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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네가 그걸 왜 맞아! (30/145)

30화. 네가 그걸 왜 맞아!2021.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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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69974794.jpg‘지금 전하가 내 이름을 불러준 거야?’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어도 며칠은 더 노력해야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들을 줄이야! 그녀가 감격어린 표정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아르문트는 화려한 정복을 입고, 앞머리는 반쯤 까서 올린 채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흉흉한 눈빛으로 보아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몹시 화가 난 기색이었다. 로제타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 허리를 붙잡고 있던 그레이한의 팔은 단숨에 떼버렸다. 윽! 예상치 못한 괴력에 그레이한이 놀라 신음을 흘렸다. 그러건 말건 로제타는 손을 뻗어 아르문트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16549569974794.jpg“전하……!”

푸른 눈동자 위로 촉촉한 물기가 어리었다. 이는 아르문트가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감동에 의한 것이었으나, 아르문트의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혔다. 안 그래도 손버릇이 좋지 않은 그레이한과, 그에게 억지로 붙잡혀 어쩔 줄 몰라하던 로제타.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더욱 사나워졌다.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가 로제타의 손을 꽉 움켜잡더니, 그녀를 제 뒤로 이끌었다. 로제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에, 넓은 어깨, 근육이 잘 박인 등. 아주 훈훈하고도 듬직한 모습이었으나, 그보다 훨씬 덩치가 큰 기사들과 평생을 보내온 로제타에게는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16549569974794.jpg‘우리 개복치,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다 컸어.’

로제타가 어미 새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널찍한 등에 얼굴을 기댔다. 이를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는 그 접촉 또한 두려움의 의미로만 해석하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서늘한 시선을 마주한 그레이한은 잠시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6549569974813.jpg“이게 누구야, 우리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 아니야? 그 연약한 몸으로 여기까진 무슨 일이래?”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호위도 없이. 그가 샐쭉이 웃으며 빈정거렸다. 아르문트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연약한 몸을 운운하는 이유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근 아르문트가 호수에 빠져 기절했다는 정보가 새어나간 모양이다. 혹은 새어나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거나.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기에 아르문트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습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였다.

16549569974818.jpg“너야말로, 이런 으슥한 곳에서 내 하녀의 허리는 왜 붙들고 있었지? 네 더러운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나, 싫다고 하는 여인을 억지로 붙잡아둘 정도로 추잡한 줄은 몰랐군.”

아르문트가 예쁘장한 입매 위로 냉소를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16549569974818.jpg“애인처럼 달고 다니던 신관은 어디 두고, 왜 죄 없는 사용인에게 그 지저분한 손을 얹고 그러나?”

로제타가 그의 뒤에서 몰래 감탄했다. 자신을 향할 때는 짜증 나기 짝이 없던 저 독설이 적을 향하자 이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의 몸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16549569974813.jpg‘예전에는 찍소리도 못 하던 자식이……!’

그레이한이 눈을 치켜뜨고 아르문트를 노려보았다. 날 때부터 황태자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아르문트와 달리, 그레이한은 모르트마르 백작가에서 황가의 피를 이은 아이라며 오냐오냐 자라왔다. 황제는 종종 백작가를 찾아와 그의 어깨를 정답게 어루만졌고, 그 방문이 계속될 때마다 그의 자존심과 방만함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았다. 그리고 마침내 황자로 인정받아 황궁에 들어온 날, 그는 정말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세상 만물이 제 발아래 있는 것만 같았다. 세 살 어린 이복동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르문트는 그레이한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정부 소생인 그와는 다른, 정통한 피를 이은 라그나르 제국의 황태자. 그 직함이 그레이한은 못 견디게 싫었다. 그리하여 그레이한은 황궁에 발을 들인 이튿날부터 아르문트를 은밀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르문트가 먹을 음식에 벌레를 끼얹었고, 은근슬쩍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으며, 실수인 척 밀어 호수에 빠트렸다. 어린 아르문트는 그 모든 것을 울며 당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아르문트가 영원히 순수한 아이로만 남아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자라 소년이 되었고, 비상한 머리를 바탕으로 제왕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키도 그레이한의 것을 훌쩍 넘어섰으며, 검술 실력도 감히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아르문트는 괴롭힘에 쉬이 넘어가지 않았을뿐더러, 그레이한의 꾀를 역이용해 되갚아주었다. 또한 제 입을 통하지 않는 방법으로 황제에게 그레이한이 지금까지 해온 짓을 알렸다. 그레이한의 만행을 알게 된 황제는 그를 크게 꾸짖었고, 심지어 황후에게도 아들 관리를 제대로 하라며 쓴소리를 했다.

1654956997485.jpg-“그레이한, 참아라. 참지 않으면 네가 그놈을 발아래에 둘 일은 없을 거다.”

황후의 차가운 일침을 들은 후에야 그레이한은 감정을 누르는 법을 배웠다. 다만 워낙 성정이 불같은 탓에 스물일곱인 지금까지도 제 분노를 죽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레이한이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고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16549569974813.jpg“무슨 소리야, 동생. 이 형님은 그저 불행한 하녀를 잠시 보살펴주고 있었을 뿐이야.”

아르문트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저놈에게 동생 소리를 듣는 것만큼 짜증스러운 일이 따로 없었다.

16549569974818.jpg“내 하녀에게 그 어떤 불행한 일이 있었든, 네게 붙잡힌 것보다 더 끔찍하진 않을 것 같다만.”

16549569974813.jpg“지금 고작 하녀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야? 이런 천한 것에게 관심을 줄 시간에, 약혼이나 하지그래.”

약혼을 언급하자 아르문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레이한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었다.

16549569974813.jpg“안 그래도 어머님이 네 약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더군. 그 나이 먹고도 약혼이 아직이라니, 귀족들 보기 민망하잖아. 그러게 귀족 영애들한테 사근사근하게 굴지 그랬어.”

본래 황태자의 약혼은 황제와 황후가 귀족들과 논의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이나,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은 지금, 그 권리는 황후의 손에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 어미를 배신하고, 그 자리까지 빼앗은 여인이 친히 골라준 약혼녀를 아르문트가 달가워할 리 없다. 실제로 아르문트는 계속해서 약혼을 거부하고 있었다.

16549569974818.jpg“알잖나. 본디 사근사근한 성격은 못 되어서 말이야.”

아르문트는 조금의 타격도 없는 얼굴로 생긋 웃어 보였다.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가시가 가득했다.

16549569974818.jpg“다만 내 걱정을 하기 전에 네 약혼녀나 신경 쓰지그래? 데브라 영애께서 파티만 열렸다 하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아무래도 제 약혼자가 다른 여인들에게 사근사근하게 굴기 바빠 그러는 것이 아니겠나?”

16549569974813.jpg“너……!”

그레이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성질을 참으려 노력했으나,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르문트가 그를 향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러곤 비밀스러운 것을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16549569974818.jpg“아니면 약혼자의 천박한 핏줄이 성에 차질 않는 것이거나.”

치부를 서슴없이 찌르는 말에 그레이한의 눈이 까뒤집혔다. 그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값비싼 보석이 알알이 박힌 반지를 낀 손이 허공을 가르고 아르문트를 향해 접근했다. 그럼 그렇지. 아르문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먹을 응시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개가 똥을 끊지, 저 단순무식한 놈이 성질을 주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주먹을 피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피하는 대신 적당히 빗맞을 작정이었다. 그리한다면 저놈을 몇 주는 조용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황후의 얼굴도 뜨거워질 테고 말이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로제타라는 변수였다. 누군가 강한 힘으로 아르문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뒤로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그의 시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 담겼다. 퍼억! 선명한 타격음과 함께 붉은 머리카락이 푸른 하늘 위로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가느다란 여체가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쿵! 여인의 몸이 큰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주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로제가 아르문트를 대신하여, 그레이한의 주먹에 머리를 맞은 것이었다. 그것도 커다란 반지를 여러 개 낀 주먹에.

16549569974818.jpg“……로제타?”

아르문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늘 쾌활하던 여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장 난 인형처럼 눈을 반쯤 뜬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16549569974813.jpg“힉……!”

그레이한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머리가 붉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피가 많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16549569974813.jpg‘주, 죽은 거 아냐? 이게 알려졌다간……!’

하녀 한 명 죽은 것쯤이야 큰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뒤에서 처리할 때의 얘기일 뿐. 황자가 대낮부터 하녀를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나면 평판이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가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르문트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즉, 잘만 하면 아르문트의 짓으로 넘길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레이한은 판단과 동시에 빠르게 다리를 놀렸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자리를 벗어났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를 잡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로제타의 곁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향해 뻗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16549569974818.jpg“로제타.”

톡. 손가락 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약지에 무언가 축축한 것이 묻어났다. 피였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신관을, 신관을 불러와야……. 그가 겨우 이성적인 생각을 짜냈다. 놀랄 시간이 없다. 얼른 안아 들고 신관을 찾아야 한다. 그가 이를 악물고 여인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고 하였다. 로제타가 갑자기 입술을 말아 올려 웃지만 않았더라면.

16549569974794.jpg“갔어요?”

그녀가 예쁜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16549569974794.jpg“어때요, 제 연기? 진짜 크게 다친 것 같았죠?”

16549569974818.jpg“너……!”

16549569974794.jpg“머리카락 색이 이럴 때 쓸모 있더라고요. 뭐가 피고 뭐가 머리카락인지 구분이 어려워서.”

사실 얼마 안 다쳤는데 말이에요. 로제타가 실실 웃으며 덧붙였다. 피가 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리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보석이 박혀 있었다곤 해도 저런 약한 놈의 주먹질에 맞고 다칠 리가 없다. 바닥을 짚은 아르문트의 단단한 팔뚝이 일순 휘청거렸다. 로제타가 그런 그를 빠르게 지탱해주었다.

16549569974794.jpg“전하!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어요?”

16549569974818.jpg“지금 그게 문제야?!”

아르문트가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로제타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정적 가운데 그가 숨을 씨근덕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16549569974818.jpg“도대체…….”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다른 것도 아니고, 로제타에 대한 걱정 때문에.

16549569974818.jpg“도대체, 네가 그걸 왜 맞아!”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16549569974818.jpg“그냥 가만히 뒤에 있을 것이지, 왜 나와서 그딴 새끼한테……!”

16549569974794.jpg“그야, 당연하죠.”

로제타가 그의 말을 끊었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는 듯, 몹시 평온한 목소리로.

16549569974794.jpg“저는 전하를 지키고 싶으니까요.”

진심으로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아르문트의 눈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굴은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눈앞의 여인을 껴안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16549569974818.jpg‘미친 건가.’

아르문트가 제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하녀를 상대로 이딴 생각을 하다니,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16549569974818.jpg“후…….”

불그스름한 입술 사이로 한숨 소리가 나직이 새어 나왔다. 이내 그의 팔이 로제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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