아? 어떻게 갚을래?”

16549569797157.jpg“하하……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주먹으로 갚아주고 싶었다. 이빨을 다 털어주면 예쁜이라고 부르지 못하겠지. 그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16549569797192.jpg“글쎄…….”

그레이한이 손으로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반대쪽 팔은 여전히 로제타의 어깨에 걸친 상태였다. 로제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하녀의 신분으로 감히 그의 팔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16549569797192.jpg“그러고 보니, 예쁜이는 이름이 뭐야?”

그레이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또다시 눈웃음을 쳤다. 다른 여인이 봤더라면 헉, 소리를 낼만큼 예쁜 미소였으나 로제타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무려 제국 제일의 예쁜이, 발레리안과 함께 자란 그녀였다. 그리고 제국 두 번째 예쁜이, 아르문트의 얼굴을 밥 먹듯이 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한의 외모는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비호감인 상대가 자꾸 웃어대니 기분만 더러워졌다.

16549569797157.jpg“로제타입니다.”

로제타가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는 해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16549569797192.jpg“로제타구나. 얼굴처럼 이름도 예쁘네.”

그렇게 붙어 있어도 아르문트는 불러주지 않던 이름을 그레이한은 쉽게도 불렀다. 당사자는 전혀 원하지 않는 평가를 쉴 새 없이 해대는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성의 없이 하하 웃었다. 그녀가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레이한은 끊임없이 들이대기 바빴다. 로제타는 그런 그에게 대충 대꾸를 해주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16549569797157.jpg‘도대체 언제까지 잡고 있으려는 거야!’

그녀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눈치를 살폈다. 슬슬 놓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레이한은 계속 딴소리만 해댔다. 주로 허세 섞인 자랑이 대부분이었다. 로제타는 혹 아르문트가 자신이 없는 사이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눈을 도르륵 굴렸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밀리엄 백작 부인과 그레이한에게 잡혀 있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흐른 모양이었다.

16549569797157.jpg‘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그녀가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후원 깊숙한 곳에 다다라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이 많아 시야와 소리가 제한되는 곳. 언젠가 이런 장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기 좋아, 연인들이 밀회를 즐길 때 쓰곤 한다더라. 연인이 아닌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6549569797192.jpg“그래서, 로제타.”

그레이한이 돌연 멈춰 섰다. 그러곤 몸을 돌려 로제타와 마주 보았다. 문득 로제타는 무언가 좋지 않은 상황이 일어나리라는 직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한이 욕망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69797192.jpg“구해준 보답은 여기서 받을까 하는데, 어때?”

그럼 그렇지. 이 새끼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도와줄 리가 없지! 로제타가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보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을, 정확히는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16549569797157.jpg“저, 전하. 어찌 제가 감히…….”

로제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레이한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붙잡아 저지했다.

16549569797192.jpg“에이, 왜 빼고 그래? 아르문트 놈이랑도 뒹굴었으면서.”

16549569797157.jpg“아뇨, 그런 적 없어요! 황태자 전하께선……!”

16549569797192.jpg“짜증 나게 굴지 마. 네 혀를 지켜준 보답은 해야 할 것 아냐?”

그레이한은 그녀가 제 말을 순순히 듣지 않자 곧바로 사납게 굴었다. 아르문트에게는 허락해놓고, 제게는 까다롭게 군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그레이한에게 폭력을 썼다간 커다란 파문이 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혀를 뽑혔으면 뽑혔지, 그와 관계를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16549569797157.jpg‘어떡하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더니. 차라리 그 자리에 있을 것을 그랬다.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었다. 로제타가 입술을 짓씹으며 후회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재빨리 그레이한을 기절시키는 것. 그녀가 벌인 짓인 걸 눈치채지 못하게 기절시키는 것은 아무리 로제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그녀가 머뭇거렸다.

16549569797192.jpg“예쁜아, 얌전히 굴어. 그럼 귀여워해 줄 테니.”

좋아, 하는 거다. 로제타가 결심했다. 기억하든 말든 저런 쓰레기는 혼쭐을 내줘야 마땅하다. 그리고 마침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려는 순간,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16549569865659.jpg“어딜 갔나 했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로제타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16549569865659.jpg“여기서 뭘 하는 거지?”

불어오는 바람에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고, 그 아래로는 공들여 만든 인형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컴컴하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그레이한의 목을 잡아 뜯을 듯 서늘하게 빛났다.

16549569865659.jpg“이리와, 로제타.”

아르문트가 한 손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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