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제발 네 걱정을 해2021.07.18.
“실례할게요.”
리디아가 생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러더니 로제타가 잡으려던 푸른색 드레스를 홱 잡아당겼다.
“죄송하지만 이건 착용이 어려울 것 같아요. 다른 손님이 먼저 요청하셨던 건데, 직원이 실수한 것 같네요.”
그녀가 뻔뻔스럽게 웃으며 드레스의 치마 아래 손을 넣고 들어 올렸다. 다시 가져가려는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가만히 그 모습을 응시했다. 검을 수련하기 바빠 레이디의 예법에는 썩 밝지 못한 그녀였으나, 리디아의 행동이 무척 무례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커튼을 열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미 가져왔던 물건을 빼간다니. 시장 바닥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다른 손님을 운운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먼저 요청했다면 카탈로그에서 드레스를 골랐을 때 리디아가 미리 말을 해줬어야 했다. 한 번에 손님을 많이 받지도 않는 곳이니 까먹었을 리도 없다. 그러면서 다른 직원 탓을 하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로제타는 슬쩍 시선을 돌려 드레스를 가져다준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실수한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즉, 이는 리디아가 앙심을 품고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 잘못 없는 직원까지 팔아가면서 말이다.
‘기 싸움을 해보자는 건가.’
로제타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휘어졌다. 너무 가소로워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아는 싸움이란 치명상을 입히고 목숨을 끊어놓는 것이었지, 이렇게 말로 티격태격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걸려온 싸움을 넘길 순 없는 노릇. 로제타는 이에 적당히 임해주기로 마음먹으며 입을 열었다.
“라트랑제에서는 본인의 실수를 다른 사람이 책임지게 하는 일이 흔한가 봐요?”
드레스를 들고 나가려던 리디아가 우뚝 멈춰섰다.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럼 그렇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열심히 드레스 옮기랴, 주인 성질 맞춰주랴. 여기 직원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요.”
안타까워라. 로제타가 연민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리디아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주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영애,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해 기분 나쁜 심정은 이해하지만 무례한 말은 삼가세요. 말씀드렸듯이, 다른 고귀한 분이 먼저 요청하신 드레스여서요.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귀족답게 차례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만 들으면 꼭 로제타가 남의 것을 달라고 패악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고귀한’과 ‘귀족답게’ 따위를 언급하며 은근슬쩍 신분을 깎아내리는 것까지 완벽했다. 과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듯했다.
‘라트랑제는 모든 귀족 여인들이 선망하는 곳. 출신도 불명확한 정부 따위를 받아줄 순 없지.’
그랬다간 급이 떨어질 테니까. 리디아는 이렇게 생각하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제 로제타가 길길이 날뛰리라고 예상했다. 다른 귀족들의 정부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황태자가 화를 낼 수야 있겠지만, 제 입맛에 맞게 상황을 설명하면 창피한 마음에 별다른 불이익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라트랑제는 이미 든든한 뒷배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로제타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네, 그러지요. 드레스는 누가 입든 별로 상관없어요. 그다지 제 취향도 아니고.”
로제타는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존심을 정확히 찌르는 내용에 리디아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다만 제 허락도 받지 않고 커튼을 열고 들어온 점과, 의상실의 명백한 실수에도 양해를 구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그쪽이 제대로 사과해야 하지 않나요? ‘귀족답게’ 말이에요. 잘못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면 안 된다는 건 출신이 그리 대단치 않은 저도 아는 상식인데.”
로제타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리디아를 내려다봤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살포시 미소 짓는 얼굴이 퍽 고고했다. 리디아는 주먹을 꽉 쥐고 그녀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고작 하녀 주제에……! 단단히 깨문 잇새로 씨근덕거리는 숨결이 흘러나왔다. 감히 제 드레스를 모욕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인정하는 대신 목소리를 높여 제 무고를 주장했다.
“저는 허락을 구했어요. 영애가 못 들은 거겠죠. 얼른 새 드레스를 가져다드리고 싶은 마음에 사과가 좀 늦어졌는데, 고작 그걸로 이렇게 화를 내시니 당황스럽네요!”
“어머, 제가 화를 내다뇨. 우아하지 못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하! 지금 어딜……!”
로제타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조롱하자 리디아는 결국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로제타는 말을 이을 기회도 주지 않고 대화를 끝냈다.
“귀족답다 주장하시는 것과는 달리, 앞으로도 그 입에서 제대로 된 사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네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시간 낭비하는 건 질색이라.”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게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아르문트와의 외출 중에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야 없다. 로제타가 미련없는 얼굴로 일어서서 커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뒤에서 리디아가 ‘앞으로 내 옷 입을 생각 따위 하지 말라’며 외쳐대었으나 굳이 관심을 주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가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맞은편 방의 커튼이 촤르륵 걷어졌다. 그리고 예쁘장한 외모의 귀족 여인이 등장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다.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여인의 모습에 로제타가 직감했다. 곱슬기가 있는 화려한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은 어쩐지 리디아와 무척 닮아 있었다. 그제야 어렴풋이 이름이 떠올랐다. 애슐리 버틀러. 버틀러 백작가의 차녀. 한때 발레리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인 중 한 명이었으며, 라트랑제의 주인과는 사촌지간이었다. 로제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녀를 무시하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거기 서.”
하아. 로제타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멈춰섰다. 옷 하나 사러 나왔는데 이게 무슨 난장판이란 말인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애슐리를 마주 보았다. 애슐리는 오만한 얼굴로 부채를 살랑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듣자 하니 네가 내 드레스를 탐낸 모양인데…….”
그게 또 네 옷이었니.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쿡. 부채 끝이 로제타의 뺨을 가볍게 건드렸다.
“주제를 알아야지. 응?”
뒤에 서 있던 리디아는 그녀의 지나친 행동에 조마조마한 듯 눈치를 보면서도, 로제타가 당하는 꼴이 보기 좋은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에 힘을 얻은 애슐리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황실에서 열리는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란다. 하녀 따위가 바닥을 쓸 때 입을 옷이 아니라.”
로제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채에 맞은 뺨은 아프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못된 말을 지껄이는 저 입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치솟아 올라 곤란했다. 괜히 여기서 사고를 칠 순 없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애써 중얼거렸다. 그러나 애슐리의 말이 이어진 순간 그녀의 참을성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분수에 맞게 살아. 네 싸구려 인생에는 그 초라한 차림이 더 어울려.”
돌연 신이 나서 자신을 치장해주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거라고 말하며 아낌없이 나누어주던 목소리도 머릿속을 울렸다.
‘못 참겠네.’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로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순진무구한 하녀의 것에서, 전장을 휩쓸던 기사의 것으로. 그녀가 무심하게 손을 뻗었다. 민간인을 상대로 폭력을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애슐리에게 닿으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분수를 모르는 건 그쪽인 것 같다만.”
헉……!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슐리인지, 리디아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를 일이었다. 로제타의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싸구려 인생이라.”
아르문트가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벼린 검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로제타는 저것의 이름을 알았다. 살기였다. 일국의 황태자가 무려 검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귀족 여인에게 살기를 풀풀 풍겨대고 있는 것이었다.
‘미쳤나 봐!’
로제타가 경악했다. 조금 전 자신도 잠시 미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기까지 뿜어내진 않았다.
“감히 내 파트너에게 그딴 헛소리를 지껄여?”
아르문트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사나운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경직되었다. 파트너라고? 애슐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도움을 구하듯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리디아는 제 사촌 동생을 돕기 위해 더듬거리며 답했다.
“저, 전하. 이곳은 여인들의 공간으로, 들어오시면…….”
“이 라그나르에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그러나 썩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르문트의 화만 더 키웠을 뿐이었다. 로제타는 멍한 얼굴로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자신보다 더 술 취한 상대를 보면 갑자기 술기운이 사라지는 것처럼, 아르문트를 바라보자 사라졌던 이성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정말 검이라도 빼 들 기세였기에 로제타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진정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녀가 아르문트에게 쪼르르 다가가 말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진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입은 괜찮다는 소리밖에 못 하나 보군. 저딴 소리를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래도…….”
“하나도 안 괜찮다. 너는 괜찮아도 나는 전혀 아니야. 그러니 막지 말고 가만있어.”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몸을 지나쳤다. 풍겨 나오는 살기도 더욱 짙어졌다. 두 여인은 처음 겪어보는 기운에 몸을 벌벌 떨어댔다. 이러다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가 재빨리 아르문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짜냈다.
“우리 다른 데 가요. 네? 아는 곳이 있어요. 여기보다 훨씬 실력도 좋고 친절한 곳이요.”
“지금 그게-!”
“여기 더 있기 싫어서 그래요……. 부탁이에요, 전하.”
로제타가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아르문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날카로운 시선이 닿자 리디아와 애슐리는 절로 숨을 멈췄다.
“잊지 않고 기억해두지.”
아르문트가 나지막한 경고를 남기고 홱 뒤돌아섰다. 그러곤 의상실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로제타의 손은 여전히 붙잡은 채로. 두근, 두근. 맞잡은 손을 통해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졌다. 로제타는 그를 따라 걸으며 그의 차가운 옆모습을 흘끔거렸다.
‘정말 연민 때문일까?’
이 모든 친절이, 그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어 베푸는 것일까. 그녀는 이것이 궁금했다. 고작 연민 때문이라기에는 과해 보였다. 적어도 로제타의 생각에는 그랬다.
‘어쩌면……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변하지 않을지도 몰라. 오히려 기뻐해 줄지도…….’
로제타가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빈틈없이 맞잡은 손에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말이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안쪽에는 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아르문트를 기다리고 있던 리처드가 둘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손을 잡은 모습을 본 탓이었다.
“다른 곳으로 간다.”
아르문트는 제 호위기사가 상처받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며 그를 지나쳐갔다. 리처드는 슬픈 얼굴로 뒤따랐다. 마차에 오를 때가 돼서야 아르문트는 로제타의 손을 놓아주었다. 로제타는 마부에게 위치를 말해준 후 마차로 올라섰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내부에는 얼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로제타는 제 옆자리에 앉은 그의 눈치를 보다,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전하. 저 때문에 많이 신경 쓰이셨죠.”
오늘 밤에 또 고생하시면 어떡하죠. 로제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의 정신 건강을 걱정했다. 하. 아르문트는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이어지는 목소리에서는 펄펄 끓는 쇳물 같은 분노가 묻어나왔다.
“도대체 왜 네가 사과하지? 네 잘못도 아닌 일에, 왜 네가 사과하고 왜 나를 걱정하냐 이 말이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로제타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는 무어라 더 소리치려다 말고 이를 꾹 깨물었다. 그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가 로제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제발 네 걱정을 해.”
힘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또다시 로제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감인지, 혹은 전혀 다른 감정일지 모를 것이 그녀의 속에서 크기를 부풀렸다.
“말했잖아. 나는 네가 걱정된다고.”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그의 눈빛을 가만히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르문트 또한 그제야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듯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보았다. 그러곤 차가운 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경 쓰는 게 싫으면 너 스스로부터 챙기란 말이야.”
“네, 전하. 감사해요.”
로제타는 차분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아르문트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멋대로 소리를 질러대는데 또 감사 인사인가? 착해 빠져서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이타적이야? 아르문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툴툴거렸다. 로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대답했다.
“네? 저 안 착한데요? 그다지 이타적이지도 않고요.”
“그런 사람이 제 걱정보다 내 걱정을 먼저하고 있나?”
아르문트가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진지하기만 했다.
“그건 전하니까 그렇죠.”
“……뭐?”
아르문트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황금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하께만 이러는 거라고요, 저.”
아주 훌륭한 고백 멘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