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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첫 키스 (60/145)

60화. 첫 키스2021.09.26.

무언가를 가지고 오겠다며 욕실을 떠난 로제타는 초조한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사실 가져올 게 있다는 말은 그저 변명이었을 뿐, 그녀가 진짜 나온 이유는 욕실 안의 그 미묘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증기가 많고 너무 습해서 그런 걸까,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계속해서 달아올랐고 심장은 지나치게 뛰어댔다. 특히, 마사지하다 아르문트의 등에 엎어졌을 때는 정말 진심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전쟁 중에도 단 한 번도 도망가지 않았던 자신이 말이다. 로제타는 처음 기사가 될 때 선언했던 ‘기사의 맹세’를 마음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도 하녀 생활을 하며 갈고닦은 연기 덕에 아무렇지 않은 척 발랄하게 굴 수 있었다. 그가 엎드리고 있어서 어색한 표정도 들키지 않았다.

16549576166905.jpg“후우우…….”

로제타가 복도에 멈춰 서서 깊게 심호흡했다. 욕실에서 참았던 숨을 이제야 몰아쉬는 것이었다. 몇 번 심호흡한 후에야 제대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빳빳하게 긴장했던 몸도 조금이나마 안정되었다.

16549576166905.jpg‘그나저나, 뭘 가져가야 하지? 아무것도 안 들고 돌아가면 이상할 거 아냐.’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주방에 가서 차가운 차라도 받아올까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심호흡을 하느라 너무 시간을 많이 소비한 상태였다. 주방까지 다녀오면 이미 아르문트의 목욕물이 얼음장처럼 식었으리라. 그렇다고 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라, 로제타는 초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복도의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눈길이 마주쳤다. 로제타와 비슷한 붉은 머리에 녹안을 지닌 기사, 러크였다.

16549576166914.jpg“어, 로제타! 또 보네.”

16549576166905.jpg“러크 경.”

러크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 미소를 보는 대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무언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16549576166905.jpg“그거, 뭐에요?”

16549576166914.jpg“아, 이거?”

그녀의 시선 끝을 확인한 러크가 제 양손을 내밀어 보였다. 정확히는, 소중하게 감싸들고 온 귀여운 오리 가족 장난감을 보여주었다.

16549576166914.jpg“목욕용 오리들이야! 귀엽지? 두 살짜리 조카에게 생일선물로 주려고 샀어. 정확히는 멜라니의 조카지만.”

선물을 안 주면 멜라니가 분명 이번에도 준비를 안 했냐면서 난리 칠 거거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멜라니의 폭력성에 대해 투덜거렸다.

16549576166914.jpg“이름도 지었는데, 첫째는 도도고 둘째는 마릴린…….”

16549576166905.jpg“고마워요, 제가 좀 쓸게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러크의 손 위에서 안전하게 쉬고 있던 귀여운 오리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무려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던 로제타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었다.

16549576166914.jpg“아, 안 돼! 도도야! 마릴린! 내 소중한 오리 가족이……!”

러크가 좌절한 얼굴로 외쳤다. 그러나 이미 납치범, 로제타는 사라진 뒤였다. 뛰어가는 게 어찌나 빠른지 기사단장의 뺨을 칠 정도였다. 그녀에 대해 소문을 냈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가. 러크가 제 손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졌다. 아직 그들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더 큰 불행은 그 뒤에 나타났다.

16549576166914.jpg“여기서 뭐 해, 러크?”

16549576166914.jpg“히익, 메, 메, 멜라니……!”

갑작스러운 멜라니의 등장에 러크가 펄쩍 뛰었다.

16549576166914.jpg“뭐야? 왜 이렇게 놀라?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멜라니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추궁했다.

16549576166914.jpg“참, 우리 조카 줄 선물은 샀다고 그랬지? 저번처럼 까먹은 거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16549576166914.jpg“아니, 그게, 분명 샀거든? 방금까진 여기 있었는데…….”

16549576166914.jpg“이럴 줄 알았어! 또 까먹어놓고 샀다고 거짓말을 해?!”

멜라니가 예쁜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망설임 없이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눈 뜨고 코를 베인 러크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16549576166914.jpg“악! 정말이야! 로제타가 내 소중한 오리들을 가져갔다고!”

16549576166914.jpg“이게 어디 우리 로지를 또 모함해? 걔가 그럴 앤 줄 알아?! 넌 더 맞아야겠다. 이리 와!”

16549576166914.jpg“잠깐만, 멜라니, 아악!”

멜라니는 마치 철부지 아들을 혼내듯 러크의 귓불을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러크가 자신의 귀에 불이 난 것 같다며 사정해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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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 모든 일의 원흉, 로제타는 자신이 러크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음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욕실로 뛰어갔다. 목욕용 오리 장난감이라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아르문트의 나이와는 영 맞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거면 분위기를 장난스럽게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16549576166905.jpg‘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오리들과 함께 목욕하는 아르문트의 모습이 나름 귀여울 듯했다. 아마 멋지고도 귀여운 외모 덕이리라. 물론, 몸은 전혀 귀엽지 않았지만.

16549576166905.jpg‘못된 생각!’

짝! 로제타가 또다시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그 탓에 하마터면 오리들을 떨어트릴 뻔했다.

16549576166905.jpg‘주군을 두고 계속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아르문트의 어깨가 널찍하고 광배근이 헉 소리가 나올 만큼 훌륭하다 해도, 가슴부터 이어지는 근육의 곡선이 매우 매력적이라 해도! 감히 주군의 몸을 이렇다저렇다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상한 오해를 하질 않나, 그의 몸에서 시선을 못 떼질 않나. 아무래도 반복되는 회귀에 정말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16549576166905.jpg‘로제타 메이필드, 정신 차리자.’

로제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재차 다짐했다. 그러곤 용감하게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귀여운 오리 가좍!’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로제타는 미끄러지고 말았고, 그런 그녀를 아르문트가 붙잡아 욕조 안으로 끌어당겼다. 차라리 그냥 두었더라면 백 텀블링을 해서라도 잘 착지했을 텐데. 아니면 그냥 후방낙법을 사용해 크게 다치지 않고 넘어지던가. 로제타가 아르문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어쩐지 요즘 자꾸 이런 식으로 넘어지는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오리들과 함께 제 몸이 욕조 안으로 쓰러지는 걸 느끼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장미 향이 나는 목욕물이 제 몸을 덮쳐왔다. 제대로 넘어지긴 했지만 크게 아프진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로 아파할 로제타가 아니거니와, 아르문트가 그녀를 빠르게 감싸 안은 덕이었다. 그러나 아픈 것과 별개로 로제타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 아래 아르문트의 피부가 느껴졌다. 손바닥 아래에는 그녀가 조금 전 그리도 빤히 쳐다보던 근육이 닿아왔고, 다리 사이에는 그의 다리가 끼워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자세가, 남들이 보기에 몹시 외설적이리라는 것쯤은 말이다. 그러나 이대로 영원히 눈 감고 있을 순 없다. 로제타는 꼴깍 마른침을 삼킨 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툭. 속눈썹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볼 위로 떨어지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녀가 몇 번 더 눈을 감았다 떴다. 흐려졌던 시야가 점차 깨끗해지며 아르문트의 얼굴이 드러났다. 물에 젖어 이리저리 흐트러진 앞머리, 미세하게 흔들리는 황금색 눈동자, 높게 솟은 코와 붉은 입술.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로제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잡아먹을 듯 격렬했으나 앙다문 입매는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했고, 코를 찌르는 장미 향 속에 흩어지는 그의 체취는 귀족적이면서도 관능적이었다. 악마에게 홀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로제타는 얼른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숨도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마치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옭아맨 것만 같았다. 매혹된 것은 아르문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욕심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각진 턱에서 괴로움이 드러났다.

16549576223021.jpg‘안 돼.’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중얼거렸으나 차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제 위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로제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속눈썹도, 말갛게 반짝거리는 눈동자도, 예쁘지 않은 구석이 하나 없었다. 여름 장미처럼 싱그러운 저 입술에 제 입을 맞출 수 있다면. 그가 다시금 이를 아득 갈았다.

16549576223021.jpg‘안, 되는데…….’

빌어먹을. 도대체 로제타는 왜 이렇게 예쁘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숨결 한 조각까지 전부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아르문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져 미친놈이 돼버린 건지, 아니면 원래 사랑이란 이렇게 사람을 몽땅 홀려놓는 건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야 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그였다. 그러나 고작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 하나만으로 그의 세상이 전부 뒤바뀌었다.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아르문트를 비로소 살고 싶게끔 만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정말 미친 거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제 앞의 여인이 너무나 소중하고도 애틋했다. 불면 날아갈까 염려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당장 여린 목덜미에 이를 박고 싶다는 충동도 느꼈다.

16549576223021.jpg‘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아르문트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자꾸만 고개를 치드는 욕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급하게 다가가면 로제타가 놀랄지 모르니 적어도 지금은 진정해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아르문트가 얼른 로제타를 일으켜주려는 목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16549576166905.jpg“읏……!”

단단한 손가락이 가느다란 허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미끌미끌한 촉감이 피부를 간지럽히자 로제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16549576166905.jpg“저, 전하…….”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다. 제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 부끄러워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문트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가 단숨에 로제타의 뒷머리를 잡고 자신에게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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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비스듬히 겹쳐졌다.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에 로제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녀가 상황파악을 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이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따끔한 고통에 절로 입술이 벌어지자 아르문트는 기다렸다는 듯 더욱 깊숙이 안을 파고들었다. 붉은 살덩이가 부드럽게 그녀의 입안을 헤집었다. 뾰족한 혀끝이 여린 살을 훑자 로제타는 움찔 몸을 떨었다.

16549576166905.jpg“흣!”

생경하고도 짜릿한 쾌감에 로제타가 신음을 흘렸다.

16549576166905.jpg‘미쳤, 미쳤나 봐……!’

이것은 로제타의 첫 키스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게 도대체 몇 번째 키스인지 알 수 없었으나, 둘 다 제정신으로 입을 맞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 주군과 키스하며 신음을 흘린 것이었다. 로제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탓에 그를 제대로 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은 바들바들 떨렸고 손은 허공에서 방황하다 그의 가슴을 짚었다. 밀어내기 위함이었으나 아르문트에게 그것은 또 다른 자극이 될 뿐이었다.

16549576223021.jpg“큿……!”

제기랄, 미치겠군. 나지막이 신음을 흘린 그가 더욱 갈급하게 숨결을 훔치고 혀를 옭아맸다.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몸짓이 그답지 않게 거칠었다. 황금색 눈동자 또한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오래도록 굶은 짐승이 제 먹잇감을 탐하는 것만 같았다.

16549576166905.jpg“자, 잠깐……!”

16549576223021.jpg“하아…… 로제.”

로제타가 겨우 고개를 돌리고 숨을 몰아쉬자 아르문트는 야릇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속살거렸다. 그리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가 집요하게 입술을 맞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격렬한 입맞춤 탓에 로제타와 아르문트의 몸은 물속에서 더욱 밀착되었다. 근육이 민감한 곳을 스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 떨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 아래로 경직된 몸이 느껴졌다. 여러 차례 마주한 현상이었으나 지금만큼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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