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실력 발휘할 시간2021.07.29.
리처드는 억울한 눈으로 아르문트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포기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어떤 사내가 제 여자에 눈독 들이는 놈을 좋아하겠어.’
어느새 그는 아르문트와 로제타의 관계를 연인 사이로 확정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황태자궁에는 황태자와 그 전속 하녀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로제타에게 옷을 사준답시고 여기까지 나온 저 정성을 보라. 이전의 아르문트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사랑이 사람을 바꿔놓긴 한 모양이었다. 리처드는 슬픈 마음을 삼키고자 입안에 고기 꼬치를 욱여넣었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꾸만 가슴속에 억울한 마음이 샘솟았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전하도 알고 계셨으면서. 그가 입을 우물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좋아하는 마음에 순서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그래도 원통한 건 원통한 거였다. 로제타는 그의 첫사랑이었으니까. 게다가 걸리는 것은 또 하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려고…….’
바로 아르문트와 로제타의 신분 차였다. 로제타가 귀족이기는 하나, 황태자와 정식으로 교제하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었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만큼 대단한 능력이 따로 있거나, 어지간한 공로를 세우지 않는 한 결코 결혼까지는 갈 수 없으리라. 그리고 제국에서 여자의 몸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공로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로제타가 얻을 수 있는 지위는 잘해야 황태자의 정부 자리가 고작이었다. 고작이라 칭하기에는 한순간에 얻을 수 있는 권세가 대단하기는 하나, 그만큼 금방 잃을 수도 있는 자리였다. 아르문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금세 나락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는 자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호감을 느낀 사람이 그러한 상황에 치닫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자신과는 잘 안 되더라도, 어쨌든 늘 안전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정작 아르문트와 로제타는 그런 생각까지는 해보지도 않았는데 혼자 심각한 그였다.
‘만약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한 거라면, 아무리 전하라도…….’
리처드가 손안의 꼬치를 강하게 쥐어 잡으며 아르문트를 향해 경계와 불신의 눈빛을 던졌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더욱 무섭게 바뀌었다. 그러나 곧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시야에 로제타를 나긋하게 응시하는 아르문트의 모습이 담겼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줄만 알았던 그의 눈동자에는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간질거리는 애정이 엿보였다. 해맑은 얼굴로 무어라 조잘거리는 로제타와, 그런 그녀를 시끄럽다 타박하면서도 연신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아르문트. 온화하고도 싱그러운 공기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두 남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리처드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슬픔마저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제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 자리가 아니었음을 자연스럽게 깨달은 덕이었다. 그렇기에 리처드는 잘 구워진 고기와 함께 제 눈물을 삼키며, 둘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짧게나마 사랑했습니다……!’
리처드가 아련한 눈빛으로 로제타를 응시하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세기의 사랑이라도 한 줄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편, 그의 낯간지러운 시선을 받은 로제타는 어쩐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팔을 문질렀다.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가 슬쩍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추운가?”
“아, 아니요. 괜찮아요.”
로제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원피스가 워낙 얇아 바람이 숭숭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리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쟁 중에는 얼음물에도 서슴없이 들어간 그녀이니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강인함을 알 길이 없는 아르문트는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의 얇은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마음 같아선 제 겉옷이라도 벗어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얼굴이 드러날 테다. 리처드의 로브를 벗겨 입힐까 싶다가도 그것 또한 왜인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녀를 위해 내 호위기사 옷을 벗길 수야 없지. 그가 이렇게 합리화했다.
“경, 간단하게 걸칠 옷이라도 하나 사 오게.”
아르문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제 호위기사를 위하는 척 합리화해놓고 곧장 일감을 주는 그였다.
“네에? 아뇨, 전하! 저 진짜 괜찮아요!”
로제타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리처드 또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전하, 위험합니다. 어찌 제가 전하를 두고…….”
“리처드 경.”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가지런한 눈썹이 짜증스럽게 뒤틀렸다. 경고의 의미였다. 두말하게 하지 말라는. 리처드는 이를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해가 지고 있는 시장 골목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크게 위험할 것은 없어 보였다. 아르문트의 검술 실력이 어지간한 기사보다도 뛰어나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언제나 사고는 방심할 때 일어나는 법.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군의 명령에 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분이……. 사랑이 참 대단하긴 하군.’
이렇게까지 사람을 바꿔놓다니. 리처드가 씁쓸한 얼굴로 입맛을 쩝 다셨다. 그는 아르문트가 로제타와 단둘이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자신을 보내는 것이리라 확신했다. 같은 남자로서 이해 못 할 심정은 아니었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꼭 이 근처에 계셔야 합니다.”
“그러지.”
리처드의 당부에 아르문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로제타는 안절부절못하며 떠나는 리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때 아르문트의 호위였던 입장에서 지금 리처드가 얼마나 곤란할지 공감할 수 있었다.
“전하, 저는 정말 괜찮은데…… 읍!”
그녀는 다시 리처드를 불러오라 말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아르문트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두 볼을 꾹 눌렀기 때문이었다. 저절로 입술이 붕어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이건 또 무슨 짓이야? 그녀가 불만을 가득 담아 아르문트를 노려보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앞으로는 네가 ‘괜찮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이렇게 할 거다.”
“그런 게 으디써여……!”
로제타가 억울한 목소리로 주장했으나 여전히 얼굴을 잡힌 탓에 발음이 샜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의 기다란 눈매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내 마음이야.”
불만이면 네가 황태자 하던가. 그가 쿡쿡 소리 내어 웃더니 얄미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런 장난도 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로제타는 무어라 대꾸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늘 컴컴하게 가라앉았던 얼굴에 제 나이에 맞는 풋풋하고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예쁜 얼굴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로제타의 푸른 눈동자가 애틋함과 기쁨으로 일렁거렸다. 아르문트가 그제야 자신이 과하게 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굳혔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괜히 또 여지를 줬나…….’
자중하겠다고 다짐해놓고 왜 자꾸 선을 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어색하게 손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새삼 로제타와 데이트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더욱 민망해졌다. 방금까지 그녀의 볼에 닿았던 손가락이 화끈거렸다.
“흠. 저 가게에선 뭘 파는 거지?”
아르문트가 주제를 돌리기 위해 괜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가게를 가리켰다. 조금 구석진 골목 안쪽에 있는 가게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제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아, 저기는 아마 디저트 가게일 거예요. 가보실래요?”
“그래.”
아르문트가 냉큼 수락했다. 딱히 디저트를 먹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 어색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저 정도 거리면 리처드도 찾아올 수 있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로제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리처드가 염려한 것처럼, 사건은 언제나 가장 방심할 때 일어나는 법이었다. 골목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뒤로 낯선 기척이 따라붙었다. 이를 눈치챈 아르문트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간질거리던 가슴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장난스럽던 눈매도 날카로워졌다.
‘기어코 오늘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순 없는 건가. 그가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몽글몽글한 구름 위를 걷다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자신이 평생토록 살아온 그 진창으로.
“……로제타, 이리와.”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로제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빠르게 했다. 다행히 로제타는 별다른 질문 없이 그의 속도에 맞췄다. 뒤에 있는 자가 정말 자신을 따라오는 건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아르문트는 가게 쪽으로 향하는 대신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들어섰다. 인적이 드문 쪽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심스러운 기척도 그가 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아르문트가 이를 꽉 물었다. 허접한 불량배인지, 잘 훈련받은 자객인지는 몰라도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혼자라면 곧장 검을 빼 들고 맞서기라도 하겠으나, 곁에는 로제타가 있다. 자칫했다간 그녀가 다치리라. 그렇기에 그는 결국 차선책을 선택했다.
“뛰어!”
바로, 도망이라는 선택이었다. 아르문트가 긴 다리를 뻗어 빠르게 내달렸다. 행여나 그녀가 뒤처질까 여전히 손은 맞잡은 상태로.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로제타는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치마를 입었음에도 오히려 아르문트보다 더 잘 달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벼운 몸짓으로 누구보다 날쌔게 뛰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놀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뒤를 쫓아오는 이들도 속도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덩치의 남자들이 보였다. 자객 같은 복장은 아니었으나 흉악한 인상으로 보아 안 좋은 목적을 가졌다는 건 분명했다.
“앞만 보고 뛰세요!”
마차가 있는 쪽으로요! 로제타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단호히 외쳤다. 아르문트는 잠시 당황하다, 손을 놓으니 오히려 더 빠르게 뛰는 그녀를 확인하고 다시 도망에 집중했다. 곧 갈림길이 나왔다. 이곳 지리에 익숙지 않은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전하, 왼쪽으로 가세요! 저는 오른쪽으로 가서 도움을 구할게요!”
로제타가 재차 명령했다.
“……그래. 도움은 됐으니 숨어 있어.”
짧은 고민 끝에 아르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쫓아오는 놈들은 분명 자신을 노리고 있을 터. 지금은 이대로 찢어져 자신을 따라오게 하는 게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더 안전할 테다. 전투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없는 게 더 마음이 편할 테니까. 이렇게 판단한 아르문트는 신속히 왼쪽 길로 달렸다. 부디 로제타가 지금처럼 날쌘 몸놀림으로 안전하게 피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당연하게도, 로제타는 오른쪽 길로 가지 않았다. 아르문트를 속이기 위해 시늉만 했을 뿐 금방 다시 갈림길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느긋하게 서서 달려오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남자들이 당황한 얼굴로 속도를 줄였다. 남자는 도망가고 여자는 가만히 서 있는 상황이라니. 심지어 미소까지 머금은 채로. 더러운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미친 여잔가? 누군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곧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섰다. 험악한 얼굴에는 혼란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이를 본 로제타가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그냥 돈 좀 뜯으려던 불량배군.’
암살자였다면 아무리 상황이 당황스럽다 해도 멈춰 서지 않았을 테다. 그녀를 빠르게 죽이고 아르문트를 계속 쫓기 바빴을 것이지. 기척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쫓아오던 게 이상하다 싶더니만. 그녀가 쯧 혀를 찼다.
“하, 이게 무슨 상황이냐? 어이가 없어서……. 야, 주인이 막으라고 시키던?”
“아오, 그 새끼 돈깨나 있어 보였는데 이년 때문에 당황해서 망했네.”
불량배들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당황스러운 게 좀 가시고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셋 중 가장 덩치 큰 남자가 로제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아 쥐려 했다.
“그래도 이거 반반한 게 팔면 돈 좀 되겠-.”
뿌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남자의 손목이 기괴하게 꺾이는 소리였다. 짧은 정적 후 남자가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끄어억……!”
그러나 로제타는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주먹을 뻗어 그의 턱에 강하게 꽂았다.
“어딜 감히.”
“크헉……!”
턱뼈가 으스러지는 충격에 남자가 단말마적 신음을 뱉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 개복치를 건드려?”
로제타가 눈을 흉흉하게 치켜뜨고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