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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원래 이렇게 예뻤나? (39/145)

39화. 원래 이렇게 예뻤나?2021.07.15.

로제타 메이필드. 이름까지도 싱그럽기 짝이 없는 이 하녀가 객관적으로 예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쯤은, 아르문트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눈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만개한 꽃처럼 화려한 머리카락, 결점 없는 피부, 시원하게 트인 눈매와 말갛고 커다란 눈동자, 통통한 입술과 선명한 턱선까지. 어디 한 군데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다른 귀족 여인들과는 달리, 로제타는 자신을 꾸미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녀들과 비교해도 그랬다. 얼굴에는 늘 화장기가 없었고, 머리는 그저 단정히 빗어 묶어 올렸으며, 몸짓에는 조금의 교태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바보같이 굴 때만 아니라면, 옷차림새와 몸가짐이 하녀장보다도 바른 그녀였다. 걸음걸이마저도 어찌나 칼 같은지 가끔은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로제타는 달랐다. 그녀는 어깨가 살짝 드러난 디자인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늘 단정한 차림을 고수하던 그녀가 입으니 별것 아닌 노출도 요염해 보였다. 결 좋은 머리는 무슨 짓을 했는지 물결처럼 이리저리 굽어져 있었고, 입술은 탱글탱글한 앵두처럼 붉은 기가 돌았다. 기름한 속눈썹이 천천히 위아래로 나부끼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일순 햇빛을 받은 눈이 그 어느 보석보다도 빛나 보였다. 고작 옷을 바꿔입고, 조금 꾸몄을 뿐이다. 심지어 그 옷도, 액세서리도 그다지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르문트는 도무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보았던 어떤 여인보다도 그녀가 아름다웠다. 고작 ‘아름답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16549571808412.jpg‘원래 이렇게 예뻤나?’

아르문트는 홀린 것처럼 멍하니 로제타를 응시했다. 분명 처음 인사를 올리러 왔을 때는 이렇게까지 예뻐 보이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이후로 점점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대신 독을 마셔주었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호수에서 자신을 구해주었을 때? 정확한 순간은 알 수 없었다. 푸른 눈동자, 고생한 흔적이 남은 손, 아이처럼 통통한 입술…… 이런 것들이 한두 개씩 눈에 들어오더니, 언제부터인가는 그녀 자체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심장박동 소리가 천천히 귀를 울렸다. 이내 로제타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16549571808418.jpg“전하?”

왜 그러세요?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덧붙였다. 아르문트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았다.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황태자가 돼선, 여자 얼굴을 보고 정신을 빼놓다니. 그레이한이나 할법한 짓이 아닌가.

16549571808412.jpg“아니다.”

아르문트가 홱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변명하건대, 방금의 행동은 갑작스레 나오는 재채기만큼이나 불가항력이었다. 분명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으리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마차의 옆에 서 있던 리처드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 로제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아르문트가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16549571808412.jpg‘바보 같은 얼굴하고는.’

그가 리처드의 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마음 하나 모르면서 헛된 바람을 품는 제 호위기사가 못내 애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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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71808412.jpg“출발하지.”

1654957180844.jpg“아, 예!”

아르문트가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리처드는 자신에게 사나운 시선이 닿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러곤 빠르게 마차 옆에 있는 말에 올랐다. 그 또한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이 부끄러운지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16549571808412.jpg“잡아.”

아르문트가 로제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라는 뜻이었다.

16549571808418.jpg‘세상에, 내가 개복치한테 에스코트를 받다니.’

로제타가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영광스러운 마음에 손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아르문트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손 떨림을 부끄러움에 의한 것으로 오해한 까닭이었다.

16549571808412.jpg‘본격적인 데이트라 긴장한 건가.’

몹시 꾸미고 나온 차림새도 그렇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도 그렇고. 자신을 신경 쓰는 그녀가 꽤 귀여웠다. 그는 단단히 착각을 한 채로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마부의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리처드는 말을 타고 마차의 옆을 쫓아왔다. 예전의 로제타가 그랬듯이 말이다. 창문을 통해 리처드의 모습을 아련하게 보던 로제타가 다시 아르문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6549571808418.jpg“전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16549571808412.jpg“네 옷을 사러 가기로 했잖나. 라트랑제에 예약을 걸어두었다.”

아르문트가 창틀에 턱을 괴고는 나른하게 말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름에 깜짝 놀란 로제타가 입을 벌렸다.

16549571808418.jpg“라트랑제요?!”

라트랑제는 현재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의상실이었다. 난다긴다하는 고위귀족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드레스를 맞추었고, 황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몇 년 뒤에는 새롭게 등장한 의상실에 밀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가히 따라갈 자가 없었다. 옷에 관해 문외한인 로제타가 알 정도라면 오죽하겠는가.

16549571808418.jpg“전하, 그렇게 비싼 건 필요 없어요.”

로제타는 재력가가 된 이후에도 허투루 돈을 낭비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억만금을 치르고라도 샀지만, 드레스니 보석이니 하는 것에 돈을 쓰는 취미는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라트랑제는 과분했다. 좋은 물건은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바람직하니 말이다.

16549571808418.jpg“어차피 입을 일도 많이 없는걸요.”

아르문트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가 로제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71808412.jpg“입을 일이 왜 없어. 신관이 더 오래 살 수 있다며.”

16549571808418.jpg“그, 그건 그렇지만요. 어차피 전 매일 전하를 모시느라 바쁘잖아요. 메이드복만 입고 지내는데 그렇게 좋은 옷을 언제 입겠어요?”

16549571808412.jpg“일할 때 입든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로제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정부 소리를 듣는데, 그랬다간 정말 황궁 전체에 제 소문이 퍼질 테다. 그녀는 소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제 주군을 영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다시 착한 척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16549571808418.jpg“전하의 돈이 아까워서 그렇죠. 게다가 예약이 몇 개월은 밀려 있었을 텐데…….”

듣기로는 라트랑제에서 옷 한 벌 맞추려면 적어도 삼 개월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더라. 고작 드레스 하나 따위에 그런 노력을 하다니. 검에 인생을 바친 로제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6549571808412.jpg“너는 종종 내가 누군지 잊는 것 같군.”

16549571808418.jpg“네? 그럴 리가요!”

16549571808412.jpg“아니라면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진 않겠지.”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아하. 로제타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황태자의 요구라면 없는 예약 자리도 만들어주었으리라. 돈 걱정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16549571808412.jpg“그런 소리 할 시간에 저번에 말하던 얘기나 계속해봐. 아스펠 왕국에 대한 것.”

16549571808418.jpg“아, 그거요?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참, 이르케이아의 눈물에 대해 말했었죠.”

그녀는 음유시인처럼 능숙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라그나르 제국과 붙어 있는 작은 왕국인 아스펠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말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아스펠 왕국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대부분 첫 번째 생에서 그와 함께 전쟁하며 알아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스펠 왕국이 라그나르를 침략했고, 아르문트는 황제의 명을 받아 전쟁터로 떠났다. 당연히 로제타도 함께였다. 그녀가 있기에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덕분에 아스펠의 보물들과 비옥한 땅을 얻어냈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았다. 아르문트의 얼마 남지 않은 감정이 그중 하나였다. 아스펠과의 전쟁 후 그는 제 감정을 더욱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표정도 점점 무미건조해졌다. 살아는 있으나 죽은 것만 같았다.

16549571808418.jpg‘이제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로제타가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내며 다짐했다. 그의 육체를 지키는 것을 넘어, 저 미소 또한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 마차를 타고 도착한 라트랑제 의상실은 과연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이런 곳에 와본 적이 많지 않은 로제타는 히익, 소리를 내며 촌뜨기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 탓인지 입구를 지키던 남자가 다가와 그들을 경계했다.

16549571838771.jpg“누구십니까? 이곳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습니다.”

로제타의 행동을 보고선 그들이 손님이 아닐 거라고 확신하는 어투였다.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없는 아르문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가 역정을 내기 전 리처드가 빠르게 다가서서 황가의 인장을 보여주었다.

16549571838771.jpg“헉……!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16549571808412.jpg“직원 교육이 아주 개판이군. 제 나라의 황태자도 못 알아보는 눈은 왜 달고 다니는 거지?”

16549571838771.jpg“죄, 죄송합니다!”

아르문트가 망설임 없이 독설을 내뱉자 남자는 허리를 연신 굽혀대며 사과했다. 로제타는 민망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 친구들이 꾸며준다고 꾸며주긴 했는데, 아무래도 돈이 없는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귀족 여인답지 못한 태도도 한몫했을 테다.

16549571838771.jpg“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16549571808412.jpg“부디 안내는 똑바로 하길 바라지.”

남자의 안내에 따라 호화로운 복도를 걸어 들어가자 곧 의상실의 주인인 듯한 여인이 우아하게 걸어 나와 인사했다.

16549571838771.jpg“여기까지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전하. 저는 이곳 라트랑제의 주인, 리디아입니다.”

아르문트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까닥거렸다. 처음 로제타에게 그랬듯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리디아가 프로답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71838771.jpg“오늘은 어느 분의 옷을 맞추기 위해 친히 방문해주셨나요?”

16549571808412.jpg“내 하녀의 옷을 맞추러 왔다.”

그러나 하녀라는 말에 리디아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빠르게 다시 웃어 보이긴 했으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를 보지 못한 아르문트는 로제타의 등을 밀어주며 말했다.

16549571808412.jpg“로제타, 따라가 봐.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 열 벌 정도면 입을 만하겠지.”

16549571808418.jpg“열 벌이요? 너무 많아요!”

16549571808412.jpg“나는 여기 앉아 있지. 다녀와.”

아르문트가 그녀의 반박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옷을 골라주겠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조금 민망했다. 너무 연인 같은 행동이지 않은가. 로제타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리디아의 뒤를 따라갔다. 더 말해봤자 듣지도 않을 것 같으니, 얼른 고르고 끝낼 심산이었다. 그가 정말 제 옷을 골라주리라고는 그녀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16549571838771.jpg“자, 여기에요.”

리디아는 그녀를 가까운 방에 안내해주었다. 이곳에 있는 것 중 가장 작은 방이었다.

16549571838771.jpg“저, 근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16549571808418.jpg“아. 로제타 메이필드입니다.”

메이필드라. 리디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훨씬 차가워 보였다.

16549571838771.jpg“그럼, 이 중에서 고르고 계시겠어요? 저는 다른 손님을 도와드려야 해서요.”

그녀가 로제타에게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값비싼 드레스들이 잔뜩 그려진 것이었다.

16549571808418.jpg‘음. 나를 무시하고 있군.’

로제타가 태평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녀는 눈치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유독 잘 알아채곤 했다.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뻔한 레퍼토리가 바로 그녀의 출신이었다. 하녀라는 말에 이어 메이필드라는 성을 들은 후 곧바로 표정이 바뀐 것으로 보아, 아마 리디아도 그녀의 출신을 비웃고 있는 것이리라. 용감하기도 하지. 황태자와 같이 온 사람을 이렇게 대하다니. 로제타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세웠다.

16549571808418.jpg“아뇨, 잠깐만요.”

리디아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려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지방 귀족 따위는 당연히 고분고분 굴 것이라 예상했는지 두 눈 위로 짜증이 역력했다. 로제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16549571808418.jpg“이거, 이거, 그리고 이 푸른색. 이렇게 세 개 가져다주세요.”

그녀가 카탈로그에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드레스를 세 개 골랐다. 발레리안이 추천하던 종류의 것들이니 아마 지금 유행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르문트는 열 벌을 얘기했으나 당연히 그만큼을 살 생각은 없었다.

16549571838771.jpg“……너무 빨리 결정하시는 것 아닌가요? 시간을 두고 보셔도 괜찮은데요.”

16549571808418.jpg“아니요, 귀찮아서요. 그냥 말한 대로 가져다주세요.”

로제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버릇처럼 걸치던 미소도 얼굴에서 지웠다. 굳이 저런 상대에게까지 착한 연기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리디아는 부아가 치민 듯 이를 악물었다. 가느다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16549571838771.jpg“네, 가져다드리죠.”

그녀가 거칠게 커튼을 치곤 나갔다. 저 성질머리로 어떻게 장사를 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16549571808418.jpg‘그래서 나중에는 망했구나.’

로제타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뭘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직원이 로제타가 말한 드레스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오, 로제타는 짧게 감탄했다. 그래도 괜히 유명한 곳이 아닌지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다만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기는 했다. 이 시기에는 드레스의 볼륨을 크게 하는 것이 유행이기 때문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다른 의상실을 필두로 자연스러운 라인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16549571838771.jpg“어떤 것부터 입어보시겠어요?”

16549571808418.jpg“음…… 저거, 푸른색으로요.”

그나마 저게 좀 낫네. 로제타가 드레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드레스에 손가락이 닿으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커튼이 홱 젖혀졌다. 그러곤 불쑥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느닷없이 들어온 사람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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