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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말하고 싶은 것 (50/145)

50화. 말하고 싶은 것2021.08.22.

16549573735101.jpg“세상에, 어찌 이렇게 기쁜 일이……! 전하께서도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얼른 가시죠!”

테오도르 신관이 들뜬 얼굴로 로제타를 재촉했다. 그는 로제타와 아르문트의 관계를 착각하고 있었다. 저번에 아르문트가 보여준 다정한 모습도 그렇거니와, 황궁에 떠도는 숱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녀에게 일어난 기적은 더욱 놀랍고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제국의 황태자와 시한부 하녀, 신분과 죽음마저 뛰어넘은 세기의 로맨스! 그야말로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상황이지 않은가. 그 황홀한 이야기에 자신의 지분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사실이 영광스러웠다. 그 탓에 그는 다소 과하게 흥분하고 말았다. 황태자 전하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굳이 자신과 동행할 이유가 없음을 까먹은 것이었다. 로제타는 부드럽고도 상냥한 어조로 그런 그를 진정시켰다.

16549573735106.jpg“저, 신관님. 죄송하지만 전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 테오도르 신관이 숨을 토해내듯 짧게 답했다. 잔뜩 상기되어 있던 얼굴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상황 파악이 되자 민망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오지랖을 부렸다는 걸 깨달았다. 연인 사이니만큼 이렇게 기쁜 소식은 따로 분위기를 잡고 전달하고 싶을 텐데, 거기에 끼어들려는 신관이라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을 나붓이 깔고선 침울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16549573735101.jpg“제가 죄송합니다, 로제타 양. 민망한 모습을 보였군요. 실례가 되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16549573735106.jpg“아니요, 실례는요.”

로제타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리바리한 청년의 모습이 풋풋하고도 귀여워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16549573735106.jpg“오히려 감사하죠. 신관님 덕분에 제가 살아났으니까요.”

16549573735101.jpg“제가 딱히 한 것은 없습니다만…….”

16549573735106.jpg“그리고, 제가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하시는데, 그게 무슨 실례겠어요. 가족도 그렇게까지는 안 해줄 것 같은걸요. 고마워요, 테오도르 신관님.”

그녀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족도 그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기사로 이름을 알리고 많은 돈을 벌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은 그녀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으니까. 아마 그녀가 정말 시한부였다고 해도 그들은 그리 슬퍼하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 자신의 무사를 기뻐해 준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만, 로제타는 내심 그 누군가가 아르문트이기를 바랐다. 아르문트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잘됐다, 한 마디 해주는 모습을 상상하자 순간 가슴이 간질거렸다.

16549573735106.jpg‘아무래도 요즘 내 심장에 문제가 있나 봐.’

로제타가 가슴 아래쪽을 슬며시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이상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저번 생까지만 해도 한 번도 없는 현상이었다. 혹시 네 번이나 회귀하며 심장에 이상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이왕 신관을 만난 김에 이것도 알아봐야겠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16549573735106.jpg“참, 신관님. 혹시 제 심장도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요즘 좀 과하게 뛰는 것 같아서요.”

16549573735101.jpg“방금 살펴보았을 때는 별 이상이 없었는데…… 어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테오도르 신관이 다시 그녀의 옆자리에 앉더니 조심스럽게 손등을 덮었다.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운 기운이 몸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로제타는 몸을 움찔거렸다. 몇 분 후 손을 떼어낸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49573735101.jpg“역시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다만…… 심장 부근의 마나 회로가 이상하게도 유독 넓게 트여 있군요.”

16549573735106.jpg“마나 회로가요? 심각한 건가요?”

로제타가 헉, 하고 놀라며 물었다. 이것 또한 연기였다. 마나 회로에 대해서는 이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심장 부근의 마나 회로가 트여 있는 것은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깨달음’을 얻은 자의 특징이었다. 지금은 첫 번째 깨달음을 얻은 상태이니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티가 날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는 반응을 보일 수야 없는 노릇이기에 로제타는 겁먹은 척 눈망울을 슬프게 껌뻑거렸다. 그녀의 명연기에 속아 넘어간 테오도르 신관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16549573735101.jpg“아니요, 안 좋은 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일반인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라 놀란 것뿐이었어요.”

그는 로제타가 깨달음을 얻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아주 특이한 체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지간한 기사도 평생토록 얻지 못하는 걸 한낱 하녀가, 그것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얻었으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16549573735101.jpg“어쨌든, 심장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불안한 게 있으면 종종 그럴 수 있어요. 혹시 모르니 다음번에는 어떤 상황에 유독 심장이 빨리 뛰는지 기록을 해두세요. 연관성을 찾으면 이유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16549573735106.jpg“네, 감사해요, 신관님.”

과연 테오도르 신관은 그녀가 만난 그 어느 신관보다 친절했다. 황태자의 정부라고 생각해 괜한 아부를 하거나, 반대로 고작 하녀라며 하대하지도 않았다. 로제타는 얼른 그가 아르문트의 편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49573735106.jpg“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16549573735101.jpg“아, 네. 조심히 가세요.”

테오도르 신관도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했다. 방금 오지랖을 부렸던 것의 여파가 남아 있는지 아직도 살짝 멋쩍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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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길. 로제타는 멍하니 걸으며 테오도르 신관의 조언을 되새겼다.

16549573735106.jpg‘연관성이라.’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너무 자주 있던 일이다 보니 그 모든 사례를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16549573735106.jpg‘아니면 역시 불안해서?’

이게 가장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생에 들어 유독 미래가 바뀐 모습에 밤마다 불안감이 밀려들기는 했으니까. 뭐, 정답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잘 살펴보면 되는 일일 테다. 로제타는 단순하게 결론지으며 아르문트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르문트가 오늘은 쉬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의 일정이 많은 날도 아니니 제 방에서 그의 기척을 살피며 호위를 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당장 아르문트를 만나고 싶었다. 전하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라고 말하던 테오도르 신관의 말에 기대감이라도 품은 것처럼.

16549573735106.jpg‘내가 준 커프 링크스를 잘 끼고 있나 확인해볼 겸 가는 거지. 내일 발레리안을 보러 가려면 휴가 승인도 받아야 하고.’

로제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애써 다른 이유를 찾아냈다. 실제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내일은 발레리안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휴일에 친구를 만날 예정이라고 아르문트에게 언급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승인을 받지는 않았다. 어제 워낙 일이 많았기에 그럴 새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아마 별 무리 없이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아르문트는 그런 것에 인색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걱정인 것은 과연 그녀가 없는 동안 아르문트가 마법 물품을 잘 지니고 다닐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매일 끼고 다니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영 믿음이 가질 않았다. 어제는 용케도 계속 끼고 다니긴 했지만, 과연 오늘도, 내일도 그럴까? 로제타가 찝찝한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로제타는 익숙하게 리처드에게 인사를 건넨 후 노크했다.

16549573735106.jpg“전하. 로제타예요.”

16549573794335.jpg“……들어와.”

어쩐지 평소와 달리 대답이 느렸다. 목소리도 퍽 가라앉은 상태였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어젯밤 자신에게 민망한 말을 했다는 걸 알려준 이후로 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았다. 창피해서 그러나? 고작 그런 이유로 기분 나빠할 사람은 아닌데. 로제타는 의아해하며 그의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몇 걸음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16549573794335.jpg“무슨 일이지? 오늘은 이만 쉬라고 했을 텐데.”

16549573735106.jpg“신관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르문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왔는데도 시선 한 줌 건네지 않았다. 꼭 첫 만남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16549573794335.jpg“……말해.”

그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신관을 만나고 왔다고 직접 언급까지 했는데도 그녀의 상태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다. 신관은 잘 만나고 왔냐, 무어라 하던가, 상태는 좀 괜찮으냐, 하고 시시때때로 질문하며 그녀를 곤란하게 했었던 것이 고작 얼마 전이거늘. 막상 얘기하려니 무관심해진 그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평소처럼 간질거리는 대신 어딘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었다. 심장에 멍이 든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로제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도 함께 욱여넣었다.

16549573735106.jpg“내일 하루 휴가를 좀 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녀가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르문트가 일순 몸을 움찔했다. 도서관 데이트 후에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휴일에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었지.

16549573794335.jpg‘그것도 남자인 친구와.’

가지런한 눈썹이 슬쩍 휘어졌다. 쓸데없는 질문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채웠다. 그는 로제타에게 묻고 싶었다. 그 친구라는 자식과 언제 어디서 만나서, 무얼 할 생각인지. 그러나 그중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질문은 한 가지도 없었다. 로제타가 누구와 무얼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슴 속에 떠오른 감정을 모른 척하는 것은 이쪽이 더 심했다. 그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단단히 붙어있던 입술을 억지로 떼어냈다.

16549573794335.jpg“그래. 편히 쉬다 와.”

16549573735106.jpg“감사해요, 전하. 저,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16549573794335.jpg“부탁?”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소매를 흘끔 쳐다보았다. 아르문트는 정말 오늘도 그녀가 준 커프 링크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매일 끼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그걸 보니 이상한 심장 통증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16549573735106.jpg“내일 제가 황궁을 나가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제가 없을 때도 그 커프 링크스, 계속 착용해주실래요?”

오늘치 소원이에요. 로제타가 행여나 아르문트가 거절할까 재빨리 덧붙였다. 책을 빤히 내려다보던 아르문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책 따위 아까부터 단 한 단어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그녀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들고 있는 물건일 뿐이다. 무언가를 읽는 척 시늉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시야 끝자락에 담긴 그녀의 희미한 인영에 집중하기 바빴다.

16549573735106.jpg‘제가 없을 때도.’

  고작 이 세 마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앞으로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말만 들어도 이 지경인데 더 정을 주었으면 어쩔 뻔했나. 아르문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자신의 선택을 두둔했다. 분명 자신은 옳은 결정을 했는데도, 여전히 기분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16549573794335.jpg“……그래, 약속하지.”

그는 가장 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16549573794335.jpg“네가 없을 때도. 계속 끼겠다고…… 약속하마.”

근육이 탄탄히 박인 팔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책에 가려진 얼굴은 보는 사람마저 우울해질 정도로 어두웠다. 이러한 얼굴을 보지 못한 로제타는 또다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적어도 그가 위험할 걱정은 덜었다.

16549573794335.jpg“할 말은 끝났나? 그럼 이만 가서 쉬어.”

16549573735106.jpg“네. 가볼게요.”

로제타가 느릿하게 뒤를 돌아 문으로 향했다. 그를 찾아온 목적은 모두 달성하였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직 끝내지 못한 것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16549573735106.jpg“후우.”

몇 걸음 채 떼지도 못해서 로제타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홱 몸을 돌려 아르문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흘끔거리던 아르문트가 깜짝 놀라 다시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온 로제타가 책 위로 제 손을 얹었다.

16549573735106.jpg“전하.”

당황한 아르문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야에 그녀의 단호한 얼굴이 담겼다.

16549573735106.jpg“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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