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네 몸에 맞춰2021.07.22.
아르문트의 귓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대담함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고백을 들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맹랑한 게……!’
그가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로제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가 감탄했던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포시 미소짓고 있었다. 하필 저 모습으로 고백이라니. 이건 반칙이지 않나. 아르문트가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 신분 차이도 걸리고, 성격 차이도 있고……. 아니, 이런 모든 것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녀의 수명이었다. 곧 죽을 상대에게 마음을 줄 수는 없다. 그랬다간 언젠가 자신만 후회할 테니까. 그녀의 상태를 다시금 떠올린 아르문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곱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참 예뻤다. 다른 귀족 여인들과는 달리 손은 거칠었고, 머릿결도 관리받은 이들과 달리 투박한 데가 있었으나, 솔직한 눈동자와 밝은 미소가 보기 좋았다. 겉으로는 이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사실은 죽을 목숨이라니. 그것도 나 때문에. 죄책감이 여지없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빠르게 지워냈다. 죄책감만 부여잡고 있느니 얼마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겼다.
“그리고 방금 라트랑제에서 있었던 일도 그냥 넘길 생각은 아니고요.”
로제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정작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애초에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르문트와 자신이 이성 관계로 묶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는 그녀가 말을 돌린 거라고 여겼다. 고백해도 잘 될 가능성이 없으니, 어렴풋이 마음만 드러낼 뿐 절대 제대로 된 말은 꺼내지 않는 거라고 말이다. 이를테면, ‘좋아해요’나 ‘사랑해요’ 같은 것. 화악! 아르문트의 귀가 더욱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저런 말을 하는 로제타의 모습을 상상한 탓이었다. 만약, 로제타가 죽지 않는다면 어땠을까.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라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과연 그의 대답은 같았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다.’
아르문트가 단호하게 결론 내렸다.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 뿐이다. 그러나 그는 느끼고야 말았다. 불가능한 상황을 떠올린 찰나 같은 순간, 제 가슴속 깊은 곳에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진 그 알 수 없는 희열을. 다만 굳이 인식해봤자 자신만 더 힘들어질 뿐이기에, 애써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로제타는 머지않아 죽을 테니까.’
아르문트는 이렇게 되뇌며 복잡하던 마음을 정리했다. 이 전제가 언젠가 사라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말이다.
“그냥 넘기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아르문트가 겨우 대화 주제를 따라잡았다. 대답이 너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였으나, 원래 말이 그리 빠르지 않았던 덕에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라트랑제와 그 여자는 내가 적절히 조치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로제타가 서둘러 말을 잘랐다. 라트랑제는 황후가 즐겨 찾는 의상실이다. 그녀의 배에서 나오지 않은 황태자가 그곳을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것이다. 심지어 그 이유가 정부 때문이라면 더욱이 지지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다. 로제타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르문트는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로제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감히 자신이 데려온 여인을 모욕하는 꼴을 어떻게 참아 넘기겠는가. 이는 몹시 아르문트답지 않은 판단이었으나, 분노에 정신이 팔린 그는 자신의 변화를 차마 인식하지 못했다.
“말씀드렸듯이, 그냥 넘기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전하께서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라트랑제를 상대로 네가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다 방법이 있답니다!”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답답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데 전하께서 조금 도와주셔야 해요. 별 건 아니고, 아주 작은 거예요. 해주실래요?”
“우선 들어보지.”
아르문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로제타의 머리에서 뭐 얼마나 대단한 방법이 나오겠냐마는,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음…… 곧 있으면 다른 의상실에 도착할 거잖아요. 제가 아까 말한, ‘라트랑제보다 훨씬 실력도 좋고 친절한 곳’인, ‘로젠다이엠’에요.”
그게 진심으로 말한 거였나? 아르문트가 아까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한 건 줄 만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로젠다이엠이라. 아르문트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거기서 제일 예쁘고 좋은 드레스를 사서, 전하께서 이번 황실 연회에 함께 참석할 여성분께 선물해주세요. 아, 푸른색이면 더 좋겠네요.”
로제타가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어쩐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되었다.
“……그게 다인가?”
“네, 다예요.”
아르문트가 한쪽 눈썹을 휘어 올렸다. 고작 이걸로 어떻게 복수를 하겠냐는 의미였다. 이를 알아들은 로제타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거면 분명 라트랑제에게도, 애슐리 버틀러에게도 복수가 될 테니까요.”
복수가 되고말고. 로제타가 중얼거렸다. 2주 뒤 열리는 황실 연회는 곧 있을 사냥제가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그 목적에 비해서는 규모가 아주 큰 편이었다. 사냥제가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그 연회였기 때문이었다. 사냥제에는 파트너라는 것이 있다. 여자는 자신의 파트너에게 사냥제가 시작되기 직전 무사와 승리를 기원하는 선물을 주었고, 사냥제에서 승리한 남자는 제 파트너에게 승리의 입맞춤을 해주는 것이 전통이었다. 제국에선 이를 아주 큰 영예로 여겼기에, 여인들은 황실 연회에서 괜찮은 파트너를 찾고자 애를 썼다. 남보다 좋은 드레스를 선점해두는 것은 기본이오, 경쟁자가 될만한 이의 옷차림도 미리 알아두어야 했다. 황태자는 지금까지 따로 파트너를 둔 적이 없었으나, 2년 뒤 있을 연회부터는 루니엘라 영애와 참석하고는 했다. 그리고 로제타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로젠다이엠에서 제일 아름답고 좋은 드레스를 사서, 루니엘라 영애에게 선물하게끔 하는 것. 안 그래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루니엘라 영애가, 이후에는 라트랑제보다 훨씬 유명해질 의상실인 로젠다이엠의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면 분명 엄청난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아르문트와 루니엘라 영애도 더 빠르게 가까워지고, 로젠다이엠도 원래보다 일찍 명성을 얻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바꾸는 게 조금 꺼림칙하긴 했으나, 어차피 일어날 일을 조금 당기는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테다. 라트랑제가 추락하는 모습을 상상한 로제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반면, 아르문트는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복수가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때는 이미 로제타가 죽고 없을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적어도 죽기 전에 보고 가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차마 그녀의 죽음을 언급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로제타는 마차에서 내려 아르문트와 리처드를 로젠다이엠 의상실로 안내했다. 다행히 로젠다이엠은 쭉 같은 장소에서 영업해온 덕에 길을 헷갈릴 염려는 없었다. 발레리에게 억지로 끌려갔던 게 도움이 될 줄이야! 로제타가 흐뭇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편 아르문트는 썩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라트랑제와는 달리 길목부터 썩 고급스럽지가 못했다. 제대로 된 옷 한 벌 가지지 못한 하녀에게 의상실을 추천받다니. 아르문트는 제 실수를 깨닫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평범한 곳에서 로제타의 옷을 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한숨 소리를 귀신같이 들은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속는 셈 치고 들어와 보세요.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가 추천한 곳이니, 분명 전하 마음에도 드실 거예요.”
“……네 소꿉친구라는 그?”
“네, 그 친구 맞아요.”
헤헤 웃으며 말하는 로제타의 모습을 보니 더욱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안 가겠다고 뻗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아르문트는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계세요?”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말했다. 아르문트는 안내원도 한 명 없는 모습에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옷도 분명 볼품없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옷걸이에 걸려 있는 몇 개의 드레스는 그가 보기에도 제법 괜찮아 보였다. 요즘 여인들이 입는 스타일과는 사뭇 달라 어색하긴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지 않은 보석 사용과 자연스러운 라인이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자, 잠시만요!”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인기척이 크게 들려오더니 이내 중년의 여인이 다급히 걸어 나왔다.
“손님이신가요?”
“네. 드레스를 좀 주문하고 싶은데요.”
로젠다이엠의 주인, 엠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로제타가 혹 월세를 내라며 독촉하러 온 사람일까 봐 겁을 먹었던 탓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손님인가! 다른 이들은 늘 외관만 보고 지나쳐가기 일쑤였기에 이렇게 드레스를 주문하고 싶다며 들어온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떤 드레스를 원하세요?”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혹 기껏 온 손님이 또 ‘요즘 유행대로 화려하게 만들어달라’라고 요구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돈이 급하다고 한들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로젠다이엠 특유의 아름다움을 제일 잘 드러낼 수 있는 드레스를 원해요.”
로제타의 말에 여인이 다리를 비틀거렸다. 어쩐지 눈가가 그렁그렁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죠?”
로제타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아르문트의 눈치를 보았다. 반신반의하던 아르문트는 몇 개의 드레스를 더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로제타가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드레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가 보기에도 이 의상실은 독보적이었다. 하물며 리처드도 잠시 실연의 슬픔을 잊고 감탄할 정도이니 두말할 것 없다.
“그래. 돈은 얼마든 들어도 괜찮다. 그대 마음껏 만들어 봐. 아, 색은 푸른색이면 좋겠다는군.”
맹세컨대 이것은 엠마가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그녀가 감격에 찬 눈으로 아르문트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어쩐지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설마, 황태자 전하……?”
엠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고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올 리가 없다고 여겼으나, 아니라기엔 얼굴이 너무 똑같았다. 저렇게 잘난 얼굴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아르문트는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답했다.
“한 번에 알아보는 것도 여기가 낫군.”
“그렇죠? 괜찮죠?”
로제타가 한껏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엠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 엠마가 진정한 후,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협박에 못 이겨 옷을 몇 벌 사들였다. 도대체 언제 입을는지 모를 드레스가 세 벌, 그나마 평소에도 입고 다닐만한 원피스가 일곱 벌이었다. 기어코 열 벌을 채우는 그의 고집에 로제타는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미안해요, 리처드 경. 무겁죠?”
“……아닙니다. 괜찮아요.”
미안한 마음에 묻자 리처드는 슬픈 눈을 하고선 대답했다. 로제타로서는 그가 아까부터 왜 저렇게 시무룩한 표정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자, 그럼 처음에 말했던 특별제작 건으로 돌아와서.”
리처드에게 모든 옷을 건네준 엠마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눈물 몇 방울 흘린 후 금세 프로의 모습을 되찾은 그녀였다.
“입으실 분 체형은 어떻게 되시나요?”
“으음…….”
체형이라. 로제타가 어느 먼 곳을 응시하며 루니엘라 공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몸은 더 말랐었지?’
아주 정확하게 맞출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공작가로 보내면 가문에서 일하는 재봉사가 루니엘라 영애의 체형에 다시 맞춰줄 테니까. 푸른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얼마나 예쁠까. 로제타가 그녀의 그림 같은 모습을 그려보았다. 달빛을 모아 실을 뽑은 듯 아름다운 그녀의 은발에 푸른 드레스가 잘 어우러질 것 같았다.
‘전하와도 잘 어울릴 테고 말이야.’
로제타의 머릿속에 선남선녀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이전 생과는 달리 화목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둘의 모습을 떠올리니, 일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로제타는 묘한 감정을 애써 떨쳐내며 엠마에게 루니엘라 영애의 체형을 불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선수를 쳤다.
“고민할 게 있나?”
아르문트는 무심한 얼굴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네 몸에 맞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