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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넌 나를 좋아하잖아 (38/145)

38화. 넌 나를 좋아하잖아2021.07.11.

16549571596199.jpg“……뭐?”

아르문트가 되물었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로제타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정작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16549571596204.jpg“같이 쇼핑가는 친구가 남자라고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르문트가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 나와의 데이트 중에 다른 사내와 수다를 떨었다고 말하는 건가? 게다가 그 자식과 휴일에도 데이트할 예정이고? 하.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질간질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가 최선을 다해 무덤덤한 얼굴을 가장했다. 제 불쾌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것은 자신이 친히 해주는 데이트다. 매달리는 쪽은 자신이 아닌 로제타고 말이다. 그런 이상 저런 이야기에 신경 쓰는 것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혹시나 그녀가 이를 질투 따위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16549571596199.jpg‘질투라니.’

이토록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따로 없었다. 그런 우스운 짓거리를 하느니 차라리 세숫물에 얼굴을 박고 죽겠다. 아르문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49571596199.jpg“남자인 친구와 함께 쇼핑이라니, 특이하군.”

그가 다시 황태자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이는 느긋한 것에 반해 그 속은 썩 여유롭지 않았다. 여자가 쇼핑하는 데까지 따라붙다니, 웃기는 자식이 따로 없군. 할 짓도 어지간히 없는 모양이지. 그가 콧방귀를 뀌며 생각했다. 로제타는 그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71596204.jpg“그런가요? 소꿉친구라, 워낙 많은 걸 같이 해서 전 어색한 줄도 모르겠어요. 게다가 그 친구가 감각이 아주 좋아서, 웬만한 여자보다 옷을 더 잘 골라줄 것 같기도 하고요.”

16549571596199.jpg“……직접, 골라준다고?”

16549571596204.jpg“네? 네. 저는 그런 감각이 부족해서요. 아마 친구가 하나하나 골라줄 것 같아요.”

그녀가 아는 발레리안이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벼르고 있었다는 듯 온갖 드레스를 입혀보고 액세서리까지 걸쳐줄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불쾌한 감정을 티 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눈썹과 입매로 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그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르문트가 눈살을 한껏 찌푸리며 생각했다.

16549571596199.jpg‘드레스룸까지 들어오게 하는 사이라는 건가.’

귀족 영애들에게 드레스룸은 무척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미혼 여성의 드레스룸에 출입할 수 있는 남자는 약혼자나, 아주 오래 만난 연인뿐이었다. 소꿉친구라고 한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옷을 선물하는 것을 넘어, 직접 골라주기까지 하는 남자라니. 그게 연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다기엔 로제타의 태도가 너무 태연했다. 정말 그놈을 친구로 여기는 느낌이었다.

16549571596199.jpg‘과연 그놈도 그렇게 생각할까.’

어쩌면, 이번 휴일을 계기로 관계가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로제타가 남자와 하하 호호 웃으며 걷는 모습을 상상한 그가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가슴속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불덩이가 활활 타올랐다. 그 열기가 목구멍을 덥히자 아르문트는 마치 살길을 찾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49571596199.jpg“취소해.”

16549571596204.jpg“……네?”

16549571596199.jpg“취소하라고. 의상실은 내가 내일 데려가 줄 테니.”

그게 무슨……? 로제타가 눈을 껌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르문트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한 표정을 하고선 그녀에게 재차 명령했다.

16549571596199.jpg“내가 친히 옷을 골라주겠다는 말이다.”

16549571596204.jpg“그, 갑자기 왜…….”

16549571596199.jpg“말했지 않나. 뭐든 갚아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미라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눈매가 금세 살벌해졌다.

16549571596199.jpg“왜. 설마 내 감각이 네 친구의 것보다 부족해 보이나?”

16549571596204.jpg“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로제타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또 저렇게 꼬아서 듣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패션 감각이야 발레리안 쪽이 좀 더 낫기는 했다. 아르문트는 그리 대담한 시도를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얼굴이 워낙 잘난 덕에 무엇을 입어도 태가 났다. 때가 덕지덕지 앉은 누더기를 걸쳐도 아마 눈부시게 소화해내리라.

16549571596199.jpg“그럼 됐군. 내일 오후에 나가지.”

아르문트가 팔짱을 끼고선 선언했다. 이의 제기는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로제타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짧게 절망했다. 그가 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 호위가 귀찮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16549571596204.jpg‘예전 생에선 잘 나가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래?’

이전 생의 아르문트는 어지간해서는 황궁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늘 바깥을 향했다. 꼭 감옥에 갇혀 바깥세상을 염원하는 죄수처럼 말이다. 한 번은 그녀에게 마을에서 열리는 야시장이나, 축제 따위에 대해 물어본 적도 있었다. 로제타는 잠행을 나가 보시겠냐며 제안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암살당할 확률을 높이고 싶지는 않다며.

16549571596199.jpg“……싫은가?”

아르문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선이 마주하자 문득 그때의 그 가냘픈 눈빛이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16549571596204.jpg‘그래, 이왕 나가게 된 것, 즐겁게 해드려야지.’

오히려 외출하는 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한 로제타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16549571596204.jpg“아뇨! 저야 당연히 좋죠. 감사해요, 전하!”

그러자 아르문트의 얼굴 위로 맴돌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예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방금 제가 한 것이 애프터 신청이라는 것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16549571596199.jpg“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넌 나를 좋아하잖아. 그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훨씬 기운이 넘쳤다. 로제타는 계속되는 그의 이상행동에 의아해하며 다시 뒤를 따랐다. 발레리안과의 약속을 어기게 돼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사실 오히려 그의 돈을 절약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일 테다.

16549571596204.jpg‘휴일에는 쇼핑 대신 발레리 집에서 같이 쉬면서 얘기나 나누지 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아르문트가 들었더라면 충격을 금치 못할 내용이었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그는 상기된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바빴다. 최대한 좋은 의상실을 예약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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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날 오후. 로제타는 오랜만에 메이드복이 아닌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셔츠에 검은색의 단정한 치마. 가장 처음 아르문트에게 인사를 올리러 갈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가져온 옷이 몇 벌 되지 않기에 선택권 자체가 없었다. 의상실을 가면서 바지를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16549571596204.jpg‘한 시간이나 일찍 나왔네.’

시간을 확인한 로제타가 흠,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치장할 이유도, 그럴만한 물건도 없기에 준비는 무척 빨랐다. 그녀는 남은 시간 동안 일이나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엘리아와 멜라니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6549571656008.jpg“로지! 너…… 설마 그러고 나가려는 건 아니지?”

16549571656008.jpg“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로제타가 바보도 아니고! 멜라니가 덧붙였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영 자신감이 없었다. 그녀들이 봐온 로제타는 바보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제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16549571596204.jpg“맞는데. 이상해?”

저번에 하녀장 마리아도 뭐라 그러더니. 정말 이 옷이 별로인 건가? 그녀가 다시 제 옷을 살펴보았다. 셔츠도 얼룩 하나 없이 깔끔하고, 치마도 단정한데. 아무리 봐도 무엇이 문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대답에 엘리아와 멜라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곤 로제타의 손목을 박력 있게 잡아당겼다.

16549571656008.jpg“당장 이리와!”

로제타는 영문도 모르고 멜라니의 방으로 끌려갔다. 이 정도 악력이라면 멜라니도 검술을 배워도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며.

16549571656008.jpg“자, 이것부터 입어봐.”

멜라니는 어리벙벙하게 따라온 그녀에게 느닷없이 원피스를 건넸다. 로제타가 이해할 수 없어 눈만 껌뻑거리자 둘은 답답하다는 듯 입을 모아 외쳤다.

16549571656008.jpg“데이트잖아, 데이트! 조금이라도 꾸미고 나가야 할 것 아냐!”

그제야 상황파악이 좀 되는 것 같았다. 로제타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16549571596204.jpg“에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외출이라니까? 저번에 전하를 구해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16549571656008.jpg“외출이 데이트야!”

16549571656008.jpg“옷까지 사준다면 더더욱 데이트고!”

16549571596204.jpg“정말 아니라니까.”

어휴, 갑갑해! 멜라니가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아무리 말해봤자 로제타는 앵무새처럼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것 같았다. 괜한 입씨름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야 없다.

16549571656008.jpg“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입어.”

16549571596204.jpg“데이트도 아닌데 굳이 왜 치장까지…….”

16549571656008.jpg“전하와 외출하는 건데 신경은 써야지. 황실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멜라니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로제타를 설득했다. 황실 이미지 따위, 사용인인 그들이 알 바가 아니다. 그저 봉급만 받으면 그만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로제타에게는 이런 말이 먹혔다. 그녀는 멜라니가 여태껏 살아오며 만난 사람 중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귀족 영애이면서 하녀로 일하질 않나, 평민인 자신보다도 가진 옷이 없지 않나. 평민들과 조금의 허물도 없이 지내는 데다가, 쓸데없이 황실에 진심으로 충성하기까지.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점이 멜라니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16549571596204.jpg“……알았어. 이것만 입으면 되는 거지?”

짐작한 대로 로제타가 수긍했다. 역시나 황실 이미지를 들먹인 것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멜라니, 대단하다! 엘리아가 칭찬의 의미로 멜라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라니가 뿌듯하게 마주 웃었다. 그러곤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49571656008.jpg“응, 일단 그것부터 입어봐.”

여기서 ‘부터’라 함은, 앞으로 입어볼 옷이 잔뜩 남았다는 뜻이었다. 액세서리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귀족들처럼 가진 것이 많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민 중에서는 나름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멜라니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불살라서라도 로제타를 치장할 심산이었다.

16549571656008.jpg‘내가 우리 로지 어디 가서 꿀리는 꼴은 절대 못 보지.’

그녀의 눈동자 위로 강렬한 투지가 불타올랐다. 정확히 한 시간 뒤. 로제타는 멜라니와 엘리아의 승인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 지옥 같은 방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이 어찌나 길고도 힘겨웠는지 얼굴빛이 영 창백했다.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오랜만에 신어본 구두는 무척 어색했으나, 운동신경이 좋은 그녀는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걷는 내내 시선이 따라붙었다. 로제타는 자신이 메이드복 말고 다른 옷을 입어서 그러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16549571596204.jpg‘으악, 늦겠다!’

지각이라니, 성실한 기사로서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치마가 나풀거렸다. 멜라니가 빌려준 원피스가 메이드복보다 하늘하늘한 재질인 탓이었다. 엘리아가 끼워준 귀걸이도 자꾸만 귓불 아래에서 달랑거렸고, 평소와 달리 굴곡진 머리카락은 당장 묶어 올리고 싶을 정도로 성가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친구들의 정성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로제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황태자궁의 동문 옆 마구간 쪽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출발하기 위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히 시간은 늦지 않았다. 안심한 로제타가 저 멀리 서 있는 리처드를 먼저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16549571596204.jpg“리처드 경, 안녕하세요.”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던 리처드가 로제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한 순간,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1654957170952.jpg“……로제타?”

그가 거대한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16549571596204.jpg“네. 전하는 어디 계세요?”

마차 안에 있군. 로제타가 이미 아르문트의 기척을 파악했으면서 아닌 척 물었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얼른 대답해주었을 리처드가 침묵으로 응수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로제타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 고장 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16549571596204.jpg“경? 어디 아프세요?”

로제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것이 발단이 된 듯 리처드의 얼굴이 삽시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1654957170952.jpg“괘, 괜찮습니다. 그, 그게…….”

리처드가 얼빠진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16549571596199.jpg“안 타고 뭘 하나?”

그때, 마차 안에 있던 아르문트가 삐딱한 얼굴로 내려왔다. 로제타와 리처드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16549571596204.jpg“아, 전하.”

로제타가 아르문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르문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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