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망측하군2021.10.03.
아르문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집중해보았지만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 거리에서 기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잘못 들은 모양이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로제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입술을 떼려는 찰나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테오도르 신관이 왔습니다.”
작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리처드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어떻게?’
아르문트가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로제타를 응시했다.
‘나도 느끼지 못한 기척을 로제타가 느낄 수 있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르문트는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은 덕에 어지간한 기사들보다도 귀가 밝은 편이었다. 자객의 방문이 잦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에 반해 로제타는 힘이 아주 세다곤 하지만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보다 빠르게 기척을 눈치채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전하?”
안 가세요?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아르문트가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로제타의 얼굴을 보니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별걸 다 의심하는군.’
고작 이런 거로 로제타를 의심하다니, 생각이 너무 나간 것 같았다. 숨기는 게 있기는 무슨. 저 순수한 얼굴로 숨기긴 뭘 숨기겠는가. 방금은 그냥 자신이 꿈속의 입맞춤에 대해 생각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리라. 아르문트가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에 실소하며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곤 아직 묶지 않은 붉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제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더 자. 식사 시간에 맞춰 부를 테니까.”
사르륵.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르문트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손을 떼어냈다. 그는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힌 방에 홀로 남은 로제타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또 시작이다.’
심장이 또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당황할 만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고작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 부근이 간질간질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머리는 왜 쓰다듬는 거람.’
로제타는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아르문트를 탓했다. 그가 자꾸 안 하던 행동을 하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몇 번 크게 심호흡한 후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르문트는 쉬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와 테오도르 신관을 단둘이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테오도르 신관이 그녀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할지도 모르니까. 예를 들어, 로제타가 단 한 번도 제대로 신전을 찾아가 치유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로제타는 형식상의 노크를 한 후 아르문트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아르문트를 치유하고 있던 테오도르 신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혹 집중이 깨질까 그녀는 가볍게 목례했고, 테오도르 신관 또한 눈짓으로 대답했다. 한편 아르문트는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몽땅 풀어헤친 상태였다. 맨살이 닿아야 치유 효과가 더 좋기 때문이었다. 셔츠 사이로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훌륭한 근육의 모습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어제 저걸 만졌었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금 얼굴이 달아오르려 했다.
“좀 더 자라니까.”
아르문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로제타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알면서도 그녀를 꼭 유리 인형처럼 소중히 대하곤 했다. 이런 종류의 걱정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로제타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미 다 깼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말도 참 안 듣는군.”
아르문트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로제타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어제 그와 입 맞추던 중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르문트는 치유의 빛에 시야가 가려져 그녀가 당황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그녀에게 이왕 온 것 편하게 앉아 있으라며 손짓할 뿐이었다. 로제타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은 후 아르문트가 앉은 소파 근처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아르문트의 뒤에 서 있던 리처드는 차게 식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커플 사이에 있으니 제 존재가 아예 사라진 것 같았다. 얼른 치유가 끝나서 이 장소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삼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테오도르 신관의 손에서 나온 빛무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끝났습니다, 전하.”
휴. 테오도르 신관이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말했다.
“요즘 몸은 좀 어떠신가요?”
“덕분에 아주 좋다. 잠도 더 잘 자고. 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을 정도야. 고맙군.”
아르문트가 씩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황태자 전하의 감사 인사라니! 테오도르 신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해요! 그 비싼 마력석도 엄청나게 많이 지원해주셨잖습니까. 고작 저 같은 걸 위해…….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그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아르문트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로제타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상황이 그녀가 의도한 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는 게 퍽 만족스러웠다. 마력석은 마법사나 신관의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자원으로, 워낙 귀해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딱히 사치하는 일이 없는 아르문트에게는 남는 것이 돈이었고, 핵심인물 중 하나인 테오도르 신관에게 고작 마력석쯤이야 얼마든지 지원해줄 수 있었다. 그 결과 테오도르 신관은 다른 신관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석을 누리게 되었고, 덕분에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이대로만 가면 머지않아 대신관과도 충분히 대적할 만큼의 신성력을 갖게 될 것이다. 로제타가 이렇게 생각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내 사람에게 그 정도 지원은 당연하다.”
아르문트가 셔츠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걸로도 부족하지. 그대는 로제타를 살려준 은인이니.”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제타의 얼굴에서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저 말이 나오면 안 되는데……! 그녀가 다급히 눈동자를 굴려 테오도르 신관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고 있었다.
“예? 저는 딱히 한 것도…….”
“전하!”
로제타가 재빨리 아르문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확히는, 은근슬쩍 그의 귀를 막았다. 아르문트는 그녀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귀만 붉혔다.
‘믿을만한 사람만 있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스킨십이라니. 우리 로제타는 대담하기도 하지.’
그가 팔불출이나 다름없는 생각을 하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그런데 방금 희미하게 노크 소리 들리지 않았나요?”
로제타가 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나머지 셋은 눈만 껌뻑거렸다. 그런 소리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착각을 짚어주려 했다. 그러나 입술을 떼려는 찰나, 놀랍게도 정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전하, 러크입니다.”
오늘따라 귀가 안 좋은가? 아니면 로제타의 손에 막혀서 잘 안 들렸던 건가?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흘끗 올려다본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쩐지 러크의 목소리에 긴장이 역력했다. 그에 아르문트는 손님의 정체를 빠르게 유추해냈다. 어제 기별을 받았던 덕에 맞추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 대마법사님이십니다……!”
역시 그렇군. 아르문트가 리처드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는 다시금 목 부분의 옷깃을 끌어 올렸다. 지금부터 바짝 긴장해야 했다. 이내 커다란 문이 열리고 발레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리안은 항상 그랬듯 화려하게 치장한 차림이었다. 귀 아래에는 금빛 귀걸이가 반짝거렸고, 펄럭거리는 검은색 로브 안에는 딱 붙는 상의가 돋보였다.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목까지 올라오는 상의의 가슴 부근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파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커다란 흉부의 모습에 로제타가 짧게 감탄했다. 그녀야 처음 본 차림이 아니었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망측하군.’
아르문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평가했다. 리처드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평생을 검만 잡아 온 그들로서는 발레리안의 독보적인 패션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발레리안이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본 그의 미소는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신관님도 또 뵙는군요.”
그가 테오도르 신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테오도르 신관은 허둥지둥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이군, 윈저프리드 경. 앉게. 차를 새로 내오지.”
“차는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마시고 와서.”
발레리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하며 자연스럽게 소파에 착석했다. 아르문트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대흉근의 모습에 시선을 슬쩍 피했다. 차마 남자 놈 가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아예 상의를 벗고 대련하는 상황이면 몰라, 저렇게 은근히 드러나는 건 더더욱.
“내게 말할 것이 있다고?”
“예, 전하. 정확히는 드릴 것이 몇 개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발레리안이 무언가를 찾는 듯 로브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가슴골이 더욱 강조되었다. 시선을 피한 아르문트는 다행히 이러한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그 대신 더 신경 쓰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홀린 듯 발레리안을 쳐다보고 있는 로제타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마법사의 외형이…….’
금발, 벽안, 미남. 모든 게 로제타의 취향에 맞아떨어졌다. 눈앞의 망측한 사내는 그야말로 제 연인의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르문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뚝 솟았다. 시도 때도 없이 질투하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차마 자제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이겁니다.”
발레리안의 목소리에 아르문트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형태의 물건이 시야에 담겼으니, 바로 티스푼이었다.
“이 스푼은…….”
“독 검출용 마법 물품입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현재까지 나온 마법 물품 중에서는 가장 많은 개수의 독을 검출할 수 있습니다.”
아르문트의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친분도 없는 대마법사의 입에서 ‘독’이 나온 것을 마냥 좋게만 해석할 순 없기 때문이었다.
“전하께 드리고자 제가 직접 개발한 것이니, 다른 마법사를 찾아가도 이보다 나은 건 얻지 못할 겁니다.”
발레리안이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직접 개발까지 했다는 말에 아르문트의 얼굴은 더욱 진지해졌다. 무얼 원하는 거지? 지금까지 많은 유혹을 물리고 중립을 고수하던 대마법사가, 도대체 왜 갑자기? 많은 의문이 머리를 빼곡히 채웠다. 혹 황후의 첩자인 건 아닐까 의심도 들었으나 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진정 첩자라면 굳이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었다. 혼자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아르문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내게 이런 걸 주는 거지?”
“딱히 목적이라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만.”
“바라는 게 무엇이냐는 말이다.”
“글쎄요.”
아르문트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대마법사의 장난스러운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아르문트의 사나운 기운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턱만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응시했다.
“아, 마침 갖고 싶은 게 하나 있군요.”
시선이 마주하자 발레리안은 또다시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시선 교환에 로제타는 당황하여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저 붉은 머리 하녀를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발레리안은 예쁜 미소와 함께 폭탄선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