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줘2021.07.04.
정말 발레리안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화려하게 치장하는 대신, 황금색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고 하얀 로브를 걸친 상태였다. 물론 트레이드 마크인 귀걸이만큼은 빼먹지 않았다.
“안녕, 로즈.”
발레리안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고개 숙여 속삭였다. 목소리 끝도 유독 거칠었고, 가까이서 보니 눈가가 거뭇한 것이 영 피곤해 보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얼굴은 또 왜 그렇고.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황실 도서관과 그의 연구실은 멀지 않기는 하나, 대마법사인 발레리안은 좀처럼 도서관에 오는 일이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책은 이미 연구실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야, 너를 만나러 왔지.”
아니나 다를까 발레리안은 오로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그가 로제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말아 올려 웃었다. 어쩐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우리 로즈, 어디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온 것도 몰랐을까.”
발레리안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톡 닿았다. 그가 어렸을 때 열을 재줄 때나 하던 행동이었다.
“얼굴도 빨갛고.”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평소처럼 아름다운 눈웃음이었으나 로제타는 그에 반응할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빨간 이유를 다시금 떠올린 탓이었다. 일순 손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아르문트와 닿았던 손이 뜨거웠다. 로제타가 또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 주군이 이런 행동을 한 게 처음이라서, 영광이라서 그런 거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합리화를 했다.
“그냥, 좀 더워서.”
이제 여름이잖아. 그에게서 얼굴을 떼어낸 로제타가 태연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 더운 척 손부채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레리안한테 괜한 소리를 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거짓말은 필수였다.
“저것과 관련 있는 건 아니고?”
발레리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한쪽 어깨가 무언가를 가리키듯 작게 오르내렸다. 저것? 로제타가 그의 어깨가 가리키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헉 소리를 내며 기겁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르문트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따라올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기척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게 실수였다. 다행히 아직 발레리안과 함께 있는 로제타를 보지는 못한 것 같았으나, 이대로라면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발레리!”
“왜?”
로제타가 급하게 목소리를 낮춰 발레리안을 불렀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으로 보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쩜 서른둘의 발레리안이나, 지금의 발레리안이나 이렇게 한결같이 뻔뻔할 수가. 로제타가 그의 여우 같은 미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있었다면 엉덩이라도 한 대 때려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한시가 바빴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도와줘, 발레리.”
아마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오빠’일 테다. 어렸을 적 헤어진 동생이 그리워서인지, 그는 아주 예전부터 로제타에게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곤 했다. 그러나 어린 로제타는 본 적도 없는 그의 여동생에 대한 질투로 어지간해선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자신을 여동생 대체재로 여기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늘 그를 제 오라비처럼 여겼으나, 계속 부르지 않다 보니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게 영 어색했다. 게다가 지금의 발레리안은 수 번을 회귀한 로제타의 눈에는 어리게만 보였다.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르문트가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우리 로즈가 원한다면야. 오라비로서 도와줘야지.”
일촉즉발의 순간, 발리레안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그가 하려는 행동을 눈치챈 로제타는 빠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어깨 위에 걸쳐진 로브가 커다랗게 펄럭거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로제타?”
마침 코너를 돈 아르문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이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거늘, 로제타가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곳이기에 더욱 이상했다.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여기가 아니었나?’
아르문트가 눈썹을 휘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장미를 닮은 그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정작, 로제타는 그의 한 발짝 거리에 있었음에도 말이다. 하얀 로브 속, 로제타는 발레리안의 품에 폭 껴안긴 채 긴장한 눈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박동 소리가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피부가 맞닿아 있는 탓에 로제타 자신의 것인지, 발레리안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발레리안은 제 품 속에 있는 그녀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한두 번 껴안은 사이도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로제타의 얼굴 위로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 여인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만 같았다. 회귀하기 전 그녀가 서른이었든, 마흔이었든, 분명 제게는 그저 귀여운 여동생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많은 것이 달리 보였다.
‘로즈의 속눈썹이 이렇게 길었던가? 눈은 또 저렇게 푸르렀고?’
발레리안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예쁘다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그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이번에는 아르문트에게 시선을 두었다. 로제타를 찾고 있는 잘생긴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그와 동시에 방금 그가 보았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책상 아래로 손을 맞잡고 있던 둘. 사랑스러운 홍조가 떠오른 로제타의 얼굴과, 그런 그녀를 진득하게 응시하던 아르문트. 둘 다 미남미녀여서 그런지, 제법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로제타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르문트를 보는 데 정신이 팔린 로제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물이면 슬슬 연애할 나이긴 하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연애는 물론,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서 그런 장면을 목격하자,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고작 저런 놈에게 로제타를 줄 수는 없다. 그가 어금니를 깨물며 생각했다. 황제 다음가는 지위에 얼굴까지 빼어난 아르문트였으나, 발레리안에게는 부족하게만 보였다. 적어도 자신만큼 잘생기고, 로제타에게 잘 해주며, 돈도 많고 능력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아니라면 제 동생을 데려가게 둘 순 없다. 그러나 발레리안 또한 그런 남자가 자신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나마 아르문트가 나은 편이라는 사실 또한, 못마땅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레리안은 제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애써 눌러 참았다. 그러곤 손을 들어 올려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입을 꾹 다물고 잔뜩 경계 중인 그녀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어지간한 소리는 안 들릴 거야. 방음 효과도 있어서.”
“쉬잇!”
발레리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자 로제타는 재빨리 그의 입을 가렸다. 방음 효과가 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아르문트가 제법 눈치가 빠른 탓에 잘못하면 들킬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보이지 않자 걸음을 옮겨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찾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휴. 그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제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발레리 너-!”
“자, 이거 받아.”
로제타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며 짜증을 내려는 찰나, 이를 예상한 발레리안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케이스 하나를 건네주었다. 붉은 바탕에 황금으로 장식된 상자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리라는 사실을 포장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한번 노려보더니,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상자 안에는 남자들이 셔츠 소매에 달곤 하는 장식 단추, 커프 링크스가 들어 있었다. 세밀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거로 보아 척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이유는 고작 다이아몬드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저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쯤이야 그녀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물론 지금 봉급으로는 좀 무리겠지만. 커프 링크스에서 발레리안의 마나가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의 마나에 익숙한 로제타 또한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잘 숨겨진 기운이었고, 그 농도가 몹시 깊었다. 즉, 이것이 마법 물품이라는 뜻이었다.
“황태자에게 줘.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네가 바로 그의 근처로 이동할 수 있게 마법을 걸어놨어.”
“우와! 이런 걸 어떻게……!”
“네가 호위 임무 때문에 날 만나러 올 시간도 없는 것 같길래. 무리 좀 했지.”
로제타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해 보이나 했더니, 마법 물품을 만드느라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방금의 짜증은 모두 잊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있다면 아르문트를 호위하는 게 한결 쉬워질 테다. 따로 쉴 시간도 생길 것이고 말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발레리안이 저런 마법 물품을 만들어준 건 아무리 빨라도 그녀가 스물둘일 때 이후였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저렇게 빨라진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편, 로제타의 눈동자에 깃든 기쁨을 발견한 발레리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고, 연락도 않던 다른 대마법사 영감에게 도움까지 구한 보람이 있었다. 그가 갑작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어 보였다.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아까 아르문트에게 붙잡혔던 바로 그 손이었다.
“푸핫. 이거 말고.”
물론 너와 손잡는 게 아주 좋기는 한데. 발레리안이 크게 웃으며 덧붙였다. 고작 손을 잡았을 뿐인데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편한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럼 뭐?”
“하사받은 검, 어딨어? 저 커프 링크스에 건 마법이랑 연결해놓으려고. ……설마 아직도 먼지떨이로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하.”
로제타가 어색하게 웃자 발레리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그녀가 결국 시인했다.
“응, 아직 먼지떨이야…….”
“……이제 반지나 목걸이로 바꾸는 게 어때.”
“알았어. 반지는 청소할 때 불편할 것 같아서…….”
그녀가 침울하게 제 다리에 매여 있던 먼지떨이를 잡아 들었다. 안녕, 먼지떨이야. 지금까지 고마웠어. 마음속으로 인사도 건넸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 속에 담긴 기운을 천천히 움직였다. 먼지떨이가 서서히 변모하더니 이내 얇은 목걸이로 바뀌었다. 커프 링크스와 매우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였다. 딱히 생각나는 디자인이 없어 눈앞의 것을 참고한 모양이었다. 발레리안은 그녀가 제 말에 순순히 따랐음에도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꼭 커플 액세서리 같잖아.’
그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머리로는 아르문트가 그나마 괜찮은 신랑감임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발레리안은 괜히 트집을 잡았다.
“하녀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괜한 의심을 살걸. 다른 사람 걸 훔쳤다고 말이야. 다른 디자인으로 바꾸지그래.”
내 귀걸이처럼 만들던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로제타는 일리가 있다며 다시금 목걸이를 붙잡고 집중했다. 발레리안의 기대와는 달리 모양은 같으나 보석의 광택이 사라진 목걸이가 탄생했다. 귀찮은 마음에 광택만 없앤 것이었다.
“이러면 누가 봐도 가짜 같겠지?”
그녀가 헤헤 웃으며 물었다. 발레리안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참, 발레리. 혹시 저주에 대해서도 좀 알아?”
“대충만. 알다시피, 정화마법은 영 젬병이어서.”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곤 눈을 감고 목걸이에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커프 링크스에 들어간 마법에 비교해 무척 간단한 것이어서 몇 초면 끝이 났다.
“음, 일단 지금은 다시 전하께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좀 그렇고, 나중에 만나러 와야겠다. 그때 이것저것 좀 물어볼게.”
발레리안이 아무리 정화마법과 저주에 대해 모를지언정 자신보다야 많이 알 것이 분명했다. 지금 당장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슬슬 아르문트를 찾으러 가야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로제타가 슬며시 발레리안의 로브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또 만나.”
그녀는 그에게 손을 몇 번 흔들어준 후,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얼른 아르문트에게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로즈.”
그러나 다시 코너를 돌려는 순간, 발레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다시금 풍겨왔다. 딱딱한 감촉이 등에 닿았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은 것이었다.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