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키스해봐2021.08.12.
입술 위로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머리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말랑한 입술이 짓눌리더니 이내 빈틈없이 겹쳐졌다. 매혹적인 향기가 코를 찔렀다. 맞닿은 가슴 너머로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어둠 사이로 설친 듯 단정한 눈썹, 짙은 황금색의 눈동자와 높게 솟은 콧대가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하자 아르문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썹이 슬쩍 휘어지고 기름한 속눈썹이 눈을 덮었다. 그리고 촉촉한 무언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퍽!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로제타가 다급히 아르문트의 몸을 밀어냈다. 팔이 당황과 부끄러움으로 덜덜 떨려오는 탓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를 떨어트려 놓기에는 충분했다.
“저, 전하! 이게……!”
이게 무슨 미친 짓입니까? 튕겨 나오듯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물린 로제타가 거세게 소리치려다 말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밖에 있는 기사가 들을 수 있으니 너무 큰 소리를 내서는 곤란했다. 손가락에 입술이 닿자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꼭 작은 심장이 입술 아래 있는 것만 같았다. 독을 빼내기 위해 한 번, 광증을 처음 발견했을 때 또 한 번. 그리고 이것이 무려 세 번째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라고 한들 적응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문트가 말을 했다. 이게 더 좋아, 하고 교태롭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해대며 직접 입을 맞춘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건가? 아니, 그럼 갑자기 키스는 왜 해?’
로제타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닥만 멍하니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고, 심장은 너무 빠르게 뛰어서 곧 터진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혼자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제 가슴 속에 복잡한 감정이 마구 뒤엉키는 것을 느끼며 느릿하게 시선을 올렸다. 아르문트는 소파에 나른하게 등을 기댄 채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트인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불그스름한 입술도 곡선을 그렸다. 만족스러운 고양이 같은 미소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그림 같은지 로제타는 홀린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로제.”
아르문트가 가슴이 간질거릴 만큼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쿵. 심장이 아래로 거세게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로제타가 손바닥에 가려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짜내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 지금 제정신이세요?”
제 주군에게 건네기에는 꽤 건방진 말이었다. 그러나 차마 이를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만 빤히 바라보았다. 로제타는 크게 심호흡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아르문트는 또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황하거나 놀라서 침묵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 위에는 여전히 고양이 같은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이로써 로제타는 확신했다. 아르문트는 여전히 광증 상태다. 제 주군이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다.
‘이 상태로도 말을 할 수 있다니. 원래 그랬을까?’
아르문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는 자신을 그저 짐승 같다고 설명했다. 아무런 이지 없이 본능만을 좇는다고도 말했다. 이는 즉 지금까지는 대화가 통했던 적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왜 갑자기 변한 거지?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나쁘지는 않았다. 소통이 된다는 건 통제할 가능성도 올라간다는 얘기니까. 심지어 아르문트는 그녀의 애칭까지 불렀다. 정상일 때의 기억이 몸에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걸지도…….’
계속 지내다 보면 광증이 차차 나아질지도 모른다. 로제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희망을 품었다. 너무 낙관적인 기대이기는 하나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가능성이 보였다. 그녀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도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나니 조금이나마 민망한 게 덜했다. 다른 의미로 입을 맞춘 것도 아니고, 그냥 광증이 발현되었을 때마다 나타나는 짐승적 애정표현일 뿐이니까.
로제타는 방금 있었던 스킨십을 발로와 뽀뽀한 것쯤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추행을 다 받아주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제타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문트 앞에 섰다.
“전하. 방금처럼 입 맞추는 건 아주 무례한 행동이에요.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소통이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이를 적극 활용하여 그를 설득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싫은데.”
아르문트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잠시 그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로제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싫다뇨!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싫어. 더 하고 싶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집이 센 건 광증 상태에도 똑같았다. 우리 더 하자. 은근하게 속살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로제타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세상에, 저 얼굴로 저런 말이라니. 반칙 아닌가. 자신이 연애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곧장 고개를 주억였을 테다. 로제타가 그의 유혹을 피하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니 아까 느꼈던 그의 입술 감촉이 더 생생히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돌연 심장 박동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라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더는 무리야. 로제타가 항복을 선언했다. 의지력이 남다른 그녀답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정말 오늘은 이 이상 얽히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어쨌든 수익은 있었으니까, 괜찮아.’
광증 상태의 아르문트와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책에서 배운 것도 나름 잘 써먹었다. 그와의 관계도 제법 호전된 것 같았다. 다음번에는 그가 좋아할 만한 보상을 미리 준비해와야겠다. 로제타는 이렇게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 그만 주무세요.”
그래야 나도 자러 가지. 그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지금까지 멀쩡히 대답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또다시 침묵했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모습으로 보아, 일부러 그녀를 무시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가 재워드릴까요?”
로제타가 가볍게 손을 풀었다. 웬만하면 직접 자게 두고 싶었지만, 오늘의 그녀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정 안되면 저번처럼 기절이라도 시켜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을 뻗기도 전, 아르문트가 금세 불길한 기운을 알아차리고는 빠르게 도망갔다. 짐승처럼 변하더니 감각도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로제타는 허망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긴 다리로 소파를 훌쩍 뛰어넘어 달리는 모습이 꼭 흑표범 같았다. 그가 태피스트리 뒤에 숨어 로제타를 째려보았다. 또다시 그녀를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눈치는 빨라서.’
로제타가 쯧 혀를 찼다. 그를 따라가서 억지로 기절시키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랬다간 오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테다. 어쩌면 다음부터는 입을 꾹 닫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채찍 대신 당근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숨을 몇 번 내쉰 로제타가 이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불편하게 있지 말고 이리 오세요. 약속해요, 아무 짓도 안 할게요.”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후 이불 위를 가볍게 탁탁 두들겼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태피스트리 밖으로 얼굴만 비죽 내밀고 그녀를 쏘아볼 뿐 다가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거 줄게요. 아이 맛있겠다.”
로제타가 의미가 없을 걸 알면서도 간식을 흔들어 보였다. 하필이면 또 고양이 간식이었다. 역시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고양이 간식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좋아할 만한 게 도대체 뭐가 있지……. 아.’
일순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아르문트가 유일하게 ‘좋다’고 표현한 한 가지가.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먹힐 리가 없어. 로제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냥, 시험 삼아 해보는 거야. 시험 삼아…….’
꿀꺽. 그녀가 침을 삼켰다. 그러곤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전하, 이리 와서 얌전히 누우면 제가 입 맞춰드릴게요.”
제 목소리가 귀를 울리자 민망함이 휘몰아쳤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뱉다니. 그녀가 창피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더욱 창피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탁, 탁, 탁. 일정한 박자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를 들은 로제타는 경악한 얼굴로 슬며시 눈을 떴다. 시야에 아르문트가 담겼다. 어느새 침대에 누워,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문트가. 그제야 로제타는 확신했다. 아르문트가 가장 원하는 ‘보상’은 바로 그녀의 입맞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아르문트가 또다시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저 좋을 때만 대답하는 모습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 모습이 또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키스해봐.”
그가 로제타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눈꼬리를 휘어 올리고 교태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로제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정말 광증 상태인 것 맞아? 그녀가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얼굴을 붉혔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소리를 할 리가 없으나, 그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심이 들었다. 로제타는 차마 그의 입에 제 입술을 갖다 대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아르문트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곧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저, 전하……!”
“어서.”
키스하면 잘게. 아르문트가 야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로제타는 잔뜩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치열하게 고민했다. 얌전히 입 맞추고 재울 것이냐, 아니면 관계가 좀 나빠지더라도 기절시킬 것이냐. 그러나 모름지기 훌륭한 기사라면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법. 이럴 줄 모르고 말했다 해도 약속은 약속이다.
‘가볍게 살짝만 하는 거야. 살짝만…….”
스치듯이 입술을 대고 떨어지면 괜찮을 거야. 그녀가 열심히 합리화했다. 이내 결심한 로제타가 결연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차마 직접 보면서 입을 맞추지는 못하겠으니, 눈을 감고 얼른 해치울 작정이었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긴 탓에 이미 거리는 가까웠다. 이내 두 입술 사이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맞닿았다. 촉. 부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고 말랑한 촉감이 다시금 느껴졌다. 얼굴을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인 로제타는 곧바로 입술을 떼어내었다. 아니, 떼어내려 했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행동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머리를 잡아 누르지만 않았다면. 놀랄 틈도 없이 입술이 더욱 강하게 맞물렸다. 그리고 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읏……!”
날카로운 이가 입술을 슬쩍 깨물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르문트가 부드럽게 그사이를 파고들어 여린 살을 훑었다. 뜨거운 숨결이 얽혔다. 촉촉한 내부에선 통통한 살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단단한 손가락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벼락처럼 찾아든 기묘한 감각에 로제타가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아르문트!”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음속으로만 가끔 부르곤 했지, 이렇게 입 밖으로 토해낸 건 처음이었다. 아르문트는 씩씩거리는 그녀를 응시하며 또다시 기분 좋게 눈웃음을 쳤다.
“더 하자.”
그가 능청스럽게 요구했다. 지겹지도 않은지 어느새 몸을 흥분으로 딱딱하게 굳힌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