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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발레리안의 진심 (63/145)

63화. 발레리안의 진심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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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문트의 눈썹이 사납게 뒤틀렸다. 눈앞의 상대는 무려 발레리안 윈저프리드다. 천하의 황후 또한 눈치를 보는 그 대마법사. 황태자인 아르문트도 어느 정도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상대인 것이다. 무뚝뚝한 성격상 아주 사근사근하게 굴지는 못할지라도, 불쾌한 심정을 대놓고 드러내서는 안 된다. 머리 좋은 아르문트가 이를 알지 못할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차마 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참지 못했다. 다른 사내놈이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제 연인을 달라 요청하는데, 어떤 사람이 가만히 웃고 있을 수 있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16549576628724.jpg‘전하, 안 됩니다!’

아르문트의 곁에 서 있던 리처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제 주군의 몸에서 살벌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느낄 정도라면 대마법사인 발레리안 또한 분명 인지했으리라.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 리처드가 이런 의미를 담아 아르문트에게 재차 눈짓했다. 아르문트는 커다란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9576628732.jpg“지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꾹꾹 눌러 담은 분노가 느껴졌다.

16549576628732.jpg“뭐라 했나?”

최대한 차분히 말하긴 했지만, 눈빛이 워낙 사나운 탓에 별 효과는 없었다. 어디 다시 한번 지껄여봐. 또 헛소리하면 네 혀를 뽑아줄 테니. 황금색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1654957662875.jpg‘기세 한번 살벌한데.’

발레리안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위압감에 못 이겨 당장 무릎을 꿇을 정도였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1654957662875.jpg“저 하녀를 제게 달라 했습니다, 전하.”

발레리안이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눈빛도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해맑기만 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리처드가 경악했다. 어쩌면 로제타와 전하의 관계를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대마법사의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겉보기에 로제타는 일반적인 하녀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모른다기에는 이미 소문이 너무 자자했다. 황태자궁 내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본궁에서도 황태자의 정부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떠돌곤 했다. ‘황궁 내에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라고 주장했던 대마법사가 이렇게 유명한 소문을 듣지 못했다는 건 아무래도 영 믿기지 않았다. 다른 가능성을 계속 떠올려보아도 가장 가능성이 큰 가정은 발레리안이 아르문트에게 모르는 척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르문트 또한 비슷한 판단을 했는지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황금빛 눈동자 위로 일렁거리던 경계심이 어느새 적의에 가까워졌다. 용케도 바로 분노를 표하진 않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가장 흉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발레리안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인 로제타였다. 아르문트와 리처드는 발레리안을 쏘아보느라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미 한참 전부터 표정 관리에 실패한 상태였다. 다른 이들 앞에선 사랑스럽고 무해하게만 보였던 얼굴이 시선만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을 것처럼 살벌해졌다.

16549576628781.jpg‘우리 발레리……. 멱을 따줄까, 아니면 허리를 분질러줄까?’

로제타가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죽고 싶은지 여부는 묻지 않았다. 그건 이미 확정되었으니까. ‘어떻게’ 죽고 싶냐는 게 질문의 핵심이었다. 그녀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고생하며 차지한 전속 하녀 자리인데, 친구놈이 언질도 않고 눈앞에서 훼방을 놓다니! 장난인 건 알고 있지만 듣는 사람이 즐겁지 않다면 그건 장난이 아니지 않은가. 로제타는 아르문트와 리처드가 정신이 팔린 사이 손을 들어 올려 검지로 목을 쓱 긋는 시늉을 했다. 명백한 살해 협박에 발레리안은 짧게 웃음을 삼켰다. 이거 계속하면 정말 혼쭐나겠는데. 좋지 않은 예감에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시선을 피한 것이었다.

1654957662875.jpg“저 하녀가 안 된다면 다른 사용인이어도 좋습니다. 요즘 연구실 인력이 워낙 부족해서요.”

발레리안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로제타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고생고생해서 마법 물품도 만들어왔는데 이 정도 장난도 못 치는가 싶어 억울하다가도 그녀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은 심정에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이러한 행동에 아르문트와 리처드의 표정이 동시에 묘해졌다.

16549576628724.jpg‘정말 모르고 한 소리였나?’

시비를 건 것이라기에는 발레리안의 태도가 너무 공손했다. 고개를 숙이고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모습이 꼭 부모님에게 혼나고 시무룩해진 아이 같았다. 아르문트가 대놓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놀라웠다. 정말 그가 아르문트를 적대시한다면, 이런 것 하나로도 빌미를 잡아 공격했을 테다. 어쩌면, 소문을 들었지만 그 주인공이 로제타라는 것은 몰랐던 걸지도 모른다. 사사로운 소문에 관심을 두기에는 워낙 바쁜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르문트는 슬쩍 시선을 돌려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냉큼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다지 기분 나쁜 것 같지 않자 아르문트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49576628732.jpg“……인력 지원이라면, 굳이 나를 통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

황실은 발레리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갖 귀한 대접을 했다. 그가 요청한다면 차고 넘치는 인력쯤이야 얼마든지 지원해줄 것이다. 심지어 황실이 아니더라도 발레리안을 지원하고 싶어 하는 세력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천재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보상이랍시고 사용인을 달라는 발레리안의 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1654957662875.jpg“저는 굳이 전하를 통하고 싶습니다만.”

발레리안이 두 눈을 곱게 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대답에 아르문트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여태껏 웬만한 후원을 모두 마다하던 대마법사가 직접 지원을 요청한다는 것은 즉…….

16549576628732.jpg‘내 편에 서겠다고?’

발레리안이 처음으로 정치판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었다. 아르문트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발레리안을 찬찬히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대마법사의 지원이라니. 아르문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기회였다. 대마법사는 그를 포함한 모두에게 0순위 영입 대상이었으니까. 암살의 위협에서 안전해질 수 있는 것은 물론이오, 그를 얻으면 국민의 지지도 얻을 수 있을 테다. 발레리안은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지지받는 자로, 그야말로 황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데다, 여태껏 중립을 고수하던 그를 영입했다는 것만으로 아르문트는 능력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건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였다. 리처드와 테오도르 신관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넘실거렸다. 저 사람만 있으면……! 그들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아르문트의 얼굴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가진 것을 몽땅 잃어본 경험이 있는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로 너무 큰 행운은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발레리안을 환대하는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16549576628732.jpg“어째서인가.”

1654957662875.jpg“예?”

16549576628732.jpg“어째서 나를 선택한 거지? 분명 1황자는 경에게 더 많은 보상을 약속했을 텐데.”

나는 그만큼의 재물은 보장할 수 없고. 아르문트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16549576628724.jpg‘그런 말은 왜 하십니까? 마음이라도 바뀌면 어쩌려고……!’

리처드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에게는 제 주군이 굴러들어온 복을 뻥 차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주변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차분히 발레리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발레리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배신할 이유 또한 언제고 생길 수 있으니까. 고작 이런 질문으로 바뀔 마음이라면 오히려 이쪽에서 사양이다.

1654957662875.jpg“당연한 선택입니다. 전하께서는 라그나르의 정통한 황태자이시니까요. 전하의 손으로 만들어나갈 라그나르가 무척 기대되기도 하고요.”

발레리안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변이 좋은 그답게 아부하는 목소리도 유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완벽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아르문트는 썩 만족스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16549576628732.jpg“그게 그대의 진심인가?”

진심. 이 단어가 제 입에서 나올 줄이야. 아르문트가 생경한 기분에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피부가 간지러울 정도로 어색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발레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6549576628732.jpg“보기 좋게 꾸며낸 말은 아니고?”

리처드는 이제 포기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면 아르문트가 발레리안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발레리안 또한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바로 화를 내거나 돌아서는 대신, 그저 아르문트를 가만히 마주보는 것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점차 얼굴에서 자리를 감췄다. 여우처럼 휘어졌던 눈매에서도 감정이 사라졌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발레리안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다지 해사하지만은 않은 민낯이.

1654957662875.jpg“……좋습니다. 전하께서 솔직히 말씀하셨으니 저도 솔직히 말하지요.”

발레리안이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목소리는 여전히 유들유들했지만, 어딘가 차가운 데가 있었다.

1654957662875.jpg“방금 건 거짓입니다. 저는 딱히 이 제국의 존망에 관심 있는 편은 아니라서요.”

오히려 황실은 싫어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충격적인 소리였다. 라그나르 제국과 황실을 대표하는 대마법사 발레리안이 사실 제국의 존망 따위에 관심이 없다니. 황실을 싫어한다는 소리를 황태자 앞에서 하다니! 리처드와 테오도르 신관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16549576628732.jpg“그렇다면 왜 나를 돕겠다는 거지?”

지금처럼 중립을 유지하지 않고. 정작 아르문트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며 덧붙였다.

1654957662875.jpg“……제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발레리안이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달콤했다.

1654957662875.jpg“소중하다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만큼 귀하고 또 귀한 사람이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곧 제가 원하는 게 될 만큼.”

내 가족, 내 장미, 내 모든 것. 로제타. 발레리안이 소리 내는 것조차 아까운지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1654957662875.jpg“그 사람이 전하를 지지합니다. 아니, 고작 지지 수준이 아니라 아주 흠모하지요. 그래서, 저도 전하를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발레리안이 또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잠시 잃어버렸던 가면을 다시 고쳐 쓴 모양이었다.

1654957662875.jpg“전하께서 원하시던 대답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이게 제 진심입니다. 답변이 되었습니까?”

16549576628732.jpg“……그래.”

아르문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사람의 의견 때문에 자신을 지지한다니. 그 사람이 만약 마음을 바꾸면 그만인 일이 아닌가. 불안해 마땅할 이유였으나 아르문트는 오히려 후련했다. 그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16549576628732.jpg“그럼 그 사람의 호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가 더 노력해야겠군.”

아르문트가 입꼬리를 휘어 미소지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건만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러자 오히려 발레리안의 인상은 어두워졌다.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잘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사실 아까 로제타를 달라고 했던 말도 순전히 장난만은 아니었고 말이다. 로제타가 뿌듯한 얼굴로 아르문트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자 다시금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녀의 하얀 목 위로 무언가 붉은 자국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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