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목욕시중2021.09.23.
‘이 인간이 미쳤나?!’
로제타가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목욕시중을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렇다고 제 앞에서 빨가벗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목욕용 반바지가 따로 있다고 들었고, 당연히 그가 그걸 입은 상태로 욕조에 들어가면 머리만 감겨줄 요량이었다. 제 주군의 나체를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의 몸을 훑어보았다. 기사 생활을 하며 남자의 반나체쯤이야 질릴 정도로 많이 본 데다가, 아르문트의 몸을 본 것도 처음이 아니었으니 그리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광증을 해결하며 민망한 관계가 돼버린 탓인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의 몸을 보는 것과는 기분이 달랐다. 차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까 자신이 만져봤던 커다란 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 오밀조밀하게 박인 복근. 이 모든 게 하나같이 보기가 좋았다. 심지어 단추가 살짝 풀린 바지 위로 드러난 장골의 라인까지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저, 저는 먼저 들어가서 준비해놓을게요! 전하께선 꼭 반바지 입고 들어오세요!”
여기 계속 있다가는 저 요망한 몸에 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로제타가 도망치듯 욕실로 뛰어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그녀를 더욱 민망하게 했다.
“이미 다 준비되어 있을 텐데. 뭘 더 준비한다고.”
“있어요, 준비할 거!”
욕실로 쏙 들어가는 로제타를 보며 아르문트가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나만 신경 쓰는 건 아니었군.’
발갛게 달아오른 볼 하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까지 척 봐도 잔뜩 긴장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게 못내 만족스러워서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물게도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부끄러움은 사라졌다. 그 대신 괜히 장난기가 솟았다.
“환복은 도와주지 않는 건가?”
아르문트가 느긋하게 바지를 벗으며 물었다. 당연히 그 또한 그녀 앞에서 제 나체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는 짓궂은 충동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욕실 문 사이로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제가 지금 손이 없어서요. 다음에 도와드릴게요.”
“그래, 기대하지.”
“반바지 입고 들어오시는 거 잊지 말고요!”
“아차,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아르문트가 이미 목욕용 반바지를 손에 들고 있었으면서 능청을 떨었다. 로제타가 경악에 차서 외쳤다.
“그런 걸 잊으시면 안 되죠!”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녀가 잔뜩 당황한 걸 알 수 있었다. 아, 귀여워라. 아르문트가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이를 곁에 두고 어떻게 좋아하지 않는 척을 해왔는지 스스로가 대단할 지경이었다.
“전하, 반바지 입고 있으신 것 맞죠?”
욕실에 딸린 마사지실에서 괜히 오일을 고르는 척하고 있던 로제타가 불안한 마음에 물었다. 뒤돌아 문을 열고 확인하면 그만일 테지만, 혹시나 아르문트가 헐벗은 상태일까 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양손에 들린 두 가지 종류의 향유만 움켜쥘 뿐이었다.
‘마사지를 해주겠다는 얘기는 왜 해선!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으며 후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아니야. 목욕시중이 뭐, 별것도 아니고. 욕실에서도 전하를 지킬 수 있으니 좋은 거야!’
그녀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욕실에도 출입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완벽한 24시간 밀착 호위가 아닌가. 실제로 가끔 제 개복치 주군이 목욕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으니, 이제 그런 걱정은 덜 수 있을 테다. 주군과 기사 사이에 이런 일로 자꾸만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로제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향유를 쏘아보았다. 마치 전투를 하러 나가는 것처럼 결연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라벤더로.”
그러나 그의 야릇한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온 순간, 더 당황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결심은 또다시 흔들리고 말았다. 어느새 아르문트가 마사지실로 들어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시야에 그의 갸름한 턱선과 높게 솟은 콧대가 보였다. 그가 그녀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것이었다. 라벤더 오일을 들고 있던 오른손에는 그의 손이 겹쳐왔다. 제 손등을 감싸는 손길이 까칠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에게 안긴 것 같은 상황에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저기 엎드려 누우세요.”
“그러지.”
그녀가 딱딱하게 명령하자 아르문트는 얌전히 마사지용 침대에 엎드렸다. 느낌상 더 장난치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그대로 그녀를 껴안았다간 자신도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목욕할 때나 입는 반바지의 재질은 너무 얇고 부드러웠다. 즉, 만약 그가 흥분을 참지 못하면 그대로 들키고 말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변태 취급을 피할 수 없을 테다.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런 참사를 당할 순 없지.’
그나마 마사지는 엎드려서 받는 거라 다행이군. 아르문트가 속으로 안도했다. 한편, 로제타는 고뇌가 가득한 얼굴로 그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뒤쪽은 잘 못 봤었는데, 광배근도 아주 널찍하니 훌륭…….’
짝!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머리는 맞아야 한다.
“방금 무슨 소리-.”
“마사지 시작합니다!”
아르문트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하자 로제타가 재빨리 등을 눌러 저지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아르문트의 등에 오일을 뿌렸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감촉이 피부에 닿자 이번에는 아르문트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의 손이 등을 문지르자 또 한 번 몸이 떨렸다.
‘힘 조절을 잘해야 해. 우리 전하 근육 파열되면 안 되니까.’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그의 근육을 훑어내렸다. 아르문트가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는 것만큼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예상외로 그녀는 마사지에 소질이 있었다. 기사로 일할 때 자주 받았던 덕인지, 어느 부분을 어떻게 만져줘야 시원할지가 한눈에 보였다.
“읏.”
허리 주변을 꾹 누르자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로제타가 깜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아프세요?”
“아니, 아니다.”
“아프시면 말씀해주세요. 더 약하게 할게요.”
“별로 안 아파. 그냥 좀…… 간지러워서.”
침대에 얼굴을 박은 아르문트가 앓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심한 로제타는 다시 마사지를 이어나갔다. 하다 보니 나름 재미있었다. 딱딱한 근육을 제 손에 가득 쥐고 주물럭거리는 느낌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반면 아르문트는 딱 죽을 맛이었다. 미끌미끌한 손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주무를 때마다 그는 로제타 모르게 신음을 삼켜야 했다.
‘미치겠군.’
조금만 더 하다가는 정말 흥분할 것 같은데. 그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분명 로제타를 떠보려고 시작한 일이고, 장난을 시작한 것도 자신이거늘. 결과적으로 자신만 곤란해졌다. 제가 판 함정에 빠진 꼴이었다.
“로제타. 힘들 텐데 이제 그만하지.”
“하나도 안 힘들어요. 아시잖아요, 저 힘 센 거.”
아니, 내가 힘들다고. 아르문트가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삼켰다.
“목욕물이 식으면 곤란하지 않나.”
“아까 제가 뜨거운 물을 더 넣어놨어요. 지금은 너무 뜨거울 거에요.”
겨우 생각해낸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으면서, 왜 하필 이럴 때만 철저한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마사지가 별로세요?”
“아니, 그건 아니다. 아주 시원하고 좋아.”
아르문트가 혹 로제타가 실망할까 빠르게 대답했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변태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야 조금 실망하는 게 나을 텐데. 그냥 그렇다고 할 걸 그랬다. 그가 후회하며 열심히 다른 변명을 짜냈다.
“그냥…… 나는 목욕을 더 좋아해서. 얼른 목욕하고 싶어.”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아르문트가 목욕을 좋아했었나? 로제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번의 회귀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럼 잠시만요, 여기만 조금 더 하고…….”
로제타가 마무리를 위해 그의 어깨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오일의 양이 과했던 탓에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으앗. 죄송해요.”
크게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상체를 그의 등에 잠시 밀착하고 말았다. 등 뒤로 부드러운 살이 닿는 게 느껴지자 아르문트는 말 그대로 돌이 되었다. 방금 제게 닿은 부분이 어딘지 깨달은 탓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나 어깨를 주무르는 로제타와 달리, 아르문트는 온몸이 딱딱해진 채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 끝났어요! 이제 욕조로 가실까요?”
로제타가 끝났다는 의미로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르문트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하?”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아로마 향이 마음에 들어서.”
“얼른 목욕하고 싶다 하시지 않으셨어요?”
“마음이 바뀌었다.”
사실 목욕도 별로 안 좋아해. 그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로제타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동안 착하게 군다 했더니, 원래의 변덕쟁이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세요, 그럼. 저는 손 좀 씻고, 뭐 좀 더 가지고 올게요. 몸에 오일이 잔뜩 묻어서.”
온몸에 오일이 묻은 로제타라니. 아르문트가 다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탄탄한 팔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안 그래도 괴로운데, 그녀가 한 말 때문에 더욱 몸이 달았다. 아까 마사지를 해달라 얘기하던 자신을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지금이었다. 로제타가 다른 곳으로 간 지금 바로 움직여야만 했다. 아르문트가 재빨리 일어나 로제타가 돌아오기 전에 욕조로 걸음을 옮겼다. 발에 오일이 묻어 미끄러웠지만 겨우 넘어지지 않고 욕조로 들어갈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을 많이 부어둔 탓인지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에 입욕제를 풀어놓은 덕에 안에 잘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잘못해서 제 상태를 들켰다가는 큰일이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그녀가 이쪽으로 다시 오지 않게 해야 했다. 그 이유가 부자연스러우면 제 상태를 유추할지도 모르니 연기도 자연스러워야 하고 말이다. 아르문트가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며 그녀의 기척을 살폈다. 욕실 밖으로 나간 로제타는 멀리까지 갔는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 분이 지났다. 아르문트의 아래 사정도 괜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로제타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목욕시중 중에 이렇게 오래 사라질 일이 무어가 있단 말인가.
‘혹시…….’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그레이한 놈에게 잡혀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더는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욕조에서 번쩍 일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전하!”
아르문트가 재빨리 다시 욕조에 앉았다. 사실상 넘어지는 것에 가까웠던 탓에 엉덩이가 얼얼했다.
“로제, 어딜……!”
“이거 가져왔어요!”
로제타의 품에는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한가득 안겨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오리 가족 인형이 보였다. 아이들 목욕용 장난감이었다.
‘도대체 저딴 건 어디서 난 거야? 굳이 또 왜 가져 온 거고?’
아르문트가 어처구니가 없어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귀여운 오리 가좍-!”
로제타가 오리 가족을 자랑하려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나갈 때와 달리 바닥이 너무 미끈거렸다. 아르문트가 오일이 묻은 발로 걸어 다닌 탓이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미끄러지려는 찰나였다. 아르문트가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덕분에 그녀는 뒤로 넘어져 뒤통수가 깨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풍덩! 다만, 아르문트가 들어가 있던 욕조 속에 빠지는 것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퐁당, 퐁당, 퐁당! 오리들이 연달아 물에 빠졌다. 그러나 그 우스꽝스러운 장난감은 더 이상 아르문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덮치듯 제 위에 누운 로제타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