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나만 쓸 수 있는 애칭 (32/145)

32화. 나만 쓸 수 있는 애칭2021.06.20.

16549570497932.jpg“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르문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슬쩍 뒤로 물렸다. 로제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민망한 소리를 해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아직도 적응이 어려웠다. 경험을 통해 저런 말들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알았으나, 낯이 뜨거워지는 것은 여전했다. 로제타가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듯 말했다.

16549570497937.jpg“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에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고요.”

아르문트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들을 왜 물려달라 하나 했더니, 광증에 대해 얘기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한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70497932.jpg“아까부터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스트레스는 내가 아니라 네가 받았겠지.”

밀리엄 백작 부인에게 혀를 뽑힐 뻔한 것도, 그레이한에게 추행을 당하다 주먹에 맞은 것도 모두 로제타였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주제에 계속 자신만 걱정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다 못해 답답했다. 해소되지 않는 갑갑함에 아르문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심정도 모르고 로제타는 생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16549570497937.jpg“에이, 저는 괜찮아요. 고작 그 정도로 스트레스는 무슨.”

내가 너처럼 개복치도 아니고. 로제타가 말을 삼켰다. 아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물론 거짓말일 테다. 그레이한의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아주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내내 고생했으니까. 그러나 로제타의 기준에서 이는 그저 해프닝에 불과했다. 굳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사소한 해프닝. 그녀를 정말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16549570497937.jpg“저는 전하만 무사하시면 다 괜찮아요.”

바로 아르문트의 안위였다. 그만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회귀를 멈출 수 있다면, 다른 고통쯤이야 모두 참아넘길 수 있다. 로제타가 그렇게 생각하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로제타의 답변에서 또다시 착각할 거리를 발견한 탓이었다.

16549570497932.jpg‘지금까지 어떤 취급을 당해왔으면 이걸 고작이라고…….’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꾸만 짜증이 밀려들었다. 늘 스스로를 동정하기 바빠 다른 이의 사정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던 그였으나, 로제타를 만난 후로는 그녀가 직접 언급한 적도 없는 사정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이를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불쾌한 질문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16549570497932.jpg“나 또한 고작 이 정도로 빌빌거릴 만큼 약하지 않다.”

아르문트가 당당한 표정으로 호언장담했다. 그러곤 까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70497932.jpg“그러니 그런…… 이상한 말 좀 함부로 하지 마.”

16549570497937.jpg“네? 무슨 말이요?”

16549570497932.jpg“밤중에 방에 찾아오겠다는 말 같은 것.”

아니, 그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어디 있다고……. 로제타가 꿍얼거렸다. 아까는 숨도 함부로 못 쉬게 하더니, 이제는 말까지 제한한단 말인가. 누가 악명 높은 황태자 전하 아니랄까 봐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16549570497937.jpg“참, 전하!”

기억을 되새기다 보니 문득 좋은 일도 한 가지 떠올랐다. 로제타가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49570497937.jpg“이제 저, 이름으로 불러주시는 거죠?”

절대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고작 하루 만에 부탁을 들어줄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다. 기사일 적에도 어지간해선 이름 대신 ‘경’이라고만 칭하던 그였다. 그렇게 오래 봤는데도 낯을 가리던 그가 이렇게 빨리 마음을 열다니. 여러모로 이번 회차는 느낌이 좋았다.

16549570497937.jpg“한 번 더 불러주세요. 네?”

그녀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요청했다.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으나 아르문트의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16549570497932.jpg“싫다.”

16549570497937.jpg“네? 왜요! 아까 전엔 불러주셨잖아요!”

16549570497932.jpg“아까 전엔 부를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가 로제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고작 이름일 뿐이건만 왜 입에 담기 어려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로제타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녀의 눈 위로 강렬한 투지가 이글거렸다.

16549570497937.jpg“오늘치 소원 쓸게요. 제 눈 보면서 이름 세 번 불러주기!”

16549570497932.jpg“내게는 거부권이 있다만.”

16549570497937.jpg“기억 안 나세요? 무리한 부탁이 아닌 이상, 아무 이유 없이 거절하는 건 안 돼요!”

아르문트는 그것까진 기억하지 못한 모양인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를 발견한 로제타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16549570497937.jpg“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고작 하녀 이름 부르는 게 부끄러우신 건 아니죠?”

16549570497932.jpg“누가 그런 걸로……!”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자신이 이름 하나 부르는 걸 부끄러워하겠나. 입에 담기 싫은 건 그저……. 아르문트가 미간을 구겼다. 달리 떠오르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유롭게 말했다.

16549570497937.jpg“그게 아니라면 불러주시면 되겠네요. 아까처럼 로제타라고 해도 좋고, 로즈나 로지같은 애칭으로 불러주셔도 좋아요. 제 친구들은 그렇게 부르거든요. 전하께서 편하신 대로 하세요.”

발레리안은 그녀를 로즈라고 부르곤 했고, 멜라니나 엘리아 같은 동료들은 주로 로지라고 불렀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면서도 로제타는 그가 제 애칭을 부를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도 꺼리는 사람이 애칭을 불러줄 리가 있나. 그런데도 굳이 로즈니 로지니 하는 애칭을 설명한 것은 반쯤 그를 놀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아르문트는 그녀의 말에 숨겨진 의도 또한 빠르게 읽어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곁눈질했다. 시야 한 편에 로제타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겁도 없이 자신에게 밀착한 채로 말이다. 그를 채근하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몸을 붙인 모양인지, 로제타는 이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정작 그는 살결이 닿은 순간부터 긴장했는데 말이다. 아르문트는 그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둘의 관계에서 얼굴을 붉히는 쪽은 항상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분명 로제타가 자신을 좋아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저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 모습을 보고 싶다. 또다시 낯선 충동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이를 참지 않기로 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로제타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코앞에서 시선이 닿았다. 금방이라도 스칠 듯 밀접한 거리에 그녀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르문트 특유의 향기가 은근하게 코끝을 스쳤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미묘하게 야릇한 향기였다.

16549570497932.jpg“로제타.”

낮고 깊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가까워서 몸을 물리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옭아맨 기분이었다.

16549570497932.jpg“로제타.”

불그스름한 입술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싫어할 때는 언제고, 퍽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됐어요! 로제타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선수를 쳤다.

16549570497932.jpg“로제.”

예쁜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16549570555488.jpg

  홀린 듯 그의 미소를 바라보던 로제타는 이내 화르르 얼굴을 붉혔다. 애칭을 부르다니. 그것도 저렇게 꿀이 떨어지는 목소리로! 이건 폭력이나 다름없다. 잘생김을 무기 삼아 자신을 마구 때린 것이다. 로제타가 억울함에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두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로. 이를 확인한 아르문트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70497932.jpg“이제 됐나?”

16549570497937.jpg“왜, 왜 굳이 이 자세로……! 게다가 갑자기 웬 애칭이에요!”

그가 얼굴을 떼어내고 나서야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참았던 숨도 그제야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아르문트는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16549570497932.jpg“네가 부르라며?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만.”

16549570497937.jpg“그런 애칭은 옵션에 없었는데요!”

16549570497932.jpg“황태자가 되어서 아무나 다 부르는 것을 함께 부를 수야 없지. 나만 쓸 수 있는 애칭이 좋아. 알다시피 고귀한 몸인지라, 특별한 걸 소유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래? 애칭에 소유권이라도 있나. 로제타가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그의 뻔뻔한 태도에 차마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맹랑하게도 제 앞에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9570497932.jpg“할 말 끝났으면 이만 네 방으로 가. 가서 자.”

16549570497937.jpg“네? 아직 해가 쨍쨍한데요? 전하 오늘 다른 스케줄도 있으시고…….”

16549570497932.jpg“……설마 그 몸으로 나를 계속 쫓아다니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16549570497937.jpg“그야 당연히.”

로제타는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르문트의 차가운 눈빛이 제 피부를 따갑게 쪼아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면 친히 그녀를 침대에 묶어놓고 갈 눈빛이었다.

16549570497937.jpg“당연히, 아니죠. 역시 오늘은 쉬어야겠어요!”

16549570497932.jpg“그래.”

아르문트가 잘 생각했다며 씩 웃었다. 로제타는 마주 웃어 보였으나 속으로는 툴툴거리기 바빴다. 이 시간에 자러 가라니, 할아버지도 아니고.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16549570497937.jpg‘뭐, 말만 이렇게 하고 몰래 그를 따라다니면 그만이니까.’

이렇게 생각한 순간, 아르문트가 귀신같이 말을 이었다.

16549570497932.jpg“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네가 명령에 불복하고 다른 곳을 쏘다녔다는 얘기가 내 귀에 들어오면-.”

그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휘어졌다. 황금색 눈동자 위로 흉흉한 기운이 번들거렸다.

16549570497932.jpg“뒷감당은 각오해야 할 거야.”

꿀꺽. 로제타가 또다시 침을 삼켰다. 그러곤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였다.

16549570497937.jpg“그럼요, 걱정 마세요! 침대에만 딱 붙어 있을 테니까요.”

  *** 그리하여 로제타가 과연 침대에 딱 붙어 있었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딱 붙어 있기는 무슨, 단 10분도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았다. 아르문트가 방을 떠남과 동시에 그녀의 미행도 시작되었다. 이번 미행은 그 어느 때보다 난도가 높았다. 아르문트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가 정말 사용인들에게 그녀를 본 적이 있냐 묻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로제타는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길만을 이용해 아르문트의 뒤를 쫓았다. 그것은 정말 ‘길’이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지형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나무 같은 것 말이다. 연무장에 도착한 아르문트가 기사단장의 지도에 따라 검을 휘두를 때, 로제타는 근처 나무 위에 다람쥐처럼 숨어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나무 위에서, 특히 기사들이 잔뜩 깔린 연무장 근처에서 기척을 숨기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으나, 익숙해지고 나니 마치 제 침대처럼 편했다. 큰 가지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누워 ‘검 그렇게 휘두르는 거 아닌데.’ 하고 마음속으로 지적을 할 정도였다. 다만 평소보다 무리하긴 했는지, 모든 일정이 끝마치고 방으로 오니 삭신이 쑤셔왔다.

16549570497937.jpg‘그러게 전하는 왜 쓸데없이 걱정을 해 가지곤…….’

빠르게 몸을 씻고 돌아온 로제타가 침대에 몸을 누이며 툴툴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아르문트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또한 목욕을 마치고 잘 준비를 하고 있는듯했다.

16549570497932.jpg-“로제.”

돌연 제 애칭을 부르던 아르문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코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던 그 완벽한 얼굴도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로제타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르문트가 잘생긴 걸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단 말인가.

16549570497937.jpg‘애칭을 불러준 건 처음이니까. 놀란 거지.’

그녀는 차분히 제 증상에 대한 진단을 내렸다. 그런 얼굴과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데 두근거리지 않을 여인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로제타는 부드러운 이불을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몸을 써서 그런지, 아니면 어제 제대로 자지 못 해서 그런지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이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로제타의 바쁜 하루도 그렇게 저무는 듯했다. 그러나 세 시간 후.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던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아르문트가 있는 쪽을 향했다. 아르문트의 방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하나, 그 움직임은 평소와 전혀 다른 기척. 아르문트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짐승처럼 변한 아르문트의. 아무렇지 않다며 호언장담하던 것과 달리, 그의 광증이 또다시 발현한 것이었다.

16549570497937.jpg‘저놈의 개복치!’

로제타가 다급히 일어나 아르문트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짧은 통로를 가로질러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침대 옆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아르문트가 집착이 득실거리는 눈으로 로제타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저번과 같은 눈빛이었다. 평소의 냉정함을 모두 잃고, 그녀를 향한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 이내 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165495706132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