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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옷장 안의 남녀 (51/145)

51화. 옷장 안의 남녀2021.08.26.

황태자가 읽고 있던 책을 힘으로 누르고 억지로 시선을 맞추다니. 다른 하인이나 기사가 보았더라면 놀라 뒤로 넘어갈 정도로 겁 없고 무례한 짓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이를 지적하거나 눈앞의 하녀를 벌하기는커녕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그녀의 얼굴이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짜 미친 건가. 아르문트가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자신의 멍청이 같은 꼴을 혹시라도 누가 볼까 겁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제대로 보게 된 그녀의 얼굴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중증도 이만한 중증이 따로 없군. 아르문트가 자신의 한심함을 탓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겨우 입을 열었다.

16549574443828.jpg“뭐길래 이러는 건가?”

16549574443834.jpg“……지금은 못 말하겠어요. 휴일 지나고 와서 말씀드릴게요. 적어도 전하께서 제 시선을 피하지 않으실 때요.”

로제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르문트로서는 어이없는 소리였다. 할 말이 있다고 제 책까지 눌러놓고, 지금은 못 말하겠다니. 이렇게 분위기를 잡을 정도면 심각한 것이리라.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까지 했으니 확실하다. 어쩌면, 제 마음을 제대로 고백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아르문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물었다.

16549574443828.jpg“뭔데. 말해봐.”

그가 멀어지려는 로제타의 옷깃을 슬며시 붙잡았다. 이렇게 재촉하면 당연히 대답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16549574443834.jpg“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모레 아침에는 들어올 거예요.”

로제타는 상큼하게 웃으며 아르문트의 요청을 거부했다. 누가 황태자고 누가 하녀인지 모를 태도였다.

16549574443828.jpg‘잠깐, 모레 아침?’

아르문트가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 저녁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모레 아침에 온다고? 어디서 자고 오려는 건가? 설마 쓰레기 같은 남작가에 돌아갈 리도 없고. 이 또한 자신이 질문할만한 내용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차마 참을 수가 없었다.

16549574443828.jpg“내일은 어디서 묵으려는 건데?”

로제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씩 미소 짓기만 했다. 아르문트의 눈썹이 거칠게 휘어지고 나서야 한마디 대답이 나왔다.

16549574443834.jpg“글쎄요.”

세상에 어떤 하녀가 황태자의 질문에 글쎄요 따위의 대답을 한단 말인가? 아르문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로제타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16549574443834.jpg“그런 것까지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죠. 사생활이잖아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아주 청아하니 고왔다. 그래서 더 속이 막혔다. 사생활도 맞고, 아무리 주종관계라도 말하지 못할 내용이 있는 것도 맞지만, 아르문트를 매시간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자 입이 쩍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는 날 좋아하잖아!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을 모른 척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16549574443834.jpg“안전한 곳에서 잘 거니까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럼, 명령하신 대로 이만 쉬러 가보겠습니다! 전하는 책 재밌게 읽으세요!”

로제타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쉬러 가라고 말한 걸 이제 와서 써먹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아르문트가 낯빛을 일그러뜨린 채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어 입술만 달싹거리는 그였다.

16549574443834.jpg‘흥,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네.’

그가 답답해하는 꼴을 보니 자신의 답답함이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말하려다 만 것보다 내일 어디서 자는지를 더 궁금해하는 까닭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르문트가 당황스러워한다면 그걸로 족했다. 로제타는 코웃음을 치며 미련 없이 뒤돌아 갔다. 그녀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기 직전, 아르문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16549574443828.jpg“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로제타가 슬쩍 돌아보자 애써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가에서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다.

16549574443828.jpg“설마,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와…….”

아르문트는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말하던 도중에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든 탓이었다. 아무리 로제타가 자신의 하녀라고 해도 다 큰 성인이거늘, 할 소리가 있고 못 할 소리가 있지. 이딴 걸 질문이라고. 그가 창피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런 그에게 해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49574443834.jpg“와,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 내일 친구네 집에서 자려는 거.”

말 그대로 그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소리였다. 아르문트는 경직된 상태로 침묵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그녀의 발음이 너무 또렷했다. 로제타는 폭탄 같은 말을 던져놓고선, 마치 꽃다발을 던진 양 해맑게 미소지었다.

16549574443834.jpg“그럼 쉬세요!”

탁! 그녀가 망설임 없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리고 방에 홀로 남은 아르문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서 닫힌 문을 응시했다.

16549574443834.jpg-“어떻게 아셨어요? 저 내일 친구네 집에서 자려는 거.”

  로제타가 남기고 간 목소리만이 메아리로 남아 북을 때리듯 연신 그의 귓가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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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제타는 혹시 아르문트가 찾아와 그녀의 무례를 지적하고 황궁에서 쫓아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단 한 번 마주치지도 않고 무난히 하루가 지나갔다.

16549574443834.jpg‘죽을 때까지 전속 하녀로 임명한다는 계약 때문이겠지.’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정작 아르문트는 다른 쪽에 집중하느라 바빠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로제타를 찾아가 그녀가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자존심상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 탓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다행히 이틀 연속으로 광증이 발현되는 경우는 잘 없는 모양인지,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음에도 그날 밤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느긋하게 일어난 로제타는 발레리안을 만나러 갈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하녀복을 입으려고 하였으나, 작은 옷장을 꽉꽉 채운 새 원피스들을 보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16549574443834.jpg‘기껏 사준 건데 한 번도 안 입는 건 좀 그렇지.’

오랜만에 발레리안과 따로 시간을 보내는 날이기도 하고, 그의 체면도 있으니 적당히 차려입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아르문트는 다른 남자를 만날 때 입을 줄 알았다면 옷을 이토록 많이 사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로제타는 제 주군의 선물을 유용하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원피스를 꺼내입었다. 맑은 진주로 장식된 연하늘색 원피스는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과연 로젠다이엠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발레리안이 있으니 그녀가 따로 전투할 일도 없을 터. 그렇기에 로제타는 머리도 묶지 않았고 남는 시간에 멜라니가 준 화장품도 한번 발라보고, 액세서리도 껴봤다.

16549574443834.jpg“오.”

방에 걸린 작은 거울로 모습을 확인한 로제타가 작게 감탄했다. 제가 보기에도 제법 예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완벽한 데이트룩이 완성되었다. 약간 민망했지만, 발레리안이라면 분명 좋아할 걸 알았기에 로제타는 그 차림 그대로 방을 나섰다.

16549574472737.jpg“우와, 로제타! 오늘 뭐야? 누구 만나? 장난 아니다!”

16549574472737.jpg“헉, 로지……! 너 혹시 여자친구 자리 비어 있니?”

로제타와 친한 하녀 몇몇이 그녀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기사들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멍하니 쳐다만 봤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웬만한 귀족 영애들보다 훨씬 예쁜 것 같아.”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들렸다. 이런 관심이 익숙지 않은 로제타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16549574472737.jpg“로제타?”

다급히 걸음을 옮기던 도중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붉은 머리의 기사, 러크가 보였다.

16549574472737.jpg“맙소사, 로제타 맞아? 난 또 천사가 강림한 줄 알았잖아!”

리처드가 보면 뒤집어지겠는데. 러크가 입을 쩍 벌리고 덧붙였다.

16549574443834.jpg“러크 경. 교대할 시간 지나지 않았나요? 지각하신 와중에 여유도 부리시고, 대단해요.”

로제타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말씨와 달리 그 내용에는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한 러크가 힉, 신음하더니 자신은 리처드에게 죽었다며 다급히 뛰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참 허술하고 바보 같았다.

16549574472737.jpg“참, 리처드한테 천사를 봤다고 자랑해도 되지?”

16549574443834.jpg“마음대로 하세요!”

끝까지 장난스럽게 소리치는 러크의 목소리에 로제타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는 가끔 쥐어박고 싶기는 해도 어쩐지 밉지는 않은 캐릭터였다. 마침내 러크에게서 자유로워진 로제타가 외출증을 받고 황태자궁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가 향하는 곳은 밖이 아니었다. 그녀는 본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발레리안이 느닷없이 연락해 그러라 했기 때문이었다.

16549574443834.jpg‘뜬금없이 대낮에 전서구를 보내다니. 누가 의심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로제타가 혀를 쯧쯧 찼다. 마법으로 만든 전서구라 아무에게나 보이지는 않겠지만 황궁이니만큼 위험한 행동이었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는 않은 듯했다. 아르문트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16549574443834.jpg‘그나저나, 내일은 정말 말해야겠네.’

아르문트를 떠올리자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에게 제 상태를 털어놓을 생각을 하니 불안했다. 갑자기 바뀐 태도 때문이었다.

16549574443834.jpg‘왜 갑자기 쌀쌀맞아지고 난리야? 내가 뭘 했다고.’

로제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성심성의껏 모셨건만 갑자기 태도를 바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르문트를 욕하며 걸음을 옮겼다. 매일 오가던 길이다 보니 얼마 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금방 도착했다. 똑똑. 로제타가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16549574443834.jpg‘뭐야?’

그녀는 실눈을 뜨고 연구실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제타가 올 시간에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울 발레리안이 아니다. 설사 병에 걸린 황제가 불렀다고 해도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 움쩍 않고 버텼을 것이다. 이는 즉, 발레리안이 안에 숨어 있다는 의미였다.

16549574443834.jpg‘어휴, 또 장난치나 보네.’

장난기가 많은 발레리안은 가끔 그녀를 불러놓고 어딘가에 숨어 있고는 했다. 어렸을 적부터 하던 짓을 어쩜 아직도 변함없이 하는지. 로제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은 열려 있었다. 다만 외부인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작은 결계를 쳐놓은 모양이었다.

16549574443834.jpg“발레리, 그만하고 나오지?”

로제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최대한 집중해서 기척을 느끼려 해봤으나 과연 대마법사는 대마법사였다. 아직 소드마스터가 되지 못한 스무 살의 그녀는 작정하고 숨은 그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16549574443834.jpg“나오라고 했다-!”

짐짓 화난 척을 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이럴 때면 아주 황소고집이었다. 가만히 기다리면 절대 나오지 않을 걸 알기에, 로제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숨을만한 곳을 손수 살펴보았다. 문 뒤, 태피스트리 뒤, 침대 밑 등등 어렸을 적 자주 숨던 곳을 확인했으나 발레리안은 없었다. 하긴, 지금은 너무 커다래져서 애초에 그런 곳에는 숨을 수 없을 테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하나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옷장. 어린 시절 발레리안이 가장 즐겨 숨던 곳이기도 하고, 성인 두 명이 들어가도 거뜬할 정도로 커다라니 이보다 더 확실할 수가 없었다. 로제타는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옷장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을 귀찮게 한 복수로 그를 놀라게 해줄 작정이었다. 그리고 옷장 문을 벌컥 열어젖히려는 순간이었다.

16549574443834.jpg“으앗!”

예상 못 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힘을 제대로 주기도 전에 옷장 문이 먼저 열린 것이다. 깜짝 놀란 로제타가 뒤로 넘어지려 하자,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끌어당겼다. 탁! 반동에 의해 다시 옷장 문이 닫혔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옷장 안에는 두 남녀가 흐트러진 차림으로 엉켜 있었다.

16549574526443.jpg“내 로즈, 좋은 아침.”

그녀를 끌어안은 발레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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