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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안 돼요, 전하 (33/145)

33화. 안 돼요, 전하2021.06.24.

로제타는 평온한 눈으로 제게 달려드는 사내를 응시했다. 이미 그의 변화를 예상하고 들어온 것이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살펴봐도 평소의 아르문트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당황스럽기는 했다. 아르문트는 본디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서도 우아함과 귀족다움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기사 생활을 하며 많은 귀족을 만나 보았지만, 그처럼 남다른 태가 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샛노란 눈동자는 흑표범의 것처럼 사나웠고, 달려드는 몸짓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오후까지만 해도 단정하게 올리고 있던 머리는 잔뜩 흐트러졌으며, 입고 있던 잠옷 가운은 침대 위에 팽개쳐져 있었다.

16549570685273.jpg‘가운 아래 바지를 따로 입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된 호위기사로서 제 주군이 무얼 입고 있든, 혹은 벗고 있든, 건강을 해칠 정도만 아니라면 신경 쓸 바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내심 부끄러운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내 아르문트의 손이 제게 가까워졌다. 로제타는 딴생각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몸을 옆으로 피했다. 목적 잃은 손이 허공을 가르더니, 아르문트가 가벼운 몸짓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다시 노려보았다. 크르릉, 하는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16549570685273.jpg‘움직이는 느낌도 정말 발로 같잖아. 이런 병이 정말 있다고?’

로제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마주했다. 아르문트는 이를 3년 전부터 발병했던 광증이라고 표현하며, 의사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관 또한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했으니, 저주나 마법에 의한 것도 아닐 테다. 그러나 여전히 로제타는 미심쩍기만 했다. 대신관마저 1 황자 쪽으로 넘어간 상황에, 그 진단을 정말 믿을 수 있는가?

16549570685273.jpg‘게다가 강한 저주의 경우 가벼운 진단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텐데. 초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도 종종 있고…….’

아주 오래되었거나, 수준 높은 저주의 경우 어지간한 대신관도 알아보거나 정화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황을 만나면 해결되는 일이긴 하나, 그는 곧 왕좌에 오를 사람인만큼 교황청에 괜한 빌미를 주어선 곤란하리라. 발레리안이 치유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모든 걸 잘하는 그가 유일하게 못 하는 분야가 바로 정화마법이었다. 치유마법은 어느 정도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나, 하필 정화만은 영 젬병이었다.

16549570685273.jpg‘테오도르 신관. 그가 유일한 해결책이야.’

로제타가 계속 이어지는 아르문트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생각했다. 몇 년 뒤 그는 대신관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신성력을 발휘할 인물이다. 손만 대도 불치병을 치료할 만큼 대단했다던 역대 최고의 천재를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애초에 그런 신관은 배출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지금 당장은 무리일지라도, 곁에 두고 잘 지원해주면 원래보다 더 이른 시일 내로 실력을 키울 것이다. 그때 아르문트의 몸을 살피게 하면 이 증상이 정말 병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저주인지 알 수 있을 테다.

16549570685292.jpg“크윽!”

계속해서 로제타를 덮치려 애쓰던 아르문트가 답답함에 신음을 내질렀다.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로제타는 흠, 소리를 내며 그의 처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6549570685273.jpg‘저번처럼 기절시켜주면 되는 건가?’

그녀가 저 멀리 있는 문을 흘끔 바라보았다. 문밖의 호위기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오늘의 당번은 러크였다. 기사단장에게 주의를 받은 뒤로 근무태도가 달라졌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로제타가 다시 아르문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곤 뚜두둑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힘을 쓸 생각을 하자 본능적으로 그녀의 주위로 미세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아르문트는 로제타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닿음과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16549570685273.jpg“이리 와요, 전하.”

제가 재워줄게요. 로제타가 해맑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가 다가오면 당장 목 뒤를 쳐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아르문트가 갑작스럽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쏜살같이 움직여 침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얼굴만 빼꼼 들어 올려 경계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당연히 그가 제게 뛰어들 줄만 알았던 로제타는 당황스러워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에게 공격하려는, 혹은 민망한 의미로 어떻게 해보려는 욕구만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16549570685273.jpg‘저 모습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로제타가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목욕시키기 전에 발로가 하던 짓이 딱 저랬다. 구석에 숨어 자신을 노려보다, 결국 처참한 얼굴로 끌려가고는 했다. 이를 떠올리자 한 가지 가능성이 벼락처럼 뇌리에 꽂혔다.

16549570685273.jpg‘어쩌면…….’

공격하거나 덮치려 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정말 짐승처럼 변하는 거라면, 통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르문트가 갑자기 증상이 나타나 남을 덮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광증을 들킬 위험도 낮아지고 말이다. 꿀꺽. 로제타가 결연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러곤 제 잠옷 치마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녀를 경계하듯 바라보던 아르문트의 눈동자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세차게 흔들렸다. 하얗고 길쭉하고 보들보들한 것. 바로, 먼지떨이였다. 본래는 아르문트가 하사한 검이자, 회귀의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나, 요즘에는 먼지를 털어내는 용도로만 쓰이고 있는, 그 먼지떨이 로제타가 과거 고양이용 낚싯대를 흔들던 경험을 살려 실감 나게 먼지떨이를 흔들어 보였다.

16549570685273.jpg“안 잡을게, 나와봐요. 아이 재밌겠다.”

그녀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아르문트를, 정확히는 커다란 고양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를 유혹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먼지떨이의 움직임을 쫓았다. 고개도 움찔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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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확인한 로제타는 다친 새처럼 먼지떨이를 흐느적거리다, 이내 빠르게 허공으로 번쩍 들어 보였다. 그러자 설마 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침대 뒤에 숨어 있던 아르문트가, 침대 위로 세차게 도약해 먼지떨이를 잡아챈 것이다. 로제타는 자신이 계획한 일인데도 차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르문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먼지떨이를 잡아 뜯고 있었다.

16549570685273.jpg‘좋아.’

손가락 끝부터 전율이 밀려들었다. 저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16549570685273.jpg‘조련할 수 있겠어!’

짐승처럼 구는 제 주군을 얌전하게 조련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로제타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그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6549570685292.jpg“크으…….”

한 발짝 걸었을 뿐인데 곧바로 경계의 시선이 돌아왔다. 그녀가 잠시 기운을 풍긴 이후로는 쭉 저 얼굴이었다. 짐승처럼 변해서 그런지 감각도 더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16549570685273.jpg“전하.”

로제타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시선이 마주하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일명 ‘고양이 눈인사’로, 발로와 처음 친해질 때 썼던 방법이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아르문트 또한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해를 입힐지, 아닐지 가늠해보는 듯했다. 잠시의 정적 후 그의 경계가 조금쯤 옅어진 후에야 로제타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다시 경계하면 그녀도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르문트의 곁에 다가설 수 있었다. 아르문트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 앉은 그녀는 그에게 슬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벌써 접촉을 시도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광증을 얼른 교정해주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저번에 자신에게 마운팅을 한 걸 보면 모종의 관심은 있는 것 같으니 잘하면 만지는 것까지는 가능할 테다. 아르문트가 가느다란 눈매로 제게 점점 다가오는 손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손이 그의 머리에 닿으려는 찰나,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었다.

16549570685273.jpg“으앗!”

로제타가 작게 신음했다. 잠시 방심했더니, 어느새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제 위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강한 악력으로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곤 만족스럽다는 듯 씩 입술을 말아 올렸다. 기시감이 들었다. 저번에 당했던 그 자세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무언가 제 다리를 찔러온 것이다. 로제타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상황만은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거늘. 잠시나마 방심한 자신이 바보였다.

16549570685273.jpg“안 돼요, 전하!”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르문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그르릉 소리를 내며 즐거워할 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로제타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붉은 입술이 가느다란 목선에 닿으려는 순간, 순식간에 손을 빼낸 로제타가 그의 턱을 붙잡아 저지했다.

16549570685292.jpg“큭!”

16549570685273.jpg“씁. 이러면 안 돼요, 전하.”

아르문트는 어떻게든 그녀의 손을 찍어누르려 했으나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시도했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로제타가 냉정한 눈빛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16549570685273.jpg“좋아요, 오늘은 ‘안 돼요’라는 말을 익히는 데까지 해봅시다.”

짐승의 조련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딱 한 가지는 잘 알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수없이 반복해서 알려줘야 한다는 점. 그리고 엄청난 인내심으로 수차례의 회귀를 반복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황태자궁에서 가장 화려한 방에는 ‘안 돼요’라는 말이 수십 번씩 반복되었다. 이리저리 펄펄 날뛰던 아르문트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허리를 들썩이려는 움직임도 한결 줄어들었다. 다만 놀라운 점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를 민망하게 한 그것은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연애에 무지한 로제타조차도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라는 걸 인지할 정도였다.

16549570685273.jpg“흐암, 안 돼요…….”

해가 떠오르려는 시간, 여태껏 아르문트와 내내 씨름한 로제타는 하품을 연신 뱉으며 입에 익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위에 누워 있던 아르문트가 마침내 정신을 잃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가슴께에서 들려왔다.

16549570685273.jpg‘이제 나도 방에 가야지.’

로제타가 다시 한번 하품하며 생각했다. 밤새 고생한 탓인지, 혹은 맞닿은 아르문트의 피부가 따뜻하기 때문인지, 졸음이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16549570685273.jpg‘가야…… 하는데…….’

그녀의 몸에 점점 힘이 빠졌다. 강력한 수마가 기어코 그녀를 집어삼킨 것이었다. 새벽 동이 트는 무렵, 황태자의 방 안에는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다정히 껴안은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

16549570754351.jpg“전하.”

굵직한 목소리가 아르문트의 잠을 깨웠다. 높낮이 없고 무뚝뚝한 목소리. 리처드의 것이었다.

16549570754351.jpg“전하, 아직 취침중이십니까?”

검은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가고 태양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 아르문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환한 햇빛으로 물든 제 방의 풍경이 보였다.

16549570685292.jpg‘늦잠을 잔 건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원체 잠을 잘 자지 않는 편이고, 때로 겨우 숙면을 취하더라도 아침이 되면 벌떡 일어나곤 했다. 심지어 증세를 보인 날에도 잘만 일어나던 그였다.

16549570685292.jpg‘옷은 또 왜 벗고 있어.’

그가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밤사이 광증이 또 발현된 모양이다. 광증이 나타날 때면 꼭 이렇게 옷을 벗어놓고는 했다.

16549570754351.jpg“전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리처드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아르문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16549570685292.jpg“그래.”

그리고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말도 안 되는 것이 시야 한 편에 담겼다. 잠옷 차림의 로제타가 제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추 몇 개도 뜯어진 채로.

16549570685292.jpg‘이, 이게 무슨……!’

아르문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대관절 로제타가 왜 여기 누워 있는단 말인가? 그것도 저런 얇은 차림으로? 누가 보면 그와 무슨 일이라도 벌인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으니.

16549570754351.jpg“예, 들어가겠습니다.”

리처드가 문을 열고 있었다. 이제 아르문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런 꼴을 제 호위에게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고급스러운 이불이 크게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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