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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이불 아래 두 남녀 (34/145)

34화. 이불 아래 두 남녀2021.06.27.

16549570851092.jpg“……전하?”

리처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진 않았으나 아마 표정도 퍽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르문트는 그렇게 짐작했다. 직접 보는 대신 짐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현재 이불 아래 몸을 숨긴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로제타에게 몸을 밀착한 상태로.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으나, 로제타의 몸을 가리기에는 제법 적절한 선택이었다. 방이 넓어 문에서 침대까지의 거리가 있고, 또 아르문트의 몸이 로제타의 것을 너끈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커서 리처드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테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자신이 리처드에게 머저리처럼 보이리라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오라 해놓고 정작 자신은 이불 속에 숨어 있는, 천하의 머저리처럼 말이다. 호위 기사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 늘 완벽한 모습을 고수해온 아르문트가 자괴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16549570851092.jpg“어디…… 아프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리처드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제 주군의 이상행동을 처음 목격한 자의 두려움이 전해졌다.

165495708511.jpg“썩 몸이 좋지 않군.”

아르문트가 부러 아픈 목소리를 내었다. 괜히 기침도 몇 번 콜록거렸다. 이상한 소문이 날까 아프더라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던 그였으나, 지금은 차라리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머저리 같은 황태자가 되느니 연약한 황태자가 되는 게 나으리라.

16549570851092.jpg“정말입니까? 당장 신관을 불러오겠습니다!”

165495708511.jpg“아니!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니다. 신관은 부르지 마.”

16549570851092.jpg“그래도…….”

고지식한 리처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침대만 쳐다보았다. 신관을 부르지 않았다가 그의 병이 심해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르문트가 행여나 로제타의 팔다리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갈까 그녀의 몸을 꼭 붙잡으며 침음했다. 고마운 충성심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넣어두라 하고 싶었다.

165495708511.jpg“정말-.”

정말 괜찮다. 이렇게 말하려는 찰나, 괜찮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로제타가 느닷없이 눈을 번쩍 뜬 것이었다. 얇은 이불 아래, 두 남녀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로제타가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아르문트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다급하게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고작 그 손짓만으로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정신을 차린 로제타가 기어코 놀라 몸을 번쩍 일으키려 했다.

16549570851124.jpg“읍!”

다행히 아르문트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몸을 덥석 껴안아 붙잡은 덕에 이불이 떨어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다만 리처드의 의심까지는 차마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16549570851092.jpg“……전하? 방금 무슨!”

165495708511.jpg“괜찮다, 오지 마!”

아르문트가 다급히 소리쳤다. 조금 더 가까이 왔다가는 이불 속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 것이다. 그가 로제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로제타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165495708511.jpg“방금은, 몸이 뻐근해서 스트레칭을 한 것뿐이야.”

16549570851092.jpg“스트레칭을 왜 이불 속에서 하십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였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르문트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이미 벌인 짓 마무리는 지어야 하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165495708511.jpg“오늘 내 상태가 썩 보기 좋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본론만 말하고 나가줬으면 하네.”

16549570851092.jpg“정말 신관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165495708511.jpg“내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경도 잘 알 텐데.”

16549570851092.jpg“업무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르문트의 말에 서릿발 같은 냉조가 섞이자 리처드가 서둘러 걱정을 거둬들였다. 싸늘한 태도를 마주하니 그제야 제가 아는 황태자 전하 같았다.

16549570851092.jpg“지난 밤중에 후원 주변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저를 포함한 몇 명의 기사가 확인한 결과…….”

리처드의 업무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이불 아래의 두 남녀는 온몸을 꼭 밀착한 채 침묵을 유지했다. 로제타가 고개를 숙인 덕에 계속 시선이 마주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은 피할 수 있었으나, 따뜻한 피부가 맞닿는 느낌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16549570851124.jpg‘미쳤나 봐, 왜 여기서 잠이 들어선!’

그녀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감히 주군의 침대에서 곯아떨어지다니,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심지어 리처드가 들어올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한 그녀였다. 수십 년의 인생 동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제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아니면 요즘 경계를 서느라 잠을 잘 못 자서? 그러나 그렇다기엔 그보다 더 피곤했던 날도 많았고, 며칠씩 잠을 못 잔 날도 흔했다. 사흘 만에 겨우 잠들었던 때에도 업무 수행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났던 그녀다.

16549570851124.jpg‘어릴 때 이후로 다른 사람과 같이 잔 것도 처음이네.’

그게 숙면에 도움이 된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 발레리안과 함께 잘 때도 유독 더 잘 잤던 것 같다. 그의 손을 잡고 눈을 감으면 그렇게 잠이 솔솔 오곤 했다. 로제타가 제 숙면의 원인을 분석하며, 슬며시 시선을 올려 아르문트를 훔쳐보았다. 하필이면 아르문트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던 탓에 또다시 눈길이 마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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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악! 로제타가 속으로 신음하며 냉큼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내내 이 침대 위에서 그와 몸을 맞대고 있었는데도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구는 그와 껴안는 것과, 그녀가 아는 전하와 껴안는 것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었다. 미칠 것 같은 건 아르문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는 더 심했다. 광증 상태일 때의 기억이 없는 그는 그녀와 이렇게 침대 위에서 몸을 겹치는 상황이 몹시 경악스러웠다. 저번에도 그랬듯, 그녀와 닿는 것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 좋았다. 그녀의 잠옷이 얇은 탓에 피부의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제 것과는 달리 보들보들한 살결이 퍽 만족스러웠다. 더 만지고 싶을 만큼. 낯설지 않은 향기가 아늑하게 이불 안을 떠돌았다. 은은한 꽃내음 같으면서도, 잔향은 달콤한 것. 그녀에게 처음 동했을 때 맡았던 바로 그것, 로제타의 체향이었다.

165495708511.jpg‘미치겠군.’

리처드의 보고 따윈 더 들리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욕망만이 끓어올랐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은 금방이었다. 호위기사가 있는 곳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그야말로 실성한 놈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실성한 놈은 바로 자신이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제 멋대로 변해갔다. 아르문트는 이제야 인정하기로 했다. 끝끝내 부정하려 했으나,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말이다.

165495708511.jpg‘나는 이 이상한 하녀에게…… 로제타에게 욕정하고 있다. 그것도 수차례나.’

시인하건대, 그녀의 사소한 행동이나 목소리 따위에 반응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처음 동했던 그 날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생각이 떠올라 그를 괴롭게 했다. 정말이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저 제 몸의 이상 현상을 인정하려는 것뿐이다. 마치 광증을 인정했듯이. 아르문트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최대한 재미없는 생각을 하고자 애썼다. 지루한 관리들, 욕심부리는 귀족들, 그리고 그레이한. 그레이한의 역겨운 낯짝을 떠올리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가 도움이 되는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래가 겨우 진정되려는 순간, 로제타가 다리가 저렸는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필연적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에게 스쳤다. 로제타에겐 별 것 아닌 접촉이었으나 아르문트에게는 불 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165495708511.jpg“큭……!”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제 허리를 뒤로 물렸다. 타이밍 좋게 움직인 덕에 로제타의 몸에 제 것이 닿지 않을 수 있었다.

16549570851092.jpg“전하? 방금 신음을…….”

열심히 보고를 올리던 리처드가 눈치 없이 물었다. 아르문트는 이를 꽉 깨물고는 겨우 대답했다.

165495708511.jpg“몸이, 아프다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쓸데없는 말로 날 괴롭힐 작정이지? 필요 없는 정보는 적당히 알아서 걸러야 할 것 아닌가!”

화살이 리처드에게로 돌아갔다. 걱정해주다 혼만 난 리처드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본래 최대한 자세히 보고하라 명한 것은 아르문트였으나, 그에겐 감히 이를 언급하며 툴툴거릴 용기가 없었다.

16549570851092.jpg“예, 시정하겠습니다.”

165495708511.jpg“당장 나가.”

16549570851092.jpg“예, 전하. 푹 쉬십시오.”

리처드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아르문트와 로제타가 이불을 반쯤 치워냈다.

16549570851124.jpg“왜 불쌍한 리처드 경 탓을 하고 그러세요?”

리처드의 모습에서 제 과거를 본 로제타가 동병상련의 기분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사나운 시선이 제게 닿자 냉큼 고개를 숙였다. 찔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165495708511.jpg“너……!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16549570851124.jpg“죄송해요, 전하. 그게…….”

로제타가 더 혼나기 전에 빠르게 상황 설명을 했다. 밤새 그의 광증에 맞서다, 결국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고 말이다. 물론 사실 그대로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165495708511.jpg“그게…… 정말인가?”

아르문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로제타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165495708511.jpg“정말,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16549570851124.jpg“네, 그렇다니까요!”

로제타는 ‘조련’ 대신 ‘통제’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아무리 그가 증상을 보이는 자신을 그것이라 칭하며 편하게 말하라고 했다 해도, 고양이니 조련이니 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16549570851124.jpg“제가 손을 잡고, 이러면 안 된다고 계속 설득했더니 정말 조금씩 얌전해졌어요!”

정확히 말하면 손목을 붙잡아 제압한 후, 억지로 안 된다는 개념을 세뇌한 것이었다. 다만 이 또한 굳이 다 설명할 이유는 없으리라. 그녀가 말을 예쁘게 고른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아르문트의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다른 사람 앞에서 이성을 잃고 미친 짓을 할까, 소중한 이를 폭행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그러나 마침내 길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아주 좁은 길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막다른 곳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도 좋았다. 돌연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어제와는 달리 손길이 무척 부드러웠다.

165495708511.jpg“……다, 네 덕이야. 고맙다, 로제타.”

일순 코끝이 찡해졌다. 고작 감사 인사 하나로 로제타는 제 회귀가 가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저런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고생할 이유가 충분했다. 시간을 돌아오지 않았다면,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일 테니까. 그녀는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49570851124.jpg“헤헤, 뭘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걸요.”

165495708511.jpg“그래도, 그것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로제타가 몸을 움찔거렸다. 어젯밤, 도무지 식지 않는 그의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16549570851124.jpg“흠흠, 네. 그…… 강하시더라고요.”

정력이. 로제타가 말을 삼켰다.

165495708511.jpg“알고 있다. 꽤 셌을 테지.”

힘이. 아르문트는 설마 자신이 그녀를 그런 의미로 덮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며 말을 줄였다.

16549570851124.jpg‘본인의 정력에 자신이 있는 편이구나.’

로제타가 이렇게 오해했다. 하긴 그 정도 크기라면 자신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굳이 이 주제로 더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말을 돌렸다.

16549570851124.jpg“있잖아요, 전하. 오늘치 소원 말해도 될까요?”

165495708511.jpg“무엇이든, 얼마든지.”

아르문트가 한결 유해진 태도로 말했다. 자신감을 얻은 로제타가 그의 기분이 달라지기 전에 서둘러 목소리를 높였다.

16549570851124.jpg“전하랑 같이 도서관에 가고 싶어요!”

165495708511.jpg“도서관? 오늘은 따로 일정이 없긴 하지만…… 갑자기?”

16549570851124.jpg“네!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요.”

165495708511.jpg“책을 읽으려는 거면 혼자 가도 될 텐데. 내 출입증을 빌려주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한 아르문트가 금세 발을 뺐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 찾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49570851124.jpg“아뇨, 전하랑 같이 가야 의미가 있는 걸요.”

그래야 책도 읽으면서 널 지키지! 그녀가 해사한 얼굴 아래 본심을 감췄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또다시 착각을 이어나갔다.

165495708511.jpg‘죽기 전에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건가.’

그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 데이트라.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장소였으나, 그녀를 위해서라면 못 해줄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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