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오해해주기를2021.08.15.
회귀한 시간을 포함하여, 무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로제타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딱히 연애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으나, 회귀하기 전에는 검에만 미쳐 있었고, 회귀 후에는 아르문트의 안위에만 미쳐 있었던 탓에 누군가와 교제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사실 로제타에게 관심을 표하는 남자는 많았다. 얼굴, 돈, 권력. 모든 것을 가진 그녀였기에 오히려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한 일일 테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그녀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기도 전에 발레리안의 선에서 잘려나갔다. 로제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발레리안은 감히 같잖은 놈들이 제 여동생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꼴을 못 보겠다며 알아서 처리하곤 했다. 정확히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그 이후로 남자들은 로제타를 보면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그녀와 발레리안이 사귄다는 소문은 그렇게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로제타는 연애 비슷한 것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채로 수십 년을 보냈다. 스킨십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경험한 남자와의 스킨십이란 대련하며 바닥을 구른 게 전부였다. 물론 발레리안과의 접촉은 예외로 두었다. 발레리안은 남자라기보다는 가족이니까. 그런 그녀에게, 방금 아르문트와 벌인 짓은 당황스럽다 못해 충격적인 일이었다. 첫 키스. 그래, 이것은 무려 몇십 년 만의 첫 키스였다. 고작 입술만 가볍게 부딪치는 게 아니라, 입술을 열고 그 속살을 섞는 바로 그 자극적인 행위. 독을 빼내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달리 이름 붙일 말도 없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키기로 약속한 주군과 첫 키스를 하다니. 심지어 그는 이성도 없는 상태인데.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로제타는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아르문트를 노려보았다. 설상가상 아르문트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유혹해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얼굴이 또 너무 취향이라 더 화가 났다.
‘이 짐승 같은 자식이……!’
로제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어차피 때려도 아르문트는 기억하지 못할 텐데. 일순 유혹이 일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야 없다.
“더 해줘, 로제.”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어느새 잠옷 바지가 잔뜩 불거져 있었다. 이를 발견한 로제타가 화르르 얼굴을 붉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전하! 키스하면, 주무시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러나 ‘키스’를 언급할 때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혀가 얽히는 그 짜릿한 감각이 떠올라 순간 숨이 턱 막혀온 탓이었다.
“아니. 얌전히 누우면 입 맞춰주기로 했지.”
아르문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녀가 거부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차. 로제타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로제타가 요구한 것은 얌전히 눕는 것이었다. 자는 게 아니라. 아르문트가 제 말이 틀리냐는 듯 오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막말을 익힌 아이처럼 어눌하고 짧게만 대답하더니, 제가 억울해지니 갑자기 말이 트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가 아르문트 아니랄까 봐 제정신이 아닐 때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안 돼요. 이제 주무세요.”
로제타가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래도 거부한다면 이제 관계고 뭐고 곧장 기절시켜버릴 심산이었다. 방금의 키스로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아르문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제타를 살피더니, 이내 포기하듯 침대에 제대로 몸을 누였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절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하는 거야.”
아르문트가 가만히 누워 로제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쁜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을 간지럽히듯 쓸었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움찔, 몸을 떤 로제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침묵했다. 그러자 그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럽게 휘어졌다.
“대답.”
황태자는 과연 이성이 없어도 황태자였다.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짧은 명령으로 대답을 요구하는 행동이 퍽 오만하고도 매력적이었다. 로제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여기서 싫다고 대답했다간 안 자려고 하겠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화를 얻기 위한 답변은 정해져 있었다.
“알았어요. 다음에 해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얼른 자요.”
아르문트는 원하던 말을 얻어내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고단했던 밤이 지나갔다.
*** 당연하게도 로제타는 그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려고 하면 민망한 생각이 떠올라 잠이 훌쩍 달아나버린 탓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퀭한 눈으로 출근했다. 얼굴이 어찌나 안 좋았는지 그녀를 어색해하는 리처드조차 걱정할 정도였다.
‘어제 그런 짓을 했는데, 일어나자마자 전하를 또 봐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일이 휴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르문트가 그녀가 준 커프 링크스를 정말 매일같이 사용한다는 것도.
‘오랜만에 발레리안 집에서 푹 쉬어야지.’
발레리안이 선물한 마법 물품 덕에 아주 오래는 무리겠지만 잠시나마 마음을 놓고 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러려면 일단 오늘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 로제타는 크게 심호흡한 후 문을 두들겼다.
“전하, 로제타예요.”
“들어와.”
아르문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혹시나, 아주 만약에라도 그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할까 봐 기억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새벽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걱정 한 가지가 덜어졌다. 로제타는 안도하며 그의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로제타.”
그러나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다시 민망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르문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어젯밤의 그 잔망스럽기 짝이 없던 얼굴이 겹쳐진 탓이었다.
“좋,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후에도 시선을 피했다. 아르문트가 그런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 응시했다. 어지간해서는 시선을 피하거나 말을 더듬지 않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아침 인사를 이렇게 힘없이 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는 미간에 슬쩍 주름을 잡더니,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히익. 로제타가 첫 마디를 듣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단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내가 또…… 변했었나?”
아르문트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군.”
또 제대로 못 잤나 보지. 로제타의 눈 아래로 드리운 검은 자국을 발견한 그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저 좋자고 그녀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 네. 맞아요, 변하셨어요. 그렇지만 그리 늦지 않게 다시 주무셨고, 덕분에 저도 제대로 잤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로제타가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잠을 잘 잤다는 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굳이 제 주군에게 마음의 짐을 얹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디 다치진 않았나?”
“다치긴요. 전혀요. 오히려 점점 수월해-.”
그녀가 이를 꽉 깨물었다. 찰나 같은 순간 시야에 그의 입술이 들어온 탓이었다. 그녀는 제 가슴을 간지럽히는 이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을 떨쳐내려고 노력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는걸요.”
“그럴 리가. 굳이 없는 말까지 지어낼 것 없다.”
“아니요, 정말이에요! 어제는 심지어 말도 하셨어요!”
대화가 통했다고요! 로제타가 바깥에 있는 리처드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죽여 덧붙였다. 그녀의 말에 황금색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말을…… 했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만큼 놀라운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제 광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로제타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광증 상태의 자신과 대화했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뭐라고, 뭐라고 하던가.”
“꺗!”
아르문트가 급한 마음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로제타가 깜짝 놀라 몸을 파드득 떨었다. 어제의 여운이 남아있는 탓에 고작 이 정도 스킨십으로도 당황하고 만 것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군.”
아르문트는 곧바로 손을 떼어내며 사과했다. 요즘 좀 편해졌다 한들 허락도 없이 손을 대다니. 명백한 실수이자 잘못이었다.
“아뇨, 아니에요. 그냥 놀란 거예요.”
로제타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멜라니와 엘리아의 조언대로 열심히 스킨십을 한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건데, 고작 어제 일 한 번으로 갑자기 그와 내외할 수야 없다. 그녀는 그가 행여나 멀어질까 봐 그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뭐라고 하셨냐면…….”
로제타가 잠시 침묵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젯밤 그가 뱉은 말 중 어느 것도 민망하지 않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더 좋아.”
-“더 하고 싶어.”
-“키스해봐. 어서.”
이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그녀가 황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냥…… 제 이름도 부르시고.”
아르문트가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반쯤 이지를 잃은 상태에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놀라우면서도 무언가 부끄러웠다. 잘못했다간 자신이 로제타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무어라 변명하거나 덧붙이는 대신 주제를 넘겼다. 그러자 로제타는 더욱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그…… 민망한 말을, 조금.”
“……민망한 말? 어떤?”
아르문트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로제타였다.
‘광증 상태일 때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면서! 민망하다 하면 그냥 넘어갈 것이지, 왜 이렇게 자세히 물어봐?’
그녀는 여전히 아르문트가 발정 난 짐승 같은 상태를 인지하고 있다고 여겼다. 처음 광증에 관해 얘기할 때 오해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 광증이 발현하면 그저 폭력적인 성향만 드러난다고 믿고 있던 아르문트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눈치 없이 계속 대답을 기다리자, 로제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좋다고 했어요.”
“……무엇을?”
“그…… 제가요.”
로제타는 차마 ‘저와의 입맞춤을요’라고는 말할 수가 없어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제 발정을 알면 적당히 이해하겠거니 생각하며. 물론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는 그녀의 말을 전혀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내가, 로제타에게…… 고백했다고?’
아르문트의 눈이 강풍을 맞은 나뭇가지처럼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볼도 금세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미친 거다. 미친 게 틀림없다. 그래, 그래서 이름도 ‘광증’이 아닌가. 그가 입술을 벌렸다 다시 붙이기를 반복했다. 무의식중에 진심이 나온 게 아니라고, 그저 헛소리였다고 얼른 변명해야만 했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설명을. 그러나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마구 쿵쾅거리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차마 아무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아르문트가 떨리는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당황한 와중에 정말 쓸데없는 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그 고백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리고 지금은 무어라 말할까? 그는 매우 비겁하게도 잠시 설명하는 것을 망설였다. 아닌 척했지만 잠시 기다리면 그녀의 반응부터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설명은 그 뒤에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제타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전하. 별일 없었어요. 그게 전하의 진심이 아닌 것도 잘 알고요.”
오해하지 않으니 걱정 말아요. 로제타가 최대한 상냥하게 덧붙였다. 당신을 변태로 오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아.”
아르문트가 짧게 답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순간 멎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오해하지 않았다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정말 어째서인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슴이 간질거리던 느낌은 전부 사라지고 속이 쓰려 왔다. 마치 로제타가 오해해주기를, 그리하여 다른 반응을 보여주길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르문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어설프게 미소짓는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이런 상황이 어색한 모양인지 로제타는 그와 맞잡은 손도 슬며시 떼어내려 했다. 일순 심사가 뒤틀렸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로제.”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