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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너와 같은 마음이다 (56/145)

56화. 너와 같은 마음이다2021.09.12.

16549575421997.jpg“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다.”

천천히 한 글자씩 내뱉는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애틋했다. 고양이를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부끄러운 듯 흔들렸으나, 시선의 끝은 올곧이 로제타만을 향했다. 아르문트는 자신의 말이 고백이라기에는 너무나 소심하다는 걸 잘 알았다. 로제타가 제대로 밝힌 적도 없는 마음을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제 연정을 드러내는 제 모습이 스스로도 한심했다. 그런데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던 이유는 바로,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16549575421997.jpg“그러나 알다시피…… 내 상황이 그리 당당하지 못하군.”

난생처음으로 느낀 연모의 감정이 아닌, 연모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부끄러웠다. 그는 정통한 황태자라고는 하나 입지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자 경계를 늦추지 않고는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황위를 위해 싸우지도 않았다. 지금까지의 그는 그저 버텨냈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현재 많은 귀족이 1황자와 황후의 편에 서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병을 앓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발 빠르게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아르문트가 로제타와 교제하게 된다면, 그 결과야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아르문트는 주변에 압박에 따라 다른 귀족과 약혼하게 될 것이고, 로제타는 결국 그의 정부로밖에 남지 못할 것이다. 정부. 아르문트가 몹시 싫어하는 단어였다. 아버지의 정부, 현 황후 아르티나가 결국 제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믿었으니까.

16549575421997.jpg‘로제타가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어.’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었다. 그런 이에게 정부라는 불명예를 안겨줄 수야 없지 않은가. 더는 억지로 버티듯 살아갈 수는 없다. 내가 겪은 수모를 그녀 또한 당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 너무나 낯선 단어에 일순 아르문트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 마음을 인지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부끄러웠다. 그가 이를 꾹 깨물며 로제타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단지 시선이 마주하는 것뿐인데 가슴이 간질거리고 마음이 충만해졌다.

16549575421997.jpg“제대로 된 말은…….”

아르문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피부를 스치는 부드럽고도 간지러운 촉감에 로제타가 얼굴을 움찔거렸다.

16549575421997.jpg“내가 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그때 하지.”

아주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확실한 목표가 생긴 덕이었다. 아르문트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49575421997.jpg“너무 오래 끌지는 않겠다. 그러니…… 기다려 주겠나?”

내가 네게 제대로 고백할 때까지. 아르문트가 떨리는 눈으로 말을 삼켰다. 행여나 그녀가 실망할까 염려된 탓에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한편, 로제타는 멍한 표정으로 아르문트를 올려다보았다. 새삼 제 앞에 있는 남자의 외모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말문이 막혔다.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 절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러운 포옹,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부드러운 손길,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차마 사고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6549575422041.jpg‘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얼 기다려달라는 것이고, ‘제대로 된 말’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16549575422041.jpg‘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건 또 뭐고?’

로제타가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고민했다. 설마 회귀에 대해서 알아챘을 리는 없고. 어쩌면 아르문트가 그를 진심으로 위하는 자신의 이 절절한 충심을 알아준 게 아닐까? 그녀가 자신 좋을 대로 해석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이미 너무 흥분한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아르문트가 ‘네가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떠나지 말라며 먼저 껴안기까지 했다. 혹 쫓겨날까 걱정하던 그녀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다행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심지어 눈물도 고였다. 수많은 회귀를 몽땅 보상받은 것만 같은 희열이 전신에 감돌았다.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서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한 상태인 탓에 그녀는 차마 아르문트가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들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연신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16549575422041.jpg“네! 언제까지고 기다릴게요.”

무슨 얘기를 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기다리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지금 기분으로는 수십 년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행복에 겨운 얼굴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16549575422041.jpg“그러면 저, 계속 전하 곁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로제타의 벽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그 표정이 또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르문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간 격렬한 충동이 일었다. 저 통통한 입술에 당장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16549575421997.jpg‘첫 키스를 이렇게 할 수는 없지.’

그가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다. 제대로 된 고백도 하지 않은 상황에 입부터 맞댈 수야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몇 번이나 입술이 맞닿은 그들이었으나 아르문트는 알 길이 없었다.

16549575421997.jpg“그대가 곁에 있는 건 당연히 좋지만…… 하녀 일이 힘들지는 않나?”

네가 힘든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그가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그대’라니. 로제타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호칭은 또 처음이었다.

16549575422041.jpg‘하긴, 기사가 아니니 경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전하가 확실히 내 충심을 알아주긴 했나 봐. 한낱 하녀에게 경칭이라니……!’

그녀가 감동 어린 눈으로 아르문트를 빤히 응시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애정이 깃든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16549575422041.jpg“힘들긴요, 전혀요. 저는 하녀로 일하는 거 좋아요. 전하의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로제타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하마터면 방금 다짐한 것도 잊고 본능에 따라 행동할 뻔했다. 참아야 한다. 그가 놓아버릴 뻔한 절제심을 간신히 붙잡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16549575421997.jpg“……그래. 나도 좋다.”

아르문트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수줍은 미소로 응수했다. 짐승 같은 속내와는 달리 외관은 첫사랑에 빠진 사내답게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는 대신 그녀를 다시금 그러안았다. 피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포옹에 로제타는 얼굴을 붉혔다. 어쩐지 스킨십이 과해진 것 같기는 한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가 이상한 것 같다고 직감하면서도 순간의 기쁨에 심취한 나머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문트도 기뻐 보이고, 자신도 기쁘니 모든 게 잘 되었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르문트가 앞으로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겠다 다짐한 것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충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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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칠도 지나지 않아 사용인들 사이에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아르문트의 변화에 대한 소문이었다.

16549575451419.jpg“요즘 황태자 전하, 뭔가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

16549575451419.jpg“너도 느꼈어? 예전에는 그냥 무섭기만 했는데 요즘은…….”

16549575451419.jpg“멋있으시지.”

16549575451419.jpg“맞아!”

주방에서 일하던 하녀들이 일하다 말고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용인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거론되던 아르문트였다. 워낙 무뚝뚝하면서도 예민해 실수라도 한 날에는 사나운 목소리로 질타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쳤다는 소문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즈음의 아르문트는 어딘가 달라졌다.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으나 사납기보다는 야성적인 매력이 있었고, 성격도 이전보다 훨씬 자비로워졌다. 걸음걸이에는 자신감이 깃들었으며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잘생긴 얼굴에 생기가 돌자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16549575451419.jpg“원래도 잘생기시긴 했지만, 요즘은 좀 비현실적인 수준 아니니?”

16549575451419.jpg“카일라가 그러길 저번에는 혼자 웃고 계시기도 했대. 그런데 그 미소가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니었다는 거야.”

16549575451419.jpg“미소짓는 전하라니……. 그 자체로 복지다, 복지. 게다가 얼마 전부터 황태자궁도 유독 조용해지지 않았어? 별 사고도 없고.”

16549575451419.jpg“그뿐만이 아니야.”

하녀 한 명이 아예 손에서 조리기구를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다른 하녀들도 일을 중단하고 빠르게 모여들었다.

16549575451419.jpg“본궁에서 일하는 동기한테 들었는데, 정무를 보실 때도 달라지셨대.”

16549575451419.jpg“뭐? 어떻게?”

16549575451419.jpg“회의실 문 너머로 전하께서 귀족들에게 일침 놓는 소리가 들린다더라고. 그래서 회의가 끝날 때면 다들 전하가 갑자기 왜 저러냐며 말이 많대.”

누가 들었다가는 큰일 날 수 있는 얘기인지라 다들 눈치를 봤다. 여태껏 그다지 의욕 없던 황태자가 회의에서도 돌변했다는 것은, 앞으로 황궁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리라는 걸 의미했다. 돈 받고 일하는 사용인들이야 승자가 누가 되든 큰 상관은 없고, 그저 제 한 목숨 잘 보존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16549575422041.jpg“크흠.”

16549575478899.jpg“히익!”

갑작스럽게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실색하여 뒤를 돌아보자 어느덧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으니, 바로 로제타였다.

16549575451419.jpg“뭐야, 로지 너였어?”

그나마 친분이 있는 하녀가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황태자의 전속 시녀에게 황태자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던 것을 들킨 것이지만, 그다지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모두 로제타가 얼마나 허술하고 순진무구한 사람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16549575422041.jpg“응! 전하 점심 가지러 왔어. 오늘도 방에서 드신다고 하셔서.”

아니나 다를까 로제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해맑은 얼굴이었다. 하녀들은 목소리를 낮춰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갖가지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건네주었다.

16549575451419.jpg“여기. 양 넉넉하게, 맞지?”

16549575422041.jpg“응, 맞아. 고마워, 메리앤.”

16549575451419.jpg“고맙기는. 수고해!”

로제타가 방긋 미소지으며 주방을 떠났다. 그러나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의 입가에 걸쳐진 바보스러운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16549575422041.jpg‘달라졌다, 라.’

그녀 또한 느끼고 있던 점이었다. 로제타가 죽지 않는다는 걸 고백한 이후로, 아르문트는 달라졌다. 그를 먼 곳에서만 보는 사용인들은 ‘조금 변한 것 같다’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했으나, 늘 곁에 있는 그녀는 더욱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성격도 다정해졌고, 자주 웃기도 했다. 아니, 로제타 앞에서 그는 거의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자동반사적으로 웃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 처음에는 그러한 변화가 매우 달갑고 좋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16549575422041.jpg“전하, 식사하세요.”

아르문트의 침실에 도착한 로제타가 테이블 위로 음식을 세팅했다. 그가 혼자 먹기에는 지나치게 양이 많아 보였다.

16549575421997.jpg“앉아, 로제. 차는 내가 따라줄 테니.”

그리고 아르문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제 옆에 앉히고는 차를 따랐다. 하녀의 시중을 드는 황태자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모습이었다.

16549575422041.jpg“저, 역시 식사는 따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16549575421997.jpg“쓸데없는 소리 말고.”

음식에 독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한 아르문트가 우아한 자세로 프렌치토스트를 썰더니, 이내 포크를 들어 로제타를 향해 내밀었다.

16549575421997.jpg“아, 해.”

같이 식사하는 걸 넘어 먹여주기까지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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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가 경악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그 속으로 메이플 시럽이 묻은 프렌치토스트 조각을 쏙 넣어주며 말했다.

16549575421997.jpg“옳지, 착하다.”

꼭꼭 씹어먹어. 그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16549575422041.jpg‘이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로제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우물거렸다. 그 와중에 황실 요리사의 프렌치토스트는 맛이 기가 막혔다.

16549575421997.jpg“맛있나?”

아르문트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맛이 있는 건 사실이었으므로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16549575421997.jpg“그럼 나도 먹어볼까.”

메이플 시럽이 묻어 번들거리는 로제타의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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