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세 번째 입맞춤2021.08.08.
로제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저번처럼 이성을 잃은 아르문트가 갑자기 달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붙잡아 제압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난도가 높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수련을 받아온 아르문트는 어지간한 기사보다 힘이 세고 몸도 날쌨다. 리처드처럼 덩치가 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키가 큰 편인 로제타도 꽤 올려다볼 정도로 장신이었고, 근육이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제법 탄탄하게 박여 있었다. 그는 로제타가 인정할 정도의 실력자였고, 종종 놀랄 정도로 기민한 감각과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광증 상태일 때는 그 움직임이 인간 같지 않아 더욱 예측이 어려웠다. 이러한 사정만으로도 까다롭지만, 그녀를 가장 난감하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아르문트가 그녀의 주군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알고 심장마비로 죽을 만큼 약해빠진 주군. 제압 중 힘 조절을 잘못했다간 아르문트가 다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충격으로 죽을지도 모르고. 지나친 걱정이긴 했지만, 그의 전적을 생각하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그를 제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조심조심 문을 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방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 근처에 서 있는 아르문트가 보였다. 잠옷 가운을 팽개치기 직전이었는지 옷깃을 움켜쥔 모습이었다. 오늘도 다행히 바지는 입고 있었다. 로제타의 기척을 빠르게 인지한 아르문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저번과 같았으나, 어쩐지 표정은 미묘하게 달랐다. 저번에는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사나운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긴장으로 잔뜩 얼어붙은 얼굴이었다. 그녀에게 달려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올까 봐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두려운 존재를 바라보듯이 말이다.
‘저번에 있던 일을 기억하는 건가?’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아르문트의 몸이 더욱 경직되었다. 저번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니 정말 자신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다만 이러한 광증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다 보니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시험해보자.’
그녀는 우뚝 멈춰 서서 아르문트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저번에 했던 고양이 눈인사였다. 당연하게도 아르문트는 사람이지 고양이가 아니었기에, 같이 눈을 깜빡거리며 반응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번처럼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도움이 됐는지 빳빳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슬며시 풀어지는 게 보였다. 이를 확인한 로제타는 아주 천천히 제 잠옷 치마를 걷어 올렸다. 오늘은 그의 흥미를 잡아끌 먼지떨이는 없었다. 다만 이는 단지 저번에 있던 일을 기억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곧장 반응을 보여왔다. 그가 로제타의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 위에 어리어 있던 경계심은 차츰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아마 치마 아래에 있을 재밌는 장난감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광증 상태일 때 기억이 이어지는구나.’
휴. 로제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이 되어 이성을 되찾으면 밤에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시 광증이 발현되면 기억도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를 조련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노력했던 로제타로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체력 좋고 인내심이 큰 그녀라도 매번 그 짓을 반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르문트가 제법 가까이 다가오자 로제타는 들어 올리던 치맛자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눈매가 단번에 가늘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못마땅하다는 듯 로제타를 노려보았다. 왜 장난감 안 꺼내냐.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로제타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아르문트를 지나쳐, 소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소파에 앉은 그녀는 아르문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갑자기 쉬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고, 책에서 배운 것을 시도해볼 작정이었다. 친해지겠답시고 무작정 다가가는 대신, 고양이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바로 그 첫 번째였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로제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앉은 자세로 죽은 줄 알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말은 책에 없었으나, 오래도록 기사 생활을 해온 그녀는 익숙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30분쯤이 지나고 나서야 입질이 왔다. 소파 주변을 배회하며 로제타의 눈치를 보던 아르문트가 마침내 소파로 다가와 그녀의 곁에 앉은 것이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로제타가 그제야 움직였다.
“잘했어요, 전하.”
그녀가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곤 따로 챙겨온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원활한 교육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적절한 보상이다. 고양이가 말을 잘 들을 때마다 간식 등을 보상을 주어 칭찬하자.]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뒀지! 로제타가 뿌듯한 얼굴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길쭉하고 단단한 것. 시장에서 산 고양이용 간식이었다. 그것도 발로가 환장하던 종류의. 그러나 당연하게도, 혹은 다행히도,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인 아르문트는 고양이용 간식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눈썹을 휘어 올릴 뿐 간식을 탐내지 않았다. 로제타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쩝 다시며 이번엔 다른 것을 꺼내 들었다. 네모난 육포였다. 생긴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이건 사람용이라는 점이 달랐다. 다만 아르문트는 이번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먹고 싶어 하기는커녕 관심이 없는 걸 드러내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이것도 별로라고?’
로제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문트는 원래 식탐이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먹는 양도 그다지 많지 않은 데다가, 별다른 기호도 없어 로제타는 그를 모시는 내내 무어가 맛있다는 말을 한반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광증으로 정신이 짐승처럼 변했다고 해도 취향까지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먹을 것 말고 보상으로 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도대체 전하는 뭘 좋아하는 거지?’
로제타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저번부터 고민하던 내용이었으나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새삼 자신이 아르문트를 잘 알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던 시간이 그렇게 긴데도 좋아하는 것 하나를 알지 못하다니. 비록 호위기사의 영역은 상대를 지키는 데 국한되어있다고 하나, 어쩌면 이런 무관심이 아르문트를 더욱 힘들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한때는 그가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게 내심 아쉬웠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상대를 어떻게 믿겠는가 싶었다. 광증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이리라. 그러나 이번 회차는 다르다. 로제타는 네 번의 인생 동안 알지 못하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아르문트를 제대로 마주 본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지.’
로제타는 이렇게 다짐하며 간식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가 만족할만한 보상을 주는 건 이미 그른 것 같으니 다음 순서로 넘어가려는 심산이었다. [어릴 때부터 만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좋아하는 부위부터 만지기 시작해, 익숙해지면 범위를 넓혀가자.] 이십 대 중반이면 충분히 어린 나이지. 로제타가 그의 현재 나이를 가늠해보며 다소 뻔뻔하게 결론 내렸다.
‘그나저나, 과연 어느 곳이 ‘좋아하는 부위’일까?’
이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로제타는 곰곰이 발로를 기르던 때를 되짚어보았다. 곧 엉덩이 위쪽을 톡톡 쳐주면 좋아하던 발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흠칫 표정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아르문트의 엉덩이를 두들겨주는 상상을 한 탓이었다.
‘미쳤나 봐.’
감히 전하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상상한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비록 이미 가장 은밀한 곳까지 닿아본 전적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건 무리다. 로제타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착하죠, 전하? 아프게 안 할게요.”
최대한 무해한 척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번처럼 달려들려 한다는 신호였다.
“씁, 안 돼요!”
로제타가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녀의 말에 아르문트가 반사적으로 힘을 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은 확실하게 기억하는 듯했다. 밤을 새워가며 ‘안 돼요, 전하’를 외쳐댄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포기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아르문트는 경계하는 기색이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이내 하얀 손가락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엉덩이 대신 가장 무난한 부위를 선택한 그녀였다.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아르문트는 행여나 그녀가 공격할까 긴장한 듯했으나, 로제타가 계속 머리만 쓰다듬을 뿐 다른 행동을 하지 않자 안심했는지 조금씩 쓰다듬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길이 만족스러운지 나중에는 눈을 감기까지 했다. 성공이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상외로 아르문트는 그녀가 만져주는 걸 제법 즐기는 모습이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보아 확실했다. 어쩌면 앞으로 보상 삼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범위를 넓혀가라 했지.’
로제타가 책에서 얻은 조언을 떠올리곤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피부를 타고 내려갔다. 선명한 턱선을 지나쳐, 목젖이 툭 불거진 목과, 드넓은 어깨까지. 단단한 근육이 피부 아래로 느껴져서일까, 순간 얼마 전 이불 아래에서 그와 껴안고 있던 게 떠올랐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눈을 감고 쓰다듬을 즐기던 순진한 얼굴은 어디 가고, 눈썹을 슬쩍 찌푸린 채 정욕이 득실거리는 눈으로 로제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아르문트와. 탁. 얌전히 그녀의 손길을 즐기던 아르문트가 돌연 그녀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로제타는 그가 또다시 덮쳐올까 긴장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달려드는 대신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을 가슴으로 끌어내렸다.
“저, 전하?”
“하아…….”
커다란 흉부 근육이 손안에 담겼다. 아르문트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낮게 토해내는 목소리가 꼭 신음 같았다. 로제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당장 그를 밀어내고 싶었으나 자신이 먼저 만지기 시작한 거니 안된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녀가 당황한 사이, 아르문트가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자연스럽게 딱딱한 복근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리고 손은 더욱 아래를 향했다.
“아, 안 돼요!”
로제타가 기겁하여 외쳤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조금만 더 늦게 정신을 차렸으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고 말았으리라. 미쳤나 봐, 진짜. 그녀가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불손한 말을 중얼거렸다. 로제타는 다급히 손을 들어 올려 다시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아르문트가 손에 힘을 줘서 막으려 했지만, 그녀의 힘이 더 셌다.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범위를 넓혀가며 만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머리를 쓰다듬는 거로 충분하다.
“차, 착하다. 머리 만져주는 게 더 좋죠?”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아르문트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로 눈썹만 휘어 올렸다. 영 불만스러운 눈빛이었다. 로제타는 그의 눈빛을 무시하고 머리를 만져댔다. 그러나 이어진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처음엔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여태껏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기만 한 아르문트가 갑자기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믿음을 와르르 박살 내고 말을 이었다.
“이게 더 좋아.”
놀라워할 여유도 없었다. 아르문트가 복수하듯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당황한 로제타는 반항할 정신도 없이 그의 손에 끌려갔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이로써 벌써 세 번째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