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시한부가 아니에요!2021.08.19.
아르문트가 가만히 로제타를 응시했다. 하얀 손이 제 손바닥 안에 감기듯 들어오는 감촉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다른 여인들처럼 마냥 부드러운 느낌은 아니었고, 조금 거친 곳도 있었으나,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살이 제 피부를 스치는 느낌이 간지러우면서도 좋았다. 로제타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문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어린 짐승의 것을 닮아 귀여웠다. 귀엽다. 그래, 사실 그는 그녀를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해사한 미소와 맹랑한 말투가, 몸짓 하나하나가 다 귀엽고 예쁘다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나도 사람인데 누군가가 예뻐 보일 수도 있지. 별 의미 없이 그냥 귀여워하고 특별히 여길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아르문트가 여전히 눈썹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사실 알고 있었다. 그녀를 예쁘고 특별하게 보는 제 시선에, 무언가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말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피부를 울려댔다. 순간 이 세상에 자신과 그녀가 단둘이 남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녀 앞에서 자꾸만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될까. 불쾌하다고만 여겼던 스킨십을 내심 기다리게 되고,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또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오해하지 않는 게 섭섭하다니.
‘설마.’
아르문트가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지금껏 동정심으로만 취급해왔던 감정이, 사실은 다른 것이었다면. 로제타가 자신에게 품은 것과 같은…… 연모의 감정이라면.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생각한 것만으로 얼굴에 열이 오르고 가슴 쪽이 간질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또다시 부정해보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려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쉴 새 없이 흔들리면서도 그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가 그런 것이었다. 그녀를 귀엽다 느끼는 걸 인정한 것처럼, 이것도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연스럽게 불그스름한 입술이 열리고 본심의 일부가 그 틈새로 흘러나왔다.
“나는…….”
한마디 말을 뱉은 순간이었다. 둑이 터질 듯 말 듯 한 그 찰나,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감춰두었던 기억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그 균열을 가로막았다.
-“어머니…….”
정말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의식적으로 잊으려 노력까지 했었던. 그런 것이 왜 지금 갑자기 떠오른 건지 모를 일이었으나, 아르문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축축한 공기. 그리고 하얀 꽃 사이에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날은 아르문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억울한 날 중 하나였다. 무려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이니 오죽하겠는가. 강인하게만 보였던 어머니가 너무나 쉽게 세상을 떠난 날. 아르문트는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내내 눈물을 흘려댔다. 아버지인 황제도, 연신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대던 귀족들도 모두 돌아가고 없었다. 오로지 적막만이 남아 어린 아르문트를 더욱 괴롭게 했다. 아니, 정말 적막만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방문자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쥔 순간, 그렇게 최악의 기억은 완성되었다.
-“안타까워라.”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인이 시야에 담겼다. 화려한 금발을 풀어 내리고,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미인. 한때는 어머니의 시녀이자 친구였으나, 제 아버지의 정부가 된 아르티나 모르트마르였다.
-“소중한 이가 먼 길을 떠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전하.”
자신을 향해 독사처럼 웃어 보이던 그녀를 본 그 순간, 아르문트는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앞으로 전하는 수많은 것을 더 잃게 될 테니까요. 그때마다 이렇게 울어대시면 어디 눈물이 남아나시겠습니까.”
아르문트는 우습게도 얼어붙었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그녀 앞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못 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피식. 그녀는 그런 그를 비웃더니, 불쌍하다는 듯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잘 기억해두세요, 전하.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그리움은 또 얼마나 공허한지……. 그 똑똑한 머리로 잘 새겨두어야 앞으로 헛된 꿈을 꾸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또 한 달이 지나며 그 의미를 점점 더 체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르티나가 새로운 황후 자리에 오르며 많은 것이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문트는 설 자리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은 고통은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져만 갔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뼈에 사무치도록 공허했다. 그녀가 저주한 대로 아르문트는 그 뒤에도 많은 것을 잃었고, 정을 주었던 것일수록 크게 아파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젠가 잃게 될 것에 정을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를테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될 눈앞의 하녀 같은 것.
“전하?”
로제타의 목소리에 아르문트가 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로제타는 특별했다. 그리고 그만큼 더 위험했다. 이미 너무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금 떠오른 기억은 경고였다. 순간의 감정에 빠져 헛된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 더 정을 주면 자신만 고통스러워질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는 죽을 몸이라며 그렇게 되뇌었는데도, 그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한 것이었다. 고작 확실하지도 않은 감정 하나 때문에.
“방금 무슨 말씀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로제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다.”
아르문트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잡고 있던 손도 반사적으로 놓아버렸다.
“……어젯밤 고생했을 텐데, 오늘은 이만 가봐.”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뛰고 있던 심장은 이제 불쾌하게 울렁거렸다.
“네.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는 신관님을 뵈러 갈게요.”
로제타는 갑작스럽게 뒤바뀐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아르문트가 평소처럼 변덕을 부린 거겠거니 여긴 것이었다. 신관. 그녀의 병세를 다시금 짚어주는 단어에 아르문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홱 몸을 돌리더니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
*** 로제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선 신전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방금 아르문트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다. 애칭을 부르며 손을 잡더니 멍을 때리질 않나, 그러다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질 않나. 광증 상태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면서, 그에 대한 반응이 그리 길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뭔진 몰라도 고민거리가 있는 게 확실했다.
‘신관 얘기를 꺼내면 바로 몸 상태를 물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로제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만약 그가 몸 상태를 묻는다면 어쩐지 요즘은 별로 아프지 않은 것 같다며 밑밥을 깔아놓으려 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자 괜히 마음이 답답했다.
‘이제는 내 건강에 관심이 없는 걸까? ……혹시 안 죽는다고 말해주면 싫어하는 거 아니야?’
돌연 떠오른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과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원래 아르문트가 얼마나 무뚝뚝한 사람이었는지 제일 잘 알기에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그에게 제 건강한 몸에 대해 말하려고 결심한 때 저런 반응이라니. 지금이라도 무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야 없다. 더 이상 늦장을 부렸다간 아르문트의 의심을 살 수도 있고, 아침에 테오도르 신관에게 방문하겠다고 연락까지 해두었으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전하가 내가 안 죽는다는데 싫어하진 않겠지!’
로제타가 라트랑제 의상실에서 자신 대신 화내주던 아르문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전에는 금방 도착했다. 테오도르 신관은 친절하게도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로제타 양. 이쪽입니다!”
“테오도르 신관님. 안녕하세요.”
테오도르 신관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안내했다. 신전 안쪽이 아니라 구석진 후원으로 향하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 대신관이 1 황자의 편에 선 지금, 안 그래도 눈 밖에 난 그가 황태자의 라인에 섰다는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기 때문일 테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검진해도 될까요?”
“죄송하긴요. 얼마든지요.”
날씨도 좋은데요, 뭐. 로제타가 그를 따라 야외 테이블 옆에 앉으며 덧붙였다. 그러곤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참, 전하께서 신관님에게 안부 전하라 하셨어요.”
“화,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요?”
“네. 아시다시피, 전하께서 신관님을 워낙 좋아하시잖아요. 종종 신관님 얘기를 하실 정도랍니다. 신관님 정도의 실력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면서요.”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아르문트가 테오도르 신관의 실력이 괜찮다 얘기한 적은 있긴 하나 딱히 따로 얘기를 꺼낼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의심 많은 아르문트가 그에게 먼저 다가갈 것 같지는 않으니, 현재 마음 둘 데가 없는 테오도르 신관이 아르문트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게끔 전략을 펼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오도르 신관은 또다시 무척 감동한 얼굴을 했다. 어딘가 결심한 것 같기도 했다.
‘좋아, 밑 작업은 끝났고.’
로제타가 그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본론을 꺼낼 시간이었다.
“저, 신관님. 저번에 들으셨다시피 제가 세타르를 조금 먹었거든요.”
“아, 예. 들었습니다.”
“그때 절 살펴보신 신관님이 제가 일주일도 안 돼서 죽을 거라 하셨는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몸이 좀 괜찮아졌어요. 예전에는 각혈도 하고 여러모로 안 좋더니 요즘은 왠지 가뿐해요. 그래서 말인데, 한번 어떤지 살펴봐 주시겠어요?”
“예. 확인해보겠습니다.”
테오도르 신관이 군말 없이 로제타의 손등을 짚었다. 하얀 속눈썹을 내리깔고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로제타는 흐뭇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그가 눈을 뜨자 빠르게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로제타 양! 이건, 이건 기적입니다!”
“네? 기적……이라뇨?”
로제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발레리안이 보았다면 최고로 가증스럽다며 손뼉을 쳐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로제타 양은 이제 시한부가 아니에요! 세타르가 다 해독되었습니다! 저번에 상처를 치료해줄 때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정말 독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 무서운 것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몽땅 사라지다니……! 이건 정말 기적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정확히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테오도르 신관이 잔뜩 흥분해서 목청을 키웠다.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방방 뛰기까지 했다.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처럼 기쁜 얼굴이었다.
‘전하도 저렇게 반응해주면 좋을 텐데.’
로제타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너무 좋아서 방방 뛰는 아르문트라니.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것도 나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무관심하게 반응하거나, 죽는 줄 알고 잘해줬더니 감히 안 죽냐며 화내는 것보다야 무엇인들 나았다. 그녀가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얼른 기쁜 표정을 지었다. 시한부가 아니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이 씁쓸해하고 있으면 이상할 테니까. 그녀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가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를 붉혔다. 하녀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연기가 제법 늘었다. 그리고 더더욱 그녀의 예상을 넘어선 반응이 이어졌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얼른 전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시죠!”
테오도르 신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안했다.
‘어라. 여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아르문트에게 언제 어떻게 소식을 알릴지 오늘부터 고민해보려 했는데, 지금 당장 말하자니.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