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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가장 원하는 것 (54/145)

54화. 가장 원하는 것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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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75038588.jpg“맞네! 뽀뽀한 것 때문에 얼굴도 빨개지고 마법도 깨진 거지!”

16549575038594.jpg“아니라니까.”

16549575038588.jpg“푸핫! 발레리,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었어?”

그는 계속해서 부정했으나 로제타는 그의 말을 믿을 마음이 없었다. 척 보기에도 거짓말인 게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발레리안을 놀려댔다.

16549575038588.jpg“아하하, 진짜 귀엽다, 귀여워. 어려서 그런가.”

16549575038594.jpg“네가 너보다 나이 많아, 로제타.”

16549575038588.jpg“정신 연령은 내가 훨씬 많거든. 서른에다 회귀한 것까지 치면 그게 다 몇 년이야?”

발레리안은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찬물을 뒤집어썼는데도 부끄러운 게 다 안 가셨는지 여전히 얼굴이 붉었다.

16549575038588.jpg“우리 발레리, 내가 뽀뽀해서 부끄러웠구나. 누나가 잘못했네. 앞으로는 안 그럴게.”

젠장, 놀릴 거리 하나 제대로 잡혔군. 발레리안이 인상을 쓰고 중얼거렸다. 어린애 취급당하는 게 이토록 불쾌할 수가 없었다. 그가 홱 몸을 돌려 해변을 걸어갔다. 로제타가 놀리는 걸 피해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집요하게 그를 따라오며 계속 장난을 쳐댔다.

16549575038588.jpg“우리 아기! 어디 가!”

16549575038594.jpg“날 아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 곳.”

16549575038588.jpg“누나가 잘못했다니까-!”

결국, 발레리안은 강경책을 쓰기로 했다. 그가 빠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해변의 모래가 솟아오르더니 로제타의 몸을 붙잡았다. 이게 치사하게 마법을 써? 제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흙을 보며 로제타가 헛웃음을 뱉었다. 실력 행사를 한다면 져줄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미소지으며 피부 위로 검에 두르던 기운을 둘렀다. 그러곤 웬만한 돌도 가루로 만들 만한 힘으로 힘껏 모래를 털어냈다.

16549575038594.jpg“로즈, 치사하게 힘을 쓰니?”

16549575038588.jpg“치사하다니,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그렇게 시작된 모래 장난은 어느덧 대마법사와 차기 소드마스터의 대련으로 변질되었다. 거대한 마법이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소리와 그 모든 마법을 꿰뚫고 검기를 폭발시키는 소리가 아름다운 해변에 울려 퍼졌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나, 단언컨대 로제타는 회귀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뒤에야 로제타와 발레리안은 장난을 그만두었다. 어느새 모래사장은 마수가 습격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곳이 발레리안이 소유한 섬이라는 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

16549575038588.jpg“크아, 개운하다!”

발레리안의 타운 하우스. 시원하게 몸을 씻고 나온 로제타가 행복에 겨운 얼굴로 우렁차게 말했다. 과연 대마법사의 집이라 그런지 목욕도 수준이 달랐다. 가만히 욕조에 누워 있기만 해도 온몸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시스템은 오로지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입을 옷도 다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그녀가 제 몫의 타운 하우스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더욱 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었다.

16549575038594.jpg“우리 로즈, 아저씨 같고 귀엽네.”

다른 욕실에서 씻고 온 발레리안이 그녀의 호탕한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흘렸다. 로제타가 지지 않고 응수했다.

16549575038588.jpg“응, 우리 아기는 혼자도 잘 씻었네?”

누나가 씻겨줘야 하나 했잖아. 그녀가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패배를 선언했다. 그러곤 저녁을 준비해두었다며 그녀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함께하는 식사라 발레리안이 유독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코스마다 곁들이는 와인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며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워낙 술을 잘 마시는 편이라 문제는 없었다. 무릇 기사라면 다 말술인 법이다. 발레리안도 주량이 그녀와 비슷했기에 얼굴 하나 빨개지지 않은 상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물론, 티만 안 날 뿐 어느 정도 취하긴 한 상태였다.

16549575038588.jpg“참, 전하께는 내일 얘기하려고. 내가 안 죽는다는 거.”

16549575038594.jpg“드디어 마음을 먹었어?”

16549575038588.jpg“응. 솔직히 조금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쫓겨나진 않을 것 같아. 요즘 전하께서 꽤 잘해주시거든. 옷도 사주시고. 이런 적은 처음이야.”

그녀가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로 헤헤 웃었다. 반면 여태껏 내내 미소를 걸치고 있던 발레리안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서관에서 보았던 장면이 문득 생각이 났다. 로제타와 황태자 사이로 흐르던 묘한 기류 또한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졌다. 로제타는 술에 취해 더 눈치가 없어졌는지 아르문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16549575038588.jpg“그리고, 같이 시장에 가서 불꽃놀이도 보고…….”

16549575038594.jpg“로제타.”

와인잔을 빙그르르 흔들던 발레리안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16549575038594.jpg“나랑 있을 때는 나한테만 집중해.”

다른 남자 이야기 꺼내지 말고. 발레리안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과한 참견이다. 그가 스스로를 질타했다. 로제타에게 불순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남자를 몹시 싫어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질투를 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치다 싶었다. 그러나 번복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로제타가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16549575038588.jpg“어휴, 아기 질투 났어요?”

발레리안의 눈썹이 슬며시 휘어졌다. 자꾸 이렇게 놀려대시겠다. 그가 남은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9575038594.jpg“슬슬 자러 갈까.”

16549575038588.jpg“헉, 그러게. 벌써 밤이네.”

로제타가 고개를 기울여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밤하늘이 번쩍이는 게 번개도 치는 모양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황궁으로 가려면 얼른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발레리안의 침실과 그녀의 침실은 욕실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그녀의 방이 조금 더 식당에서 가까웠기에 로제타는 방문 앞에 서서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16549575038588.jpg“그럼 잘자, 발레리.”

16549575038594.jpg“어딜 가려고?”

그러나 그녀가 방문을 열기도 전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16549575038588.jpg“응? 자러 가자며.”

16549575038594.jpg“천둥 치잖아.”

로제타가 이해 못 할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러 가는 것과 천둥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발레리안은 눈꼬리를 여우처럼 휘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16549575038594.jpg“천둥 치면 아기 무서워. 재워줘.”

기다란 손가락이 은근하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 수작질에 로제타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오늘 도대체 몇 번을 경악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한참을 입을 뻐끔거리다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75038588.jpg“아기는 뭔 아기야! 덩치도 커다란 게.”

16549575038594.jpg“네가 아기라며? 발레리는 비 무서워, 같이 자자.”

발레리안이 제 이름을 스스로 부르기까지 하며 아양을 떨었다. 얼굴이 아름답기는 했지만 웬만한 기사처럼 커다란 몸으로 저런 말을 하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는 로제타가 징그럽다며 자신을 밀어 내리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다시는 아기라는 단어를 꺼낼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16549575038588.jpg“……그래. 재워줄게. 자러 가자.”

이번에는 발레리안이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지기 싫어서 괜히 이러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로제타가 그의 방으로 먼저 걸어가기까지 했다. 곧 발레리안의 침실로 들어온 로제타는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16549575038588.jpg“자, 손잡아줄게. 잘 때까지.”

발레리안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난이라기엔 로제타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정말 그를 재워줄 작정인 것 같았다.

16549575038594.jpg‘큭큭, 귀엽기는.’

발레리안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그녀가 너무나 깜찍해 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깜깜한 밤, 조용한 침실에 그녀와 단둘이 침대 위에 있다는 걸 깨닫자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괜히 그녀와 맞잡은 손이 신경 쓰이고, 숨을 내쉬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로제타가 곁에 있다고 긴장을 한 것이었다.

16549575038594.jpg‘정말 요즘 왜 이러는 건지.’

동생이나 다름없는 로제타에게 긴장을 다 하고.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정신.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또 로제타의 손이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16549575038588.jpg“발레리.”

로제타가 낮게 깔린 침묵을 깨고 느릿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발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굳혔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16549575038594.jpg“응.”

그가 슬며시 눈을 뜨며 한참 만에 대답을 뱉었다. 긴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고 거칠었다.

16549575038588.jpg“앞으로도 언제든 비가 오면……. 그래서 잠드는 게 무서우면 불러.”

어둠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달빛 아래의 로제타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6549575038588.jpg“내 친절에는 아무 대가도 필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발레리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제야 로제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언젠가 로제타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고, 홀로 거리를 떠돌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고. 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아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있을 때면 자신의 처지가 더 실감이 나서 힘들었다고. 로제타는 그걸 기억하고 행여나 자신이 비 오는 날을 무서워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발레리안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목구멍이 뜨거웠다.

16549575038594.jpg“로즈, 나 비 오는 날 안 무서워해. 아니, 오히려 꽤 좋아해.”

로제타가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런 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좋아하냐는 의미였다. 발레리안은 천천히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16549575038594.jpg“네 말대로 예전에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걸 다 잊을 만큼 좋은 일이 비 오는 날에 생겼거든.”

그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되짚었다. 열두 살의 어느 날, 발레리안은 안 그래도 더럽던 차림에 비까지 맞아 한없이 초라한 꼴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빌어먹는 법을 몰라 얼굴이 홀쭉해질 때까지 마른 그의 앞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 발레리안이 지금껏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때가 잔뜩 묻은 그가 더럽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함께 가자고 제안해준 사람. 그리고 조그마한 손을 내밀며 안녕, 하고 인사하던 소녀. 메이필드 남작 부인과 로제타였다.

16549575038594.jpg“그날 널 만났잖아, 로제타.”

메이필드 남작 부인의 곁에 서서 반갑다고 말하던 어린 로제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를 시궁창에서 끌어 내준 은인들이기에 영원히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발레리안이 로제타와 맞잡지 않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16549575038594.jpg‘그래, 로제타는 내 은인이야. 남작 부인이 돌아가실 때 맹세했듯, 영원히 내가 지켜야 할 동생이고.’

그날 밤, 그는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로제타의 행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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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아침, 로제타는 발레리안이 새벽부터 차려준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뒤 황궁으로 향했다. 올 때처럼 옷장을 이용하니 과연 시간이 아주 절약되었다. 다 커서 옷장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게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아르문트에게 어떻게 고백할지를 고민하다 보니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황태자궁에 도착하자 멜라니와 엘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를 반겨주었다.

16549575150022.jpg“로지! 왔구나!”

16549575150022.jpg“어머, 옷이 바뀌었네?”

16549575038588.jpg“아, 응. 친구가 줬어.”

로제타가 제 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신이 더 좋은 옷을 사주겠다던 발레리안은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새로운 옷을 안겨주었다. 도대체 언제 나갔다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로제타의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였기에 새 옷은 맞춤옷처럼 그녀와 잘 어울렸다.

16549575038588.jpg“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날 기다린 거야?”

16549575150022.jpg“그럼. 기다리고말고.”

멜라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더니, 이내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16549575150022.jpg“전하가 널 어제부터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셔! 계속 네가 돌아왔는지 찾으시더라니까. 얼른 들어가 봐!”

16549575150022.jpg“우리 로지, 아주 알콩달콩 보기 좋네!”

멜라니와 엘리아가 이처럼 풋풋한 연애가 따로 없다며 꺄르르 웃어젖혔다. 그에 반해 아르문트의 침실이 있는 쪽을 응시하는 로제타의 얼굴은 심각하기만 했다.

16549575038588.jpg‘좋아. 지금 바로 가서 말하자.’

마침내 진실을 밝힐 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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