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도서관 책상 아래2021.07.01.
“……그래. 아침만 먹고 바로 출발하지.”
아르문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좀 편하게 호위할 수 있겠다! 로제타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감사해요, 전하! 아침은 오늘도 방에서 드실 거죠? 얼른 가져다드릴게요!”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주방으로 뛰어가 아침을 가져올 기세였다.
“설마 그 꼴로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
“네…… 차림새 말이다.”
아르문트가 차마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제타는 그제야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하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너무 급한 나머지 잠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뛰어온 것이었다. 현재 입고 있는 잠옷은 가진 옷이 없는 그녀를 위해 엘리아가 선물한 것으로, 로제타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디자인의 옷이었다. 레이스가 여기저기 달린 것도 모자라 천이 워낙 얇아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났다. 외간 남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아버지인 메이필드 남작이 알았더라면 노발대발했을 일이다. 귀족 여인으로서 정절을 지켜야 한다며 목청을 돋우었으리라. 다만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평소의 로제타라면 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발레리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도 많거니와, 그녀는 스스로를 귀족 여인이 아닌 한 명의 기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호위 중 제 몸이 조금 드러났다 한들 부끄러울 필요는 없다. 그래, 분명 그러할 텐데……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어, 얼른 갈아입고 올게요.”
로제타가 뜨듯하게 달아오른 볼을 감추며 서둘러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이불 안에서 껴안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어젯밤 그와 이리저리 뒹굴었던 탓인지. 괜히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호위를 위한 일이었으니 부끄러울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르문트 또한 민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로제타의 뒷모습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곳만 쳐다보기 바빴다. 로제타가 방을 떠난 이후에도 하얀 레이스 사이로 드러난 살결이 자꾸만 눈앞에 가물거렸다. 이불 아래에서 마주했던 그녀의 눈동자도 계속해서 떠올랐다.
“하아…….”
아르문트는 아래가 또다시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스스로를 고자라고만 생각했거늘. 지금의 자신은 그저 욕정에 미친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모아뒀던 욕망이 로제타를 만나며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변태 취급을 받고 말 거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로제타에게 제 상태를 들킨 적이 없으나,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이미 여러 차례 그녀의 몸에 제 것을 가져다 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이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물 아래에서 자신의 욕망이 사그라들기를 간절히 바라며.
*** 식사를 가져다주며 다시 만난 둘은 아침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제타는 언제 볼을 붉혔냐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아르문트 또한 목욕이 제법 효과적이었는지 나른하게 앉아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태연한 얼굴 속에는 말 못 할 고민거리가 숨겨져 있었다. 곧 있을 도서관 데이트에 대한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서관 데이트라. ……뭘 해야 하는 거지?’
아르문트는 오늘의 외출을 데이트라고 확신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음식을 다 먹고, 도서관으로 출발할 때까지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생 데이트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제 자의와 관련 없이 귀족 영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야 종종 있었으나, 그걸 데이트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즉, 이는 아르문트가 가장 처음으로 데이트라 정의한 외출이었다. 저번에 호수로 간 것을 데이트라 친다면 두 번째라 할 수 있겠다.
‘손 정도는 잡아줘야 하나? 아니, 괜한 희망을 주진 말아야지.’
로제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떠날 몸.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리라. 아르문트가 데이트는 성공적으로 마치되 결코 여지를 주지는 않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정작 데이트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적도 없는 로제타는 한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전하, 도서관은 자주 가보셨어요?”
“예전에는.”
아르문트가 제 뒤쪽에 서 있는 로제타를 발견하고 걷는 속도를 줄였다. 어렸을 때야 도서관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그레이한의 괴롭힘과 주변의 감시가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끊었다. 요즘에는 시종을 시켜 책을 빌려오거나, 유모인 베티가 선물한 책들을 읽고는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가는 것도 싫거니와, 그레이한에게 괴롭힘 당한 기억이 떠올라 불쾌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서관 데이트라는 행위에 집중한 나머지 불쾌할 겨를이 없었다. 아르문트는 로제타에게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데이트를 안 해본 것을 티 내기도 싫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제게 들러붙는 여자들을 그렇게 칼같이 쳐냈으면서, 이제 와서 경험이 없는 것이 민망하다니.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옷이 없다고 했었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데이트에도 저런 옷밖에 입을 수 없는 사정이 다시금 신경 쓰였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며 옷 따위에 미련을 두지 않는 태도도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그녀는 계속 그의 한걸음 뒤에 서 있었다. 감히 황태자의 옆에 설 수 없기 때문이리라. 당연한 태도이건만 그것 또한 영 못마땅했다. 이래선 전혀 데이트 같지가 않지 않나. 아르문트는 눈썹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옆으로 와. 뒤에 서 있지 말고.”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을 감싸 당겼다. 느닷없는 명령에 로제타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왜 이래?’
그녀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용인들이 멀리서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아르문트의 정부쯤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로제타는 이제 오해받지 않기를 포기했다. 그래, 차라리 정부라는 소문이 나면 그와 더 자주 붙어 다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합리화했다. 늘 앞서가기 바쁘던 아르문트가 왜 갑자기 보폭을 맞춰주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그저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좀 더 열었다는 표현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겨우 도서관에 도착했다. 본궁에 있는 황실 도서관은 라그나르 제국의 명성답게 화려한 내부를 자랑했다. 높은 천정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책장의 사이사이에는 고급스러운 조각품이 놓여 있었다. 무척 넓은 데다가 황금으로 장식된 기둥이 곳곳에 있어 몸을 숨기기도 좋아 보였다.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혹 누군가 숨어 있을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워낙 시간이 일러 도서관 안에는 관리인과 그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저, 그럼 책을 골라올게요.”
로제타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곤 그의 귀에 소곤거렸다. 아르문트는 갑자기 그녀가 가까워지자 몸을 움찔거리다, 이내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얻은 로제타는 곧장 몸을 돌려 책을 찾으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그의 손이 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읽고 싶은 게 뭔가.”
아르문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황태자인 그가 도서관에서 굳이 목소리를 낮출 필요는 없으나, 로제타의 행동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내가 안내해주지. 어지간한 위치는 꿰고 있거든.”
“네? 제가 찾아도 괜찮은데…….”
“됐으니 말해.”
아르문트는 훌륭한 데이트 방법은 몰라도, 상대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쌀쌀맞은 말투는 차마 고치기 어려웠으나, 나름의 친절을 베푸는 그였다. 익숙지 않은 다정함에 로제타가 쑥스럽다는 듯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 고양이 교육에 관한 책을 좀.”
“고양이를 기르나?”
“음, 예전에 친구랑 같이 길렀었는데. 또 길러보고 싶어서요.”
헤헤. 로제타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너를 더 잘 조련하고 싶어서, 라는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뭐, 그래.”
다행히 아르문트는 그녀가 말하는 고양이가 자신인 것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위치를 떠올리고 로제타를 안내해주었다. 덕분에 로제타는 원하던 책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사나운 고양이를 조련하는 방법> 그녀의 상황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제목이었다.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옆자리에 앉아 열심히 책을 읽어나갔다. 어찌나 열중했는지 그가 중간중간 자신을 훔쳐보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원활한 교육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적절한 보상이다. 고양이가 말을 잘 들을 때마다 간식 등을 보상을 주어 칭찬하자.] 보상이라. 로제타가 뚫어져라 책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짐승화된 아르문트가 간식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간식이 아니더라도 그가 좋아하는 것을 보상으로 주면 확실히 조련에 도움이 될 테다.
‘좋아할 만한 걸 더 찾아봐야겠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음 문장을 읽어내렸다. 곧 쓸만한 내용을 또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만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좋아하는 부위부터 만지기 시작해, 익숙해지면 범위를 넓혀가자. 만질 때마다 적절한 보상을 주는 것도 효과적이다.] 과연. 친해지는 데는 스킨십이 최고라던 친구들의 말이 고양이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로제타가 아직도 엘리아와 멜라니가 장난을 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의 혜안에 감탄했다. 정신없이 읽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로제타는 중요한 부분을 대충 다 훑어보고 나서야 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르문트의 얼굴이 묘하게 뾰로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었나?’
분명 아까 책을 골라줄 때까지만 해도 표정이 괜찮았는데. 그녀가 당황하여 눈을 껌뻑거렸다. 그와의 외출을 그저 호위하기 편리한 상황으로만 받아들인 로제타로서는 그가 삐진 이유를 도무지 추측할 수 없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로제타가 병약한 개복치가 갑자기 쓰러질까 걱정했다.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해 이유를 묻고자 슬쩍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옆을 짚었다.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손바닥 아래에 닿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것. 바로 아르문트의 손이었다.
‘으앗!’
놀란 로제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서둘러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더니, 제게서 멀어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낀 것이었다. 쿵, 쿵, 쿵. 또다시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아르문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책에만 고정되어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아르문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하였음에도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어쩐지 그의 눈동자 위에 어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어젯밤, 그녀가 한참이나 마주했던 눈빛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광증 상태가 아닌 그가 자신을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가. 로제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만을 응시하는 상황이 못내 만족스럽다는 듯이.
“이제야 내게도 관심을 주는군.”
귓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무척 매혹적이어서, 로제타는 절로 배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입만 뻐끔거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손을 잡은 건지, 아르문트의 생각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책상 아래로 손을 잡은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진 않을까,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흥. 아르문트가 그런 그녀를 보며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 먼저 손을 잡다니.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순 없는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명색이 데이트거늘, 제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고 책을 읽는 로제타가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저, 저 다른 책 좀 가지러 다녀올게요!”
로제타가 벌떡 일어나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텅 빈 손이 허전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가 답지 않게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
‘어우. 자꾸 왜 이러는 거야! 고작 손 하나 잡았다고!’
로제타가 성큼성큼 걸으며 자신을 탓했다. 아르문트의 이상행동도 이상행동이지만, 자신의 반응이 더욱 이상했다. 아무래도 광증 상태의 그에게 입맞춤을 당한 뒤로, 아니면 애칭을 불린 뒤로 심장이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제 입술을 깨물며 다급히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으앗. 죄송…….”
습관적으로 사과를 뱉으려던 그녀가 말을 멈췄다.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탓이었다. 익숙한 꽃향기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발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