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분노한 발레리안 (52/145)

52화. 분노한 발레리안2021.08.29.

이건 또 뭐 하는 짓이야? 로제타가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치켜뜨고 발레리안을 응시했다. 발레리안은 늘 그렇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어두운 옷장 속에서 화려한 금발을 이리저리 흐트러트린 채 예쁘게 미소 짓는 얼굴이 능청스러웠다.

16549574605678.jpg“오늘도 예쁘네, 로즈.”

그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깍지를 껴왔다. 간지러운 촉감에 로제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16549574605684.jpg‘이게 또 미인계를.’

행여나 장난이 과했다고 혼이 날까 봐 미인계를 쓰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로제타는 항상 그래왔듯 그 전략에 속절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수십 년을 봤지만, 과연 질릴 새가 없는 얼굴이다. 그녀가 감탄했다. 짜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누그러졌다. 이를 눈치챈 발레리안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로제타는 한결같기도 하지. 그가 이렇게 속삭이며 그녀에게 제 몸을 조금 더 밀착했다. 눈 깜짝할 새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코끝이 금방이라도 스칠 것 같은 거리였다.

16549574605684.jpg“발레리, 뭐 하는……!”

정신을 차린 로제타가 그를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마나가 그녀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피부가 간질거리면서도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이 느낌. 로제타가 아는 마법이었다. 화악! 찬란한 빛이 옷장 안을 가득 채우더니 이내 점멸했다.

16549574605696.jpg

  미리 눈을 감고 있던 로제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빙글빙글 웃고 있는 발레리안과, 방금과는 어딘가 달라진 옷장 내부의 모습이 담겼다.

16549574605684.jpg“여기는…….”

로제타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일순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의 부작용이었다. 발레리안은 그녀가 하려던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곤, 옷장 문을 열며 대답했다.

16549574605678.jpg“응, 우리 집이야.”

문이 열리자 황성 내 발레리안의 연구실 풍경 대신 다른 모습이 보였다.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침실. 커다란 통창 너머로 보이는 초록빛 자연. 발레리안의 타운 하우스였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황성 내에 집으로 연결된 포털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로제타가 입을 쩍 벌렸다. 걸렸다가는 최소 사형감인 짓이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작 발레리안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느긋하게 옷장 밖으로 걸어나가며 말을 이었다.

16549574605678.jpg“아무래도 하녀인 네가 황성 밖으로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한번 만들어봤어. 어때, 편하지?”

로브를 펄럭이며 나간 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칭찬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제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곧 손을 잡고 일어섰다.

16549574605684.jpg“편하긴 한데…….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16549574605678.jpg“안 걸리면 그만이지.”

발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로제타의 눈초리가 이어지자 재빨리 부연했다.

16549574605678.jpg“만약 걸려도 뭐. 별문제는 없을 것 같은걸.”

나니까. 발레리안이 여우처럼 눈매를 휘며 덧붙였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즉결처형당할 일이겠지만, 발레리안이라면 어영부영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같은 인재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설령 넘어가고 싶지 않더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강의 마법사로 불리는 그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사람을 끌어모아 겨우 상대한다고 해도 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태연함의 이유를 알게 된 로제타가 쯧쯧 혀를 찼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소파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16549574605684.jpg“어휴, 잘났다. 잘났어, 그래.”

16549574605678.jpg“응, 맞아. 나 잘났어. 칭찬 고마워.”

16549574605684.jpg“으이구, 뻔뻔하기는. 잘난척하지 말고 얼른 커피나 끓여와!”

그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등을 기대며 명령했다. 누가 보면 집주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당당한 태도였다. 누가 더 뻔뻔한지 원. 발레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의 눈에는 로제타의 이러한 면모 또한 매력으로만 보였다. 발레리안이 허공에서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전자 안에 있는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고, 나무 상자에 담겨 있던 커피콩은 하늘로 둥둥 떠올랐다. 이곳, 발레리안의 타운 하우스는 그야말로 대마법사의 공간이었다. 모든 물건은 그의 마나에 반응해 움직였고, 집 주위로는 어지간한 마법사도 뚫을 수 없는 결계가 쳐져 있었다. 손을 한번 휘저으면 밥이 나오고 디저트가 나오는 환상적인 공간이자, 혹 말이 새어나갈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 그렇기에 로제타는 이곳을 자신의 집보다도 훨씬 편안하게 여겼다.

16549574605678.jpg“그래서, 로제타. 오늘 나 본다고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온 거야? 기쁜걸.”

발레리안이 금세 완성된 커피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의 눈에 그녀야 늘 예쁘긴 하지만, 이렇게 차려입은 모습은 워낙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16549574605684.jpg“으응, 뭐. 그렇지.”

로제타가 어정쩡한 얼굴로 긍정했다. 그러자 발레리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공들여 치장했다는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었다. 잘 착용하지 않던 액세서리하며, 처음 보는 옷까지. 발레리안이 감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옷이 그녀의 돈으로 사기에는 다소 비싸 보인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같이 쇼핑을 나가자더니 갑자기 취소한다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며 불길함은 더욱 깊어졌다.

16549574605678.jpg“……혹시, 오늘 옷을 사달라더니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그 새로운 옷과 관계있어?”

얌전히 커피를 마시던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16549574605684.jpg“응, 맞아. 전하가 저번에 커프 링크스 준 거 고맙다고 옷을 여러 벌 사주셨거든. 이것도 그중 하나고.”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발레리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연신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남자가 준 옷을 입고 나를 만나러 오다니.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제타의 옷을 훑어보았다. 진주로 장식된 연하늘색 원피스는 척 보기에도 질이 좋아 보였고, 로제타와도 퍽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16549574605678.jpg“내가 더 좋은 거로 사줄게.”

16549574605684.jpg“응? 아니야, 괜찮아. 이미 충분해.”

16549574605678.jpg“싫어. 사줄 거야.”

발레리안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49574605678.jpg“그러니 앞으로는 내가 사준 걸 입어.”

로제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쓸데없는 데서 기분 나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 말해봤자 계속 고집을 부릴 거란 걸 알았기에 그녀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16549574605684.jpg“알았어, 알았어. 참, 발레리. 저번에 말했던 마법 물품은 어떻게 돼가? 독을 검출하는 용.”

16549574605678.jpg“……아직은 실험 중이야.”

발레리안이 한쪽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녀가 말을 돌리려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뚱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16549574605678.jpg“알다시피, 독 종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한 가지 마법 물품으로 전부 검출하기는 어려워. 독 개발 속도가 워낙 빠르기도 하고.”

로제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현재 아르문트가 독성 확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다른 대마법사가 꽤나 공들여 만든 마법 물품이었다. 그런데도 세타르를 잡아내지 못했으니, 사실상 모든 독을 검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16549574605678.jpg“그래도 지금 황태자가 쓰는 것보다는 검출 범위가 넓은 정도로는 가능해. 조금씩 늘려가는 식으로라도 해볼게. 아마 며칠 내로 하나 완성할 것 같은데, 네가 주는 건 이상할 테니 내가 직접 가져다줄게.”

그러니까 표정 풀어. 발레리안이 이렇게 덧붙이며 그녀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로제타가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저번 회차보다 개발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발레리안이 저번보다 더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16549574605684.jpg“항상 고마워, 발레리안. 역시 발레리가 최고야.”

그녀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미간을 만지던 손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 꼬옥 감싸쥐었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움찔 몸을 떨었다. 분명 몇 달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얼굴인데 무언가 달랐다. 그 안에 담긴 정신이 바뀌어서 그런지, 그녀의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뜨끈해지는 기분에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쩐지 맞잡은 손이 신경 쓰였다. 방금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껴안기도 했으면서. 이상한 일이었다.

16549574605678.jpg“저번에 말했던 저주 얘기는 뭐야?”

발레리안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로제타와는 달리 아주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16549574605684.jpg“아, 그건…….”

로제타가 그의 손을 놓아주며 대답을 망설였다.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가 고민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증은 제 주군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아무리 그를 위해서라고 해도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은 망설여졌다.

16549574605684.jpg“아무래도 누가 전하께 저주를 건 것 같아.”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략적으로나마 얘기해서 조언을 구해볼 심산이었다.

16549574605684.jpg“저주인지, 아닌지 사실 확실한 건 아니야. 그냥 내 직감이 그래.”

아직 아르문트의 광증에 대해 밝혀진 것은 없다. 저주라고 단정 지을 증거도 전무하다. 그러나 왠지 로제타는 그게 병이 아닌 저주일 것만 같았다.

16549574605678.jpg“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발레리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로제타의 직감이 틀리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16549574605678.jpg“알잖아, 때로는 직감이 가장 중요한 거.”

그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직감은 일반인의 직감과 그 결이 다르다. 로제타처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라면 특히나 그렇다. 실제로 로제타도 직감에 따라 많은 결정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직감이 그렇게까지 확실하지 않다는 거였다.

16549574605684.jpg“대신관이 예전부터 전하의 몸을 살펴보긴 했지만, 1 황자쪽으로 넘어간 이상 그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그나마 믿을만한 신관이 다시 살펴보기는 했는데…… 딱히 유의미한 결과는 못 얻었어.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

흠. 발레리안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민했다. 정화마법은 영 재능이 없는 그인지라 저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지 못했다. 그래도 로제타를 만나기 전에 열심히 조사해둔 덕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16549574605678.jpg“아직 그 신관이 저주를 발견할만한 능력이 안 되거나……. 아주 오래된 저주라면 몸에 이미 녹아들어서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어.”

16549574605684.jpg“증상이 나타난 건 3년 전이니,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16549574605678.jpg“아니. 저주도 독처럼 종류가 다양해. 곧바로 증상이 드러나는 게 있는가 하면, 한참 후에 나타나는 것도 있지. 3년 전에 증상이 나왔다고 해도, 저주에 걸린 시기는 특정할 수 없다는 얘기야.”

로제타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상황이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도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6549574605678.jpg“일단은 그 믿을만한 신관에게 계속 치료를 받으라 해. 어떤 저주인지는 몰라도, 신성력이 꾸준히 들어오면 어느 정도 중화는 될 테니까. 저주의 종류와 매개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16549574605684.jpg“매개?”

16549574605678.jpg“보통 강한 저주는 한두 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거든. 작은 매개들을 통해서 꾸준히 쌓아가는 거지. 다만 그 매개에 담긴 저주가 너무 옅다면 확인하기 쉽지는 않아. 아, 저번에 극소량의 독이 검출된 꽃처럼 말이야.”

독이 묻은 꽃. 그것 때문에 하마터면 아르문트가 호수에 빠져 죽을 뻔했다. 이를 떠올리니 로제타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16549574605678.jpg“정확히 누구 짓인지는 몰라도, 침대 옆에 독이 묻은 꽃을 둘 능력은 있다는 거야. 저주가 담긴 물건도 마찬가지겠지. 황태자 주변을 잘 살펴보는 게 좋을 거야.”

16549574605684.jpg“……응, 그럴게.”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전하의 주위에 자신도 모르게 저주의 매개가 놓여 있을 수 있다니. 더욱 문제는 여전히 이를 확인하거나, 갈아엎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루빨리 테오도르 신관이 강해지도록 지원하는 것뿐이었다.

16549574605678.jpg“1 황자쪽은 계속 주시하고 있긴 한데, 아직 별다른 건 없어.”

말을 마친 발레리안이 커피로 목을 축였다. 길게 얘기하다 보니 목이 따끔거리는 모양이었다. 한편, 1 황자 그레이한이 언급되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16549574714977.jpg-“예쁜아, 얌전히 굴어. 그럼 귀여워해 줄 테니.”

  그 느끼한 목소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발견한 발레리안이 귀신같은 눈치로 질문했다.

16549574605678.jpg“……로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로제타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발레리안에게 그때 일을 들켜서 좋을 게 없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49574605684.jpg“아니야, 무슨 일은.”

16549574605678.jpg“있었잖아. 말해.”

그러나 갈고닦은 연기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사이이니 당연했다.

16549574605684.jpg“별거 아니야.”

16549574605678.jpg“그 별거 아닌 게 뭐냐고.”

발레리안이 사나운 표정으로 그녀를 추궁했다. 말해주지 않으면 평생 따라다니며 질문할 기세였다. 휴. 또다시 한숨을 내쉰 로제타가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74605684.jpg“그냥…… 저번에 그놈이 날 덮치려 했거든.”

물론 실패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녀가 행여나 발레리안이 눈이 뒤집힐까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그의 눈은 뒤집히고도 남은 상태였다. 그림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고, 푸른 눈동자 위로 살기가 휘몰아쳤다.

16549574605678.jpg“그 새끼가, 뭘 해?”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흉흉한 목소리에 로제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654957474153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