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르문트의 변화2021.09.16.
“네, 드세요.”
입안의 음식을 꿀꺽 삼킨 로제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먹을 생각을 않고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왜 또 이래?’
로제타가 눈썹을 휘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저 달콤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 당황스러워 도망가고 싶기만 했다. 이러한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아르문트는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먹여줘.”
나지막이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매혹적이었다. 덕분에 로제타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지금까지는 어지간한 시중은 전부 거부했으면서, 갑자기 이제 와서 밥을 떠먹여 달라니. 로제타가 혹 모종의 사건에 의해 제 주군의 정신이 유아기로 퇴행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정한 충신은 간언을 아끼지 않는 법. 아르문트가 미쳐가는 것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상냥하게 웃으며 조언했다.
“전하. 이 정도는 직접 드시는 게 어떨까요?”
이보다 더 직설적일 수 없는 거절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도 방금 먹여줬지 않나.”
먹여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로제타가 억지로 말을 삼켰다. 이 얘기까지 했다가는 아르문트가 삐질지도 모르니까. 그가 그녀를 향해 더욱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고 줄어들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무릎에 닿아왔다. 아르문트 특유의 야릇한 향기가 콧가를 스치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가 눈꼬리를 은근하게 휘며 웃었다. 낮은 목소리가 유혹하듯 이어졌다.
“로제, 응?”
먹여줘.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속살거렸다. 무뚝뚝하고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그가, 무려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황금빛 눈동자를 발견한 로제타가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못 버티겠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며 얼른 포크를 집어 들었다.
“자, 드세요!”
아르문트의 정신이 퇴행하고 있든 아니든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다소 과격한 몸짓으로 아르문트의 입에 프렌치토스트를 꽂아 넣었다.
‘헉, 목젖을 찌른 건 아니겠지?’
로제타가 혹 이번 회차가 ‘목젖이 찔려서 사망’이라는 결과로 끝나버릴까 불안한 마음에 눈을 힐끔 떴다. 다행히 아르문트는 무사했다. 아니, 무사한 것을 넘어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가 붉은 혀로 입가에 묻은 시럽을 느긋하게 핥았다.
“맛있군.”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입술을 향한 상태로 말이다.
“그대가 줘서 더 맛있는 것 같아.”
“그냥 요리사가 요리를 잘한 거……. 아니에요.”
그냥 말을 말자. 로제타가 몸의 방향을 틀어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아르문트의 이 알 수 없는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녀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다. 항상 같이 식사하려는 것도, 음식을 서로에게 먹여주길 원하는 것도, 자꾸만 자신을 다정하게 응시하는 저 시선도. 모든 것이 이상했다. 그날, ‘제대로 된 말은 기다려달라’고 말한 이후로 사람이 아예 바뀐 것만 같았다.
‘이건 꼭…… 연인한테나 하는 행동 같잖아.’
입안 가득 딸기와 프렌치토스트를 넣고 우물거리던 로제타가 일순 동작을 멈췄다. 연인. 제대로 된 말. 같은 마음. 일련의 단어들과 함께 한 가지 의심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전하가 나를…….’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한 것이 바보 같을 정도로 늦은 의심이었다. 로제타가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방 눈이 마주쳤다. 계속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던 것처럼. 아르문트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애정이 엿보였다.
‘말도 안 돼.’
얼굴이 빠르게 달아오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문트가 아닌가. 자신이 모든 걸 바쳐 지키기로 다짐한 주군이자, 라그나르의 황태자, 아르문트. 네 번을 회귀하는 동안 아르문트는 단 한 번도 제게 이성적 호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예정인 사람이다. 그것도 사교계의 여왕이자, 제국에서 제일가는 미녀인 페이즐리 테레즈 폰 루니엘라 영애와. 결혼생활이 그다지 평탄하지 않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의 아내 될 사람은 정해져 있다. 루니엘라 영애의 황홀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떠올리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아르문트가 그런 그녀를 두고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이런 오해를 하다니. 전하의 광증을 처리하는 중에 실수로 그런 짓을 한 것 때문에 내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됐었나 봐.’
로제타가 재빨리 합리화했다. 조금 더 면밀히 생각하면 답은 나와 있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정해놓은 길 바깥을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여태까지 그런 적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안일한 믿음과, 감히 주군과 그런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기사로서의 충직함, 그리고 루니엘라 영애에 대한 죄책감이 뒤엉켜 그녀의 눈앞을 흐리게 한 탓이었다.
‘그냥 친해지고 나니 잘해주시는 거겠지. 발레리처럼 말이야.’
생각해보면 발레리안도 만만찮게 그녀에게 치대는 편인지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물론 아예 이해하기에는 둘의 성격 차가 심하긴 하지만. 로제타는 다시 입을 우물거리며 머릿속의 의심을 열심히 지워나갔다. 제 심장이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이유 또한 당황 때문이라고 치부하였다.
한편, 아르문트는 이런 그녀를 여전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집중해서 하나?’
요즘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당당해지겠다고 약속한 이상, 해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날 이후, 아르문트는 모든 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제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초석을 다졌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다름 아닌 테오도르 신관이었다. 대신관이 황후의 쪽으로 돌아선 이상, 믿을 수 있는 신관을 끌어들이는 건 필수적이었다. 조사해본바, 놀랍게도 테오도르 신관이 바로 그 적임자였다. 실력도 뛰어났고, 대신관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몹시 따랐다. 심지어 로제타를 구해주기까지 했다. 이보다 조건이 더 나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테오도르 신관은 아르문트의 주치의라는 명목하에 황태자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로제타의 조언에 따라 매일 그에게 치유도 받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요즘은 광증이 발현하는 횟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르문트는 검술 훈련도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의무적으로만 갔다면, 요즘의 그는 훈련이 없는 날에도 연무장에 나가 수련하고, 황태자궁의 기사들과도 교류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그의 일정은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바빠졌다. 휴식을 취할만한 여유도 부쩍 사라졌으나, 오히려 그의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 이제야 정말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만 아쉬운 점도 물론 있었으니, 바로 로제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 또한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황태자궁 내에서는 그녀와 항상 동행하곤 했으나 다른 사람의 시선 탓에 제대로 애정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아직 제대로 고백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애가 탔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어도 좋아하는 티를 낼 수 없다니. 이토록 답답한 일이 따로 없다. 욕구불만이 이런 걸까 싶었다. 그나마 식사 때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단둘이 편안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소중한 시간에, 로제타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마음에 아르문트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휘어졌다.
‘서운해서 이러나?’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 서운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 쉴 수 있는 시간에는 최대한 그녀와 있으려 하고 있지만, 그녀로서는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다.
‘아니면, 막상 마음을 알게 되니 내가 성에 차지 않아서?’
그 또한 연애해본 적이 없어 잘 알지는 못하나,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고백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런 자신이 한심해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르문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화가 나기보다는 두려웠다. 갑자기 로제타가 질렸다며 자신을 떠나갈까 봐.
‘안 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르문트가 들고 있던 포크를 강하게 잡아 쥐었다. 얇은 쇠가 그의 힘에 조금씩 구부러졌다. 그래, 그녀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예를 들면…….
“로제타.”
“네?”
“식사 후엔 연무장에 가려고 하는데…….”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든가.
“같이 가겠나?”
*** 잘생긴 사람도 자신이 잘생긴 것은 아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아주 희귀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얼굴을 흘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늘 이를 눈치채지 못하기는 쉽지 않다. 아르문트 또한 같은 이유로 자신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멋져 보일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멋지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굳이 더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그는 결국 아주 본능적이고 야생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 멋져 보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로제타 또한 검을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한때 강자를 동경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이미 강자 중의 강자에 도달하였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르문트가 검을 쓰는 모습쯤이야 수백, 수천 번도 더 봤다.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문트를 따라 연무장에 도착한 로제타는 볼을 붉히고 좋아하기는커녕 평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로제타, 여기까진 무슨 일-. 헉! 전하!”
로제타를 발견한 러크가 신이 나서 쪼르르 다가오다 말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아르문트의 곁에 서 있던 리처드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훈련하게.”
아르문트가 자연스럽게 기사들에게 목례하며 짐을 풀었다. 기사들도 그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곧 다시 훈련에 집중하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전하!”
로제타는 헤실헤실 웃으며 아르문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 그가 훈련하는 걸 구경할 생각이었다. 웬일로 이곳까지 같이 오자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숨지 않고 그를 호위할 수 있으니 그녀야 좋았다. 곧 아르문트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는 제법 진지한 태도로 기사단장과 검을 맞댔다. 꼿꼿하면서도 유연하게 검을 휘두르는 미남의 모습은 과연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예상과 달리 로제타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오른쪽이 비었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숙련도가 아쉬워. 그래도 뭐, 나이에 비하면 역시 훌륭하군.’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르문트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다른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대부분 로제타가 아는 이들이었다. 그녀의 선배이자, 부하였던 사람들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 익숙지 않은 얼굴도 몇몇 있었다. 아마 그녀가 입단하기 전 나간 사람들이리라. 나가게 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실력이 마땅찮았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는 오로지 실력만 보고 기사를 뽑았으니, 실력이 부족한 자들은 머지않아 퇴출당했을 테다.
‘음? 저 사람은 누구지?’
예외가 하나 있었다. 어두운 금색 머리카락에 청색 눈동자를 지닌 젊은 기사였다. 이전 회차에는 아르문트를 호위하는 데 바빠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낯선 얼굴인데 실력은 그녀의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훌륭했다. 아직 허술한 데가 있긴 했지만 잘 다듬어지기만 한다면 분명 아르문트 못지않게 뛰어날 것이다. 저런 인재가 왜 도중에 나갔을까. 로제타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리처드에게 질문했다.
“리처드 경, 저 금발 기사분은 이름이 뭐예요?”
“저 친구는 알렉입니다. 평민 출신이라 성은 없다 들었습니다.”
알렉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평민 출신 기사 한 명이 귀족들과 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잘리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아마 알렉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아야지. 아르문트를 지켜줄 소중한 인재!’
로제타가 열렬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다른 기사들마저 뭔가 싶어 쳐다볼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늘 로제타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아르문트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을 금세 발견했다. 그 순간, 그가 영원히 잊지 못할 어느 날 로제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미남이더라고요. 어찌나 멋지던지, 하하.”
그때는 취향 한번 따분하다고 생각하고 말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마침 알렉의 외모가 그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로제타.”
근육이 탄탄하게 붙은 장신의 몸이 로제타의 시야를 가렸다. 땀으로 젖은 셔츠가 희미하게 살갗을 비추는 것이 보였다. 슬며시 시선을 들어 올린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요즘 들어 항상 그랬듯 희미하게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는 있는데…….
“지금 어딜 보는 거지?”
어딘가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