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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같이 욕실로 갈까 (58/145)

58화. 같이 욕실로 갈까2021.09.19.

로제타가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었기에, 그가 분노할만한 이유 또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가운 물이 담긴 물병과 뽀송뽀송한 수건이었다.

16549575781831.jpg“앗.”

이거였구나! 마침내 실마리를 찾은 로제타가 곧장 일어나 아르문트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빠릿빠릿하게 시중을 들지 않아서 아르문트가 짜증이 났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16549575781831.jpg“여기요, 전하! 물 좀 드세요.”

로제타가 들고 있던 수건으로 정성스레 그의 땀을 닦아주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생글생글 웃는 그녀였다.

16549575781831.jpg“더워서 어떡해요.”

무려 손부채질까지 해주는 상냥함도 보여주었다. 하녀로서 그를 따라 연무장에 온 것은 처음인 그녀는 어떻게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늘 나무 뒤에 숨어 몰래 따라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그녀가 기사일 적 다른 하녀들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모습을 참고하였다. 땀을 닦아주는 손짓도, 손부채질을 하며 ‘더워서 어떡해요’ 하고 말하는 것도 모두 그들이 해주었던 그대로였다. 다만 로제타가 알지 못했던 점은, 하녀들의 친절은 오로지 그녀에게 한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용인들 사이에 그녀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데다가, 성별도 같으니 더욱 거리낄 게 없어 나올 수 있는 상냥함이었다. 이와 달리 지금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매우 다른 의미로밖에 해석되고 말았다. 바로 연인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 말이다. 간지럽히듯 자신의 얼굴에 부채질하는 로제타의 모습에 아르문트는 질투하던 것마저 잊고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16549575781847.jpg‘갑자기 이런 애교라니.’

이 예쁜 걸 보고 어떻게 화를 내라고. 이건 반칙이지 않나. 아르문트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다른 기사들이 있는 곳이다. 그나마 믿을만한 놈들로만 남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표정 관리를 해야만 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무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로제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게 너무 좋아서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16549575781847.jpg“……됐으니까 다시 가서 앉아 있어. 덥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아르문트가 병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는 내심 자신이 평소대로 차가운 목소리를 잘 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리처드와 러크를 포함한 다른 기사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 황태자 전하가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소문을 들어 전속 하녀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직접 보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짓 한번, 눈짓 한 번에 모두 애정이 담겨 있는 게 보였다. 아르문트가 차갑게 냈다고 생각한 목소리도 평소에 비교하면 부드럽기만 했다. 게다가 아르문트는 혹 따가운 햇볕이 그녀를 괴롭힐까,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저런 행동을 해놓고서 들키지 않으리라 기대하다니. 아무래도 그가 첫 연애에 푹 빠져서 아예 바보가 된 모양이었다.

16549575781855.jpg“크흠, 흠.”

리처드가 헛기침하며 주변 기사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나름대로 안 들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애잔하니 그냥 모르는 척하라는 신호였다. 기사들은 경악으로 쩍 벌어진 입을 닫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검을 휘둘렀다.

1654957578186.jpg“전하,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중년의 기사단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벤치로 돌려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였으나, 이미 방금의 광경을 본 이상 더는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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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련이 끝나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는 길. 아르문트는 땀에 젖은 몸을 바람에 식히며 제 곁에서 걷는 로제타를 흘끔거렸다. 늘 눈치 없이 껴서 다니던 리처드도 마침 근처에 없었다. 호위기사가 주군의 곁을 떠날 수 없다며 꽥꽥거리던 그에게 억지로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똥 씹은 표정으로 사라지던 리처드를 생각하면 안타까울 만도 했으나 아르문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로제타와 둘이 같이 걷는 게 좋아 다른 생각을 할 겨를 따위 없었다.

16549575781847.jpg‘조금은 멋져 보였을까?’

쉬는 시간 뒤에는 수련에 집중하느라 로제타가 자신을 잘 보고 있는지 살피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로제타는 기사들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데 바빠 딱히 아르문트의 수련을 구경하지 않았으나,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르문트가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까 전 제 시중을 들어주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16549575781831.jpg“전하.”

아르문트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 찰나 로제타가 선수를 쳤다.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은연중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로제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는 몹시 달랐다.

16549575781831.jpg“조금 전에 그 금발 기사분 있잖아요, 알렉 경이요.”

또 그놈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가라앉았던 질투심이 다시금 머리를 들이밀었다.

16549575781831.jpg“실력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소문을 듣자 하니 몇몇 귀족들이 그분의 출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아르문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치하게도 그녀의 입에서 다른 남자 놈의 얘기가 나오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매를 확인한 로제타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16549575781831.jpg“그, 전하께서 좀 더 신경 써주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소중한 인재를 놓치면 손해니까요. 그녀가 헤헤 웃으며 덧붙였다. 또다시 미소로 상황을 넘어가려는 의도였다. 친해졌다고는 해도 하녀가 기사의 일에 대해 조언하다니. 로제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알렉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미친 척 말을 꺼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월권행위를 지적하리라는 예측과 달리, 아르문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9575781847.jpg“……그래, 신경 쓰지.”

여러모로. 그가 사나운 얼굴로 덧붙였다. 당연하게도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바로 내일부터 그에게 대련을 신청할 작정이었다.

16549575781831.jpg‘세상에, 우리 전하가 정말 달라지긴 했구나.’

로제타는 자신이 알렉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웠음을 알지 못하고 감탄했다. 요즘 이상해진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부탁까지 들어준다니 놀라웠다.

16549575781831.jpg‘나를 정말 신뢰하나 봐……!’

로제타가 뿌듯한 마음에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르문트의 기분이 매우 나쁜 상태라는 것을. 연무장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들떠 있던 얼굴이 지금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부쩍 사나워진 눈매와 컴컴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로제타가 긴장하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화를 내면 좋겠는데, 저렇게 아무 말 없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16549575781847.jpg“그가 마음에 드나?”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이 질문에 잘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어떤 것이 최선의 답일까. 그녀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49575781831.jpg“아뇨, 오늘 처음 본 분인걸요. 그렇지만 아주 강해 보였어요. 체급도 좋으신 것 같고요. 강한 기사님들이 많을수록 전하도 더 안전해지실 테니, 다행인 일이죠.”

16549575781847.jpg“내가 더 강하다.”

아르문트가 빠르게 대답했다. 심통 난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로제타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을 껌뻑거렸다. 갑자기 제 실력은 왜 언급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49575781831.jpg“그야…… 그렇죠? 그래도 역시 기사님들이 있어야-.”

16549575781847.jpg“몸도.”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로제타가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는데도 참을 수가 없었다. 질투에 못 이겨 절로 유치한 말이 튀어나왔다.

16549575781847.jpg“내가 더 좋아.”

그가 로제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그녀의 손안에는 아르문트의 두툼하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들어왔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아르문트는 자신이 이런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반쯤 망연자실한 상태였고, 로제타 또한 멍한 얼굴로 제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에 집중하였다. 땀으로 셔츠가 젖은 탓에 근육의 질감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것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긴밀한 접촉 때문인지, 일순 밤의 아르문트와 했던 행위들이 떠올랐다. 더욱더 은밀하게 몸을 겹쳤던 그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볼이 달아올랐다.

16549575781831.jpg“그, 그렇네요! 역시 전하는 안 멋진 곳이 없으세요!”

로제타가 제 손을 빠르게 떼어내며 말했다. 어색한 말투 때문에 상황은 더욱 민망해졌다. 아르문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놈의 질투가 뭐라고, 이딴 짓을 하다니. 심지어 불결하게 땀을 흘린 상태로. 그가 잠시 미쳤었던 저 자신을 욕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자책은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 죽 이어졌다. 로제타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16549575781847.jpg“목욕해야겠군.”

아르문트가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얼른 씻고 올 테니 기다려달라는 얘기를 짧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목욕물은 이미 준비된 상태였으니 목욕은 금방 끝날 테다. 그동안 이 뻘쭘한 마음을 정리하면 딱이었다. 그리고 로제타 또한 어색한 마음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16549575781831.jpg“아, 목욕시중을 들어드릴까요?”

다만 너무 마음이 급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목욕시중. 한때 줄기차게 입에 담았던 단어라 그런지 고민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 탓에 둘 사이에 은근하게 감돌던 긴장감은 더욱 팽만해졌다. 로제타는 자신이 말해놓고선 당황했고, 아르문트는 경직되어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6549575781831.jpg“오늘 수련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마사지도 해드릴 수 있어요!”

그녀가 당황한 게 티 나면 더욱 민망해질 것 같은 마음에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소도 곁들였다. 아르문트는 잔뜩 흔들리는 시선으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어느새 그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억눌린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75781847.jpg“네게…… 그런 강요를 하진 않을 거다.”

16549575781831.jpg“네? 강요라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르문트는 혹 로제타가 하녀라는 신분 때문에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으나,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해졌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 않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마음을 교환했으니 괜찮은가? 그렇지만 처음을 이렇게 갑자기 보내는 건 좀……. 생각이 빠르게 오갔다. 심장은 기대감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진 로제타의 말이 그의 기대에 찬물을 들이부었다.

16549575781831.jpg“다른 의미는 없어요. 그냥 시중을 들어드리고 싶어서 말한 거예요.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음탕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자신과 달리, 로제타의 얼굴은 순수하기만 했다.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16549575781847.jpg‘나만 이렇게 신경 쓰는 건가?’

아르문트가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맨몸을 보아도 로제타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건지. 섭섭하면서도 이상한 승부욕이 들었다. 한편, 로제타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목욕시중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요즘 달라진 태도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저 뾰로통한 얼굴을 보니 역시나 대답은 거절인 모양이었다. 로제타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녀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선 아쉬운 것처럼 말을 이었다.

16549575781831.jpg“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16549575781847.jpg“아니.”

그리고 또다시 아르문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16549575781847.jpg“계속 친절을 거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가 언제 미간을 찌푸렸냐는 듯 예쁘게 미소지었다. 한껏 가라앉았던 목소리에는 색기가 흘러넘쳤다.

16549575781847.jpg“네 말대로 꽤 몸이 뭉치기도 해서.”

어라, 이게 아닌데. 로제타의 푸른 눈이 마구 흔들렸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문트가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셔츠가 점차 벌어지며 보기 좋은 근육이 서서히 드러났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16549575781847.jpg“마사지를 해주면 고맙겠군.”

목욕시중도 물론이고 말이야.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75781847.jpg“자, 같이 욕실로 갈까.”

어느새 셔츠를 벗어 반라의 모습이 된 그가 이내 바지 단추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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