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고백2021.09.09.
결심한 것도 잠깐, 로제타가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막상 바로 들어가려니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이 상태로는 도무지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옷만 갈아입고 가자, 옷만…….’
로제타가 크게 심호흡하며 자신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규칙상 전하를 만나러 갈 때는 옷을 갈아입고 가야 했다. 그러나 곧 멜라니와 엘리아가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다.
“로지, 어디 가? 바로 전하께 가서 인사드리지 않고?”
“응? 환복하고 가야지.”
그게 원칙이잖아. 로제타가 순수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자 멜라니와 엘리아가 동시에 헛웃음을 뱉었다. 멜라니는 쯧쯧 혀를 찼고, 엘리아는 희귀한 생물을 보듯 그녀를 응시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너 진짜 원칙주의자구나. 누가 그런 규칙을 하나하나 다 지키고 있어? 적당히 알아서 뺄 거 빼고 지키는 거지.”
규칙을 다 지키지 않는다고? 멜라니의 말에 로제타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충직한 기사였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엘리아는 로제타가 고지식한 반박을 늘어놓기 전에 서둘러 설득을 이어나갔다.
“그게 우리 로제타의 귀여운 점이긴 하지만……. 이렇게 예쁜 옷을 두고 굳이 하녀복 차림으로 전하를 만나러 갈 필요 없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지금 입은 옷 진짜 잘 어울리는데 그냥 그대로 가. 그럼 전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어! 나 못 믿어? 내가 연애경력만 수십 번이라고.”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으면서 수십 번을 연애했다니. 로제타가 또다시 놀랐다. 자신은 다섯 번의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누군가와 교제해본 적이 없는데. 새삼 그동안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두 하녀는 로제타를 양쪽에서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녀를 아르문트의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친구의 연애를 응원하는 데 진심인 그들이었다. 멜라니의 흥미진진한 연애담을 정신없이 듣다 보니 어느새 침실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로제타가 문 앞에 선 리처드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최고의 기사였던 자신을 이렇게까지 홀릴 수 있다니. 멜라니는 특수정보부에서 일해도 아주 잘할 것 같았다. 하녀로만 남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로제타?”
슬슬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리처드가 그녀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러왔다. 새로운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로제타의 모습에 리처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금까지 봤던 로제타는 귀엽고 청순한 느낌이라면 지금은 귀족 영애처럼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기껏 마음을 접고 있는데 또 저런 모습이라니. 그가 입술을 깨물고 탄식했다.
“……댁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아, 잠시 쉬다 왔어요.”
“전하께서 찾으셨습니다. 들어가시죠.”
리처드가 몸을 움직여 로제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이쯤 되니 옷을 갈아입겠다고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그럼 로지, 좋은 시간 보내-!”
임무를 달성한 멜라니와 엘리아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선 로제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뒤돌아 떠나는 걸음마저 한없이 경쾌했다. 후. 짧게 숨을 내쉰 로제타가 마지못해 노크했다.
“전하, 들어가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안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허둥지둥 달리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뭘 하는 거지?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허락을 기다렸다.
“……들어와.”
느지막이 아르문트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 힘차게 문을 열었다.
‘좋아. 말해보고 반응이 안 좋으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냥 튀는 거야.’
만약 그가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에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면 마음이 참 착잡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회귀하며 살리려는 주군이 자신이 죽길 바란다니, 그처럼 씁쓸한 일이 따로 없다. 그러나 로제타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가 꺾이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아르문트를 마주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아르문트는 역시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분명 안에서 기척이 들렸었는데, 이상하다. 로제타가 슬쩍 방을 훑었다. 책장 앞에 책 몇 개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다시 아르문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에는 그녀가 준 커프 링크스가 달려 있었다. 매일 끼겠다는 약속을 정말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빠르게 아르문트가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모두 멀쩡해 보였다. 어제 중간중간 목걸이를 확인하며 그가 멀쩡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역시 직접 보고 나서야 마음이 완전히 놓였다. 책을 들여다보던 아르문트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로제타를 훑어보았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무심한 얼굴이 드러났다. 로제타는 알지 못했으나, 이는 아르문트가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 것이었다. 심지어 딴청을 부리려고 일부러 책을 빼 들고 소파에 앉기까지 했다. 그러나 로제타의 새로운 차림새를 발견하자, 노력한 게 무색하게도 곧바로 삐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못 보던 옷이군.”
젠장. 이런 걸 바로 알아채는 것도 이상하군. 아르문트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아, 친구가 새로 사줬어요.”
로제타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제 옷차림에 관심을 많이 두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대답에 아르문트는 이를 악물었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는 게 진심이었나. 저번에 말하던 쇼핑도 기어코 같이 한 거고?’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가슴은 울렁거리고 갑갑했다. 궁금한 게 많지만 늘 그렇듯 묻지는 못했다. 그저 이런 걸 궁금해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났다. 아르문트가 어젯밤 내내 되뇌던 말을 다시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라질 사람에게 정을 주면 안 돼. 어차피 나만 힘들어질 테니.’
어찌나 자주 생각했는지 지겨울 정도의 얘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떠올릴 때면 심장 한 부근이 찌릿하게 아팠다.
“잘 쉬었는지 얼굴이 좋군.”
“네. 덕분에 즐겁게 보내고 왔어요, 전하.”
즐겁게 보내고 왔다, 라. 누군 신경 쓰여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로제타는 정말 얼굴이 훤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발끝부터 올라와 가슴 부근에서 부글거렸다. 아르문트는 손에 힘을 꽉 주며 최대한 감정을 누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럴 거면.”
왜 날 좋아한다고 했어? 아르문트가 말을 삼켰다. 지금 얘기해야 하는 내용은 이런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입술 안쪽을 강하게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남은 날은 그냥 계속 쉬지그래? 괜히 황궁에서 힘쓰지 말고.”
아르문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황궁을 나가라는 제안에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차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떤 반응이든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편, 로제타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아직 중요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축객령을 내리다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다고 해도 속이 쓰렸다. 그러나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이 정도로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어.’
로제타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던 것 기억하시죠. 중요한 거라고 했던 거요.”
아르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도 다른 곳에 둔 상태였고, 얼굴도 무관심해 보였다. 그러나 로제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말씀드리길 망설였는데…… 그냥 지금 말할게요.”
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것을 마침내 뱉어냈다.
“저 안 죽어요. 안 죽는대요. 테오도르 신관님이 확실하게 진단해주셨어요.”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던가. 오랫동안 감춰왔던 비밀을 털어놓자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르문트가 보일 반응이 두려웠다.
“죽을 때까지 전속 하녀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전 안 나갈 거예요. 못마땅하시겠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그녀 또한 아르문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고작 몇 초였지만 로제타에게는 몇 시간 같았다.
“그,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결국, 로제타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재빨리 돌아섰다. 미리 전략을 짜두었던 대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나가자!’
그녀가 문 쪽으로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아르문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얼른 사라지고 싶어 걸음걸이가 조급했다. 그리고 문손잡이에 손가락 끝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화악!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몸이 절로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동시에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자 로제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등 뒤에 딱딱하고 두툼한 흉부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문트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것이었다.
“정말, 죽지 않는 건가?”
굵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르문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려 그녀의 어깨로 떨어졌다.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이름 모를 감정. 아르문트는 제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 더러운 기분을 그렇게 표현했으나, 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놈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게 너무 짜증이 났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는 얘기가 자꾸만 생각나 어젯밤 조금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부터 로제타가 돌아왔는지 확인한답시고 몇 번을 하인들을 귀찮게 했는지 모른다. 이 모든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한참을 모른 척했으나, 모를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의 이름이 바로 질투라는 것을.
“가지 마.”
그가 로제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지금껏 아르문트의 입을 닫고, 마음에 빗장을 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녀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이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다.
“가지 마라, 로제.”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친구인지 뭔지 몰라도 다른 사내자식 집에는 가지 말라고, 정말이지 너무나 말하고 싶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후련했다.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리하여 아르문트는 결심했다. 앞으로는 그녀에게 제 감정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겠다고.
“네가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인정하고 나니 제 마음이 더욱 잘 보였다. 왜 리처드 경에게, 친구라는 남자에게 이렇게 질투가 나는지도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로제타에게, 연모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로제타.”
아르문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군가를 연모하게 된 것은 처음이지만, 이런 말은 얼굴을 보고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이내 떨리는 시선이 맞닿았다. 로제타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레리안의 얼굴을 보고 놀린 게 민망할 정도로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쩐지 눈가가 붉은 것 같기도 했다. 아르문트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뺨을 스치듯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피부 너머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