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변화의 계기2021.10.10.
‘역시 우리 전하야.’
로제타가 흐뭇하게 웃으며 아르문트를 바라보았다. 개복치며 고양이에 비유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아르문트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단지 출중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곧은 심성과 당당한 목소리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열게 했다. 방금도 그랬다. 몇 마디 대화로 그 까다로운 발레리안의 속내를 끌어내지 않았는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전 회차의 전하는 못 했던 일이기도 하고.’
지난 회차에서는 발레리안이 이렇게 제 본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를 물심양면 돕기는 했으나, 이렇게 일찍 찾아온 것도, 솔직한 마음을 밝힌 것도 이번 회차가 처음이다. 지금의 아르문트는 아직 나이가 어려 그리 능숙하지 못하긴 하나, 전에 없는 압도감과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나도 개입할 거야.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걱정 마, 로즈.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내가 그렇게 되게 할 테니까.”
문득 발레리안이 진지한 모습으로 꺼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말을 들었을 때는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말하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 지난 회차처럼 돕겠다는 의지 표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한 대로, 정말 이번 회차는 무언가 달랐다. 발레리안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그녀를 도와주었고, 아르문트 또한 전에 없는 의지를 보였다.
‘혹시, 발레리가 무언가 알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의문에 로제타가 슬며시 시선을 옮겼다. 마침 발레리안이 바라보고 있던 터라 금세 눈길이 겹쳤다. 로제타는 살며시 웃으려다 말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시선의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눈치챈 탓이었다. 그는 그녀의 목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제 아르문트가 키스 마크를 남긴 바로 그 자리를. 발레리안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그 자국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듯이. 이를 인식함과 동시에 로제타는 손을 움직였다. 짝! 로제타가 느닷없이 손바닥으로 제 목을 내리쳤다.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리자 모두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어휴, 요즘 모기가 많아서…….”
이래서 여름은 싫다니까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세게 때린 탓에 피부가 얼얼했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눈치 빠른 발레리안이 붉은 자국의 정체를 알아챌지도 모르니까. 아니나 다를까 발레리안은 그녀의 행동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를 붙잡고 무얼 숨기고 있냐 묻고 싶었지만, 추궁하기에는 시기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았다. 아르문트와 기사, 신관 모두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을 응시했다. 아르문트의 말에 대한 반응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간 둘 사이의 관계를 들킬지도 모른다. 물론 발레리안이야 들킨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달갑기까지 했다. 그리 한다면 로제타에 대한 제 애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쓸데없는 사내놈들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걸 막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로제타는 예전부터 그와 공개적으로 엮이는 걸 꺼렸다. 하녀로 일하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내 욕심 때문에 우리 로즈가 싫어하는 짓을 할 순 없지. 발레리안은 주먹을 말아쥐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휴. 로제타가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찾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행여나 그에게 피해라도 간다면…….”
발레리안이 차가운 얼굴로 말을 줄였다. 굳이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그 뒤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감히 대마법사의 소중한 사람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럴 생각 없다.”
그대와 관계가 깊다는 이유로 누군가만 편의를 봐줄 생각도 없고. 아르문트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의 대답에 발레리안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원래 황태자가 이런 느낌이었나? 얼마 전에 독대했을 때만 해도 훨씬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그리 오래전도 아니거늘 사람이 확 바뀐 것 같았다. 황태자가 달라졌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그 변화가 실감이 났다. 제 솔직한 심정을 유도해낸 것도 그렇고, 이렇게 차분히 반응하는 것도 무척 달랐다. 로제타와는 달리, 발레리안은 변화의 계기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담은 이쯤 하고. 다음 물건을 설명해 드리죠.”
발레리안이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또 다른 마법 물품을 꺼내 들었다. 로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꺼내 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의뢰한 건 독 검출용 마법 물품뿐이었기에 궁금증이 일었다.
“수정구?”
테오도르 신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지 헙 하고 다급히 입을 다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의 말대로, 발레리안의 손에는 투명한 수정구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생김새가 워낙 낯설어 용도가 무엇일지 짐작이 불가능했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일종의 수정구입니다. 아주 특별한 물건이죠. 무려 저주의 기운을 탐지할 수 있는.”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저주를 탐지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라그나르 제국의 경우 아직 저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탓에 확실하게 알려진 정보도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상황에 발레리안이 가져온 마법 물품은 그야말로 세기의 혁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져온 것이라면 사기라고 믿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런……?”
“그야, 저니까요.”
아르문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발레리안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원래라면 제 친구의 지나친 자신감을 못마땅해했을 로제타 또한 이번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발레리안에게 저주에 대해 말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대단한 결과가 나오리라곤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안이 저러한 마법 물품을 만들어낸 것은 그녀가 기억하는 한 몇 년은 지난 뒤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몇 년을 앞당겨 연구를 끝낸 것이었다.
‘우리 발레리, 최고야……!’
그녀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시선으로 말했다. 그에 발레리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설명했다.
“사실 저는 정화마법에는 그다지 밝지 못합니다. 전하를 위협에 몰아넣는 것이 단지 독만은 아닐 것 같아 만들어보긴 했지만, 아쉽게도 연구가 부족해 품질이 썩 좋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직접 쓸 수도 없고, 발동조건도 꽤 까다롭죠.”
아무래도 이것저것 제약이 많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사람에게 직접 쓸 수는 없구나. 로제타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쩝 다셨다. 지난 회차에도 그랬었다. 아르문트의 방을 검사해보았으나 별다른 저주는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들어가는 재료가 워낙 희귀해 한 번밖에 쓸 수 없습니다. 재료를 최대한 더 구해보겠지만, 장담하긴 어려워요.”
“발동조건은 무엇이지?”
“신성력이 주입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신성력이요.”
발레리안이 쓱 시선을 옮겨 테오도르 신관을 응시했다. 유명한 대마법사가 자신을 쳐다보자 테오도르 신관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귀여운 얼굴 위로 용맹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가 한쪽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민망했는지 곧 팔은 내렸지만, 눈빛은 아주 당당했다.
“필요한 양이 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할 수 있어요!”
발레리안의 경고에도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테오도르 신관. 마음은 고맙지만 그만두게. 확실하지도 않은 저주 때문에 그대를 위험하게 둘 순 없어.”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아르문트 또한 테오도르 신관을 만류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가진 것보다 많은 신성력을 끌어쓰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확인 범위는 어떻게 되나요?”
로제타가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존대가 귀여워 발레리안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 대답했다.
“어림잡아…… 이 방 크기 정도는 되겠군요.”
대마법사가 하녀에게 말을 높이다니. 당황스러운 장면이었으나 다행히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발레리안이 워낙 별종이기에 그럴 수 있다 여기는 그들이었다. 로제타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발레리안의 대답을 곱씹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침실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회차와 이번 회차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 한 번쯤 확인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했다. 다만 테오도르 신관의 목숨이 달렸다면 그건 좀 생각해볼 문제였다.
“전하, 절 믿어주세요.”
할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 신관이 재차 주장했다. 아르문트는 고민하듯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를 믿지.”
그러자 테오도르 신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가 기쁨의 의미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 둘 곳을 찾은 기쁨 때문일까. 지금은 황태자 전하에게 인정받았다는 뿌듯함이 두려움보다 더 컸다.
“그럼 이곳에 손을 가져다 대세요. 일정 정도의 신성력이 주입되면 수정구가 작동할 겁니다.”
발레리안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마법 물품을 건네주었다. 허여멀건 얼굴의 어린 신관이 죽든 살든 딱히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테오도르 신관이 결연한 눈빛으로 수정구를 받아들자 아르문트가 재빨리 조언했다.
“테오도르 신관. 다시 말하지만 무리하진 말게. 그대의 안전이 무엇보다 우선이야.”
“예, 전하!”
테오도르 신관은 감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곤 크게 한 번 심호흡한 뒤 수정구에 신성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1분이 지나고, 또 5분이 지나도 수정구에는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테오도르 신관의 낯빛은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전하, 이제 그만…….”
“괜, 찮습니다. 아직은……!”
리처드가 보다못해 만류했으나 테오도르 신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잘랐다. 저러다 진짜 죽으면 어떡합니까? 리처드가 조급한 마음에 아르문트에게 눈짓했다. 얼른 말려보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의 눈짓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테오도르 신관의 곁에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그를 믿는다고 했다. 어쩐지 그의 태도에서 단호한 의사가 보이는 것 같았다. 허, 리처드가 헛웃음을 삼켰다. 저 꼴이 안 보인단 말인가. 테오도르 신관은 이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근육 하나 없는 팔다리가 벌벌 떨렸다.
‘조금만 더…….’
로제타가 주먹을 꼭 움켜쥐고 테오도르 신관을 응원했다. 우웅-! 그가 거의 정신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수정구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됐다!”
리처드의 환호성을 마지막으로 테오도르 신관의 몸이 기울었다. 아르문트가 그를 재빨리 붙잡아 지지했다. 다만 그 탓에 테오도르 신관의 손에 들려있던 수정구는 놓치고 말았다. 쯧.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나 보군. 발레리안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수정구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발레리안에게 날아왔다.
“수고했다.”
아르문트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테오도르 신관의 공을 치하했다. 테오도르 신관은 뿌듯하게 웃음을 흘리고는 눈을 감았다. 신성력을 너무 많이 쓴 탓에 기절한 것이었다. 아르문트는 그를 소파에 누인 후에야 다시 수정구를 확인했다. 투명한 수정구 안에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검은 점은 수정구의 위치를 나타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만약 주위에 저주가 담긴 물건이 있다면 붉은 점으로 표시가 될 겁니다.”
발레리안의 설명에 세 사람의 시선이 수정구에 집중되었다. 리처드는 설마 그런 게 있겠는가, 하는 눈빛이었고, 아르문트는 침착하나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었으며, 로제타는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그리고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드러났다.
“어떻게 이런……!”
리처드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아연실색했다. 로제타 또한 경악으로 팔을 바르르 떨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수정구에는 붉은 점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점’이라고 표시할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금세 수정구 전체가 새빨개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