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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뽀뽀한 게 부끄러워서 (53/145)

53화. 뽀뽀한 게 부끄러워서2021.09.02.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 테이블 위에 있던 예쁜 커피잔, 둥근 형태의 전신 거울까지. 모두 발레리안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에 의해 조각나고 만 것이었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아늑하던 집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범인, 발레리안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형견처럼 귀여운 모습은 씻은 듯 사라졌다. 로제타는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너무나 뻔했다. 분명 그레이한을 산 채로 묻어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녀의 예측은 정확했다. 발레리안은 눈에 불을 켜고 그레이한을 암살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를 죽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아무도 모르는 새 죽여버리고 사고로 위장하면 그만이다.

16549574810702.jpg‘아니, 그렇게 쉽게 죽여줄 순 없지.’

감히 로제타에게 손을 댄 새끼를 편안히 죽게 둘 수야 없다. 발레리안이 아름다운 얼굴로 온갖 끔찍한 고문 방식을 떠올렸다. 그레이한을 납치한 후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손봐주는 데까지 생각했을 즈음이었다.

16549574810709.jpg“발레리.”

로제타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상념을 끊어냈다.

16549574810709.jpg“너 지금 무서운 생각하지.”

16549574810702.jpg“아니, 전혀.”

발레리안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긋 미소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는 그레이한에 대한 살기가 가득했다.

16549574810709.jpg“다 보이거든. 이거 입꼬리 험악하게 올라간 거 봐. 어휴. 그런 생각하지 마!”

로제타가 다 알고 있다며 혀를 찼다. 그를 오래 봐온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안만큼 눈치가 빠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웬만한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대답 대신 비뚜름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로제타는 핏줄이 불거진 팔뚝을 약하게 찰싹 때리며 말을 이었다.

16549574810709.jpg“발레리, 물론 네가 뛰어나긴 하지만……. 마법도 다 흔적이 남는 거 알잖아. 들키기라도 하면 너 바로 도망자에 떠돌이 신세야.”

16549574810702.jpg“우리 로즈랑 함께라면 떠돌이 신세도 나쁘진 않지.”

16549574810709.jpg“누가 같이 가준대?”

로제타가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발레리안이 작게 웃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떠돌이 신세가 될지언정 그 쓰레기 자식을 가만둘 수 없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이를 눈치챈 로제타가 회유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켰다.

16549574810709.jpg“난 정말 괜찮아. 전하께서 금방 도와주셔서 별일 없었어. 게다가, 내가 당하고만 있을 성격 아닌 거 너도 알잖아?”

16549574810702.jpg“글쎄. 잘 모르겠는데.”

16549574810709.jpg“스무 살의 로제타는 어땠는지 몰라도, 네 번이나 회귀한 로제타는 그래.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줄 거야. 다만, 합법적인 방법으로.”

굳이 도망을 칠 필요가 없게끔 말이야. 로제타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16549574810702.jpg“합법적인 방법이라……. 알았어.”

발레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돌아가야 하지만 로제타가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장 그레이한에게 복수할 수 없는 것이 영 못마땅한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선 마법을 써 깨진 유리를 정리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로제타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새삼 지금의 발레리안이 어리다는 것이 실감 났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주변을 박살 내는 행동하며, 표정 관리를 잘 못 하는 것까지. 서른둘의 발레리안이라면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다.

16549574810709.jpg‘지금 나이가…… 스물둘이었지. 아기다, 아기.’

몸만 다 컸지 아직 정신은 한창 어릴 나이였다. 로제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바라보듯 발레리안을 쳐다보다, 이내 결심한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16549574810709.jpg“좋아. 둘이서 시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인데, 이렇게만 있지 말고 어디 나가자!”

16549574810702.jpg“지금? 어딜?”

16549574810709.jpg“어디든! 발레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로제타가 밝게 웃으며 발레리안을 일으켰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기껏해야 시내에 나가는 정도를 생각했다. 발레리안이 쇼핑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16549574810702.jpg“어디든, 이라.”

나지막이 중얼거린 발레리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눈매도 여우처럼 휘었다. 이를 발견한 로제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쩐지 직감이 좋지 않았다. 저건 발레리안이 계략을 꾸밀 때나 짓는 표정이기 때문이었다.

16549574810702.jpg“좋아, 가자.”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쥐었다. 옷장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깍지까지 껴오는 그였다. 곧 그의 마나가 로제타의 몸을 휘감았다. 공간이동 마법의 징조였다.

16549574810709.jpg“자, 잠깐! 발레리, 어딜 가려는 거야?”

로제타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포털도 없이 공간이동이라니. 아주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공간이동 자체가 워낙 어려운 마법인 데다 리스크도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발레리안은 고작 나들이를 가기 위해 그 위험한 마법을 쓰려고 하고 있었다. 제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마나 낭비가 심하지 않나.

16549574810702.jpg“어디든 따라오겠다며. 거짓말이야?”

16549574810709.jpg“거짓말은 아니지만…….”

16549574810702.jpg“그럼 얌전히 안겨, 로즈.”

나 믿지? 그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다른 팔로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왔다. 어휴. 한숨을 내쉰 로제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16549574810709.jpg“응, 믿어.”

그리고 환한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세상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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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았다 뜨자 보인 것은, 새파란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몽글몽글한 구름이었다.

16549574810709.jpg‘잠깐, 하늘?!’

로제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잘못 본 거면 좋으련만, 정말 하늘이 보였다. 발레리안이 하늘 위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었다.

16549574810709.jpg“꺄아악!”

경악할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바람이 제 얼굴을 때리는 것을 느끼며 로제타가 비명을 내질렀다. 저 장난 심한 놈을 믿다니, 내가 미쳤지! 그녀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후회했다. 세찬 바람을 맞아 눈물이 고이는 탓에 시야가 희미했지만, 자신이 땅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마구 펄럭거리는 머리카락과 원피스가 그 증거였다. 아니, 다시 보니 땅은 아니었다. 그녀가 떨어지고 있는 곳은 하늘보다도 더 파란 바다였다. 땅이든 바다든 이대로 떨어졌다간 좋지 않은 결과가 기다리라는 것은 같았다.

16549574810702.jpg“로즈, 꽉 잡아.”

발레리안이 그녀의 등을 강하게 그러안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로제타와는 달리 여유로운 미소까지 입가에 걸친 그였다. 로제타가 살기 위해 그의 몸을 꽉 껴안았다. 발레리안이 마법을 썼는지 점차 낙하하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수면이 너무 가까운 탓에 빠지는 건 피할 수 없을 모양새였다.

16549574810709.jpg‘어차피 물에 빠질 거 그냥 하녀복이나 입고 올걸!’

괜히 새 옷만 망치게 생겼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물을 먹지 않기 위해 입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남녀의 몸이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풍덩! 커다란 소리와 함께 뽀르르 물거품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차가운 물의 감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피부에 닿은 것은 발레리안의 따뜻한 살결뿐이었다.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새파란 물결이 가느다란 시야를 메웠다.

16549574810702.jpg“눈 떠도 돼, 로제타.”

어느새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던 발레리안이 쿡쿡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물속에서도 목소리가 아무 변질 없이 잘 들렸다.

16549574810709.jpg“이게…… 뭐야?”

로제타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여러 번 회귀하며 말도 안 되는 일을 자주 경험해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진귀한 장면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바닷속에 있었다. 커다란 공기 방울이 발레리안과 그녀를 감싼 상태였는데, 그래서인지 숨도 쉴 수 있었고 말도 할 수 있었다. 공기 방울 바깥으로는 평화로운 바닷속 풍경이 펼쳐졌다. 색색의 작은 물고기들이 그들 주위를 헤엄쳐 지나갔고, 머리 위로는 환한 햇볕이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16549574810702.jpg“여름에는 역시 바다잖아.”

16549574810709.jpg“보통 그건 바닷가를 말하는 거지. 바닷속이 아니라.”

로제타는 핀잔을 주면서도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기 방울 밖으로 슬며시 손을 뻗자 손가락 끝에 축축한 바닷물이 닿았다. 발레리안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기 방울은 그녀가 만져도 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6549574810709.jpg“우와……. 마법으로는 정말 못 하는 게 없네.”

로제타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물론 그녀에게는 검술이 더 재밌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처럼 다양하게 써먹을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발레리안이 하강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대답했다.

16549574810702.jpg“못 하는 거야 있지.”

16549574810709.jpg“어떤 거?”

16549574810702.jpg“글쎄. 네 마음을 얻는 거?”

16549574810709.jpg“뭐래.”

어린 게 느끼하기는. 로제타가 웃으며 면박을 줬다.

16549574810709.jpg“그래도 진짜 예쁘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발레리.”

16549574810702.jpg“고마우면 보상을 줘.”

16549574810709.jpg“보상?”

바다를 빤히 바라보던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멋대로 데려와 놓고 보상이라니. 이렇게 뻔뻔할 데가 있나. 그녀가 불만스럽다는 듯 그를 쏘아보았다. 발레리안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어지는 목소리 또한 능글맞기 짝이 없었다.

16549574810702.jpg“응, 보상. 대가 없는 친절은 없어, 로즈.”

로제타는 그의 뻔뻔한 작태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민했다. 과연 발레리안은 무얼 원하고 보상을 들먹이는 걸까. 마침 그의 얼굴이 아주 가까웠다. 화사한 금발 사이로 드러난 예쁜 이마가 시야에 들어오자 로제타는 망설이지 않고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쪽.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제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들어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마는 너무 멀어서 볼을 선택한 것이었다.

16549574810709.jpg“자, 됐지?”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큰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귀여운 동생에게 해주듯 가벼운 뽀뽀였고, 어렸을 적에는 이 정도 입맞춤쯤이야 자주 해주곤 했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술이 제 볼에 닿은 순간 발레리안은 돌처럼 경직되고 말았다.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한 스킨십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 사소한 것이 발레리안에게는 전혀 사소하지 않게 느껴졌다. 푸른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더니, 하얀 피부 위로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우습게도 처음으로 입을 맞춰본 소년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것이다. 곧바로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싶었으나, 워낙 거리가 가까운 탓에 로제타는 금세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49574810709.jpg“발레리. 네 얼굴, 왜 그렇게…….”

그녀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멈춘 것은 아니었다. 말을 끝마치기 직전 펑! 소리와 함께 공기 방울이 터졌다. 동시에 거센 물살이 쏟아지며 그들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물세례에 휘말려간 로제타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결국 새 옷을 바닷물에 흠뻑 적시고 말다니. 다시금 하녀복이 간절해졌다. 그녀가 발레리안의 허리를 잡고 수면으로 열심히 발돋움했다. 예전부터 발레리안은 수영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아르문트를 호수에서 구출한 것과 매우 비슷했다.

16549574810709.jpg‘어휴, 다 약해 빠져서는!’

로제타가 두 남정네의 연약함을 탓하며 열심히 다리를 휘저었다.

16549574810709.jpg“푸하!”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간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발레리안은 물을 먹은 모양인지 콜록콜록 기침해댔다. 그들은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겨우 뭍으로 헤엄쳐 나왔다. 정확히는, 로제타가 수영을 잘 못 하는 발레리안을 열심히 끌고 왔다. 그녀는 뜨끈한 모래사장에 몸을 누인 뒤에야 참았던 짜증을 터트렸다.

16549574810709.jpg“발레리, 뭐 하는 짓이야!”

16549574810702.jpg“미안. 실수로 마법이 흐트러졌어.”

16549574810709.jpg“실수? 네가?”

천재 대마법사 발레리안이 마법 실수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얘기였다. 발레리안은 부연하는 대신 손을 휘둘렀다. 바람 마법을 썼는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젖은 옷과 머리를 말려주었다.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발레리안을 응시했다. 그는 제 시선을 아닌 척 피하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태도였다.

16549574810709.jpg“너…… 설마.”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발레리안이 바짝 긴장한 것이 보였다. 그 덕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16549574810709.jpg“내가 뽀뽀한 게 부끄러워서 실수한 거야?”

16549574810702.jpg“아니야.”

발레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빠르게 부정했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몹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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