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진흙탕을 굴러서라도2021.10.14.
수정구는 곧 모든 빛을 잃고 투명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새빨간 핏덩이 같던 그 모습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에 잔상처럼 남아 잊히지 않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르문트의 방 전체가 저주로 물들었다는 증거를 말이다. 커다란 충격으로 인한 적막이 흘렀다. 이를 뚫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르문트 본인이었다.
“……수정구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얼마나 되지?”
놀라서 벌벌 떨 것이라는 발레리안의 예상과 달리 그는 여전히 제법 침착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는 더욱 사나워졌고,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꼭, 이런 일이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뭐, 그럴 만도 하지. 발레리안은 황실의 역사를 짧게 회고하며 말했다.
“없습니다.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만큼 정확도는 확실하죠.”
확고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로제타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세 명 중 가장 눈에 띄게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녀였다. 아르문트와 리처드는 어느 정도 표정을 갈무리하는 데 반해 로제타는 그러지 못했다. 해맑기만 하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간신히 제 기운을 뿜어내지 않도록 막고는 있었지만 힘겨웠다.
‘네 번의 회귀 동안, 이것 하나 알아채지 못했다니.’
지금껏 로제타는 자신이 아르문트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다 쓸모없게만 느껴졌다. 아르문트의 광증도, 그의 주변을 둘러싼 저주도. 그 무엇하나 눈치채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진정 그를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죄책감이 지독하게 밀려들었다. 로제타는 제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분명, 이전 회차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나 달라진 걸까. 아니, 어쩌면 이전 회차에도 이랬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발레리안의 도움을 받아 아르문트의 침실을 검사했던 건 현재보다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즉, 몇 년 사이 저주의 효력이 다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들어와 증거를 없앴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수정구가 아예 빨갛게 물들 정도면…… 거의 모든 물건과 가구에 저주가 배어 있다 해도 무방합니다.”
발레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내부에 첩자가 있거나, 있었을 가능성이 크군요.”
그의 확인 사살에 아르문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또.’
낯설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과, 이런 기분. 모두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무력감까지 밀려들었다. 어째서 불행은 이다지도 강할까. 행운은 쥐었다 싶으면 금세 바스러질 정도로 연약한데, 불행은 접착제처럼 끈끈하게 붙어 떨어지지를 않는 것 같았다.
‘또 이렇게 나를-.’
진흙탕 속으로 밀어 넣는가. 빠득. 이가 거칠게 갈렸다. 겨우, 겨우 한 걸음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기분이었다. 이 진탕에서 정말 빠져나올 수 있는 걸까? 어차피 안 될 것을, 추하게 발버둥만 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겹도록 그를 괴롭혀온 말들이 다시금 윙윙 귀를 울렸다.
-“잘 기억해두세요, 전하.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그리움은 또 얼마나 공허한지……. 그 똑똑한 머리로 잘 새겨두어야 앞으로 헛된 꿈을 꾸지 않을 겁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황후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떠올라 그의 심장을 푹푹 찔러댔다. 마법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헛된 꿈. 허망하기 짝이 없는 단어가 머리를 맴돌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도록 파고들었으나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하!”
부드러운 것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로제타의 손가락이 틈새로 끼어든 것이었다.
“괜찮아요. 해결할 수 있어요.”
캄캄하던 시야가 점차 밝아지더니, 말간 얼굴이 시야 가득 담겼다. 그가 진흙탕을 구르고 굴러서라도 빠져나오고 말겠다고 결심한 계기. 로제타였다.
“지켜드리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전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아르문트를 향했다. 맞잡은 손에서는 온기가 서서히 퍼졌다.
“맞습니다, 전하.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저 신관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더 잘 될 일만 남았습니다.”
로제타에 이어 리처드가 말을 이었다. 말주변이 좋지 않은 탓에 말투가 다소 어색했지만, 진심은 전해졌다. 발레리안은 끼지 않고 가만히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래.”
아르문트가 꽉 쥐었던 손에 서서히 힘을 풀었다. 자괴감과 무력감이 뒤섞인 상태에서 이렇게 금방 벗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디 한번 해보지.”
어차피 평생을 진탕 속에서 썩던 몸. 추잡해 보이더라도 제대로 발버둥 한번은 쳐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우선, 방부터 허물어볼까.”
*** 당연하게도 황실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황태자의 침실에 저주가 담긴 물건이 잔뜩 있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아르문트의 결정이 더욱 큰 혼란을 자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쓰는 침실은 라그나르 제국의 황태자가 대대로 사용하던 것으로, 일종의 국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냥 방을 옮기는 것도 아니고, 이걸 허물겠다니! 귀족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오는 게 당연했다. 몇몇 귀족들은 황태자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며 비판까지 했다.
“저주라니, 말도 안 돼요. 누가 감히 황태자 전하의 방에 저주 걸린 물건을 잔뜩 갖다 놓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여태껏 신관들도 몰랐던 일이라면서요? 저주를 감지하는 물건이라니, 그것부터 너무 말이 안 됩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왜, 그 소문 있잖아요.”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아르문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그를 조롱하거나, 혹은 이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겼다. 아르문트의 말이 설득력을 잃은 큰 이유는 바로 그가 발레리안의 조력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의 이름이 사라지자 마법 물품은 그저 거짓말로 치부되었다. 입지가 좁은 황태자가 권력을 얻기 위해 일부러 사건을 조작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결국, 팽팽한 대립 끝에 회의가 소집되었다. 내세운 명분은 ‘황태자를 저주한 세력을 찾아내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황태자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것’을 위한 회의였다.
“전하!”
회의가 시작되기 약 삼십 분 전. 누군가 아르문트의 임시 거처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단아한 외모의 중년 여인, 아르문트의 유모인 마담 르블랑이었다.
“베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
아르문트가 한걸음에 나와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마담 르블랑은 따뜻한 차마저 거부하고는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괜찮, 괜찮으신 거예요? 전하의 침실에……!”
저주가. 그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는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아르문트의 소식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베티. 나는 괜찮다.”
“감히, 감히 누가 그런 짓을……. 가만둬선 안 돼요.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서, 혼쭐을 내줘야 해요!”
아르문트가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래서 베티에겐 비밀로 하길 원했는데. 그가 펑펑 우는 마담 르블랑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제타는 달랐다. 그녀는 전과 달리 차가워진 눈빛으로 마담 르블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기로 우는 느낌은 아닌데.’
내부에 첩자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마담 르블랑도 용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독이 묻은 꽃을 들고 온 것도 그녀였고 말이다.
“방을 허물고자 하신다 들었어요. 잘 생각하셨어요, 전하. 그런 끔찍한 곳은 없어져야 마땅해요! 전통이니, 국보니 아무 의미 없어요. 제일 중요한 건 전하의 안전이잖아요.”
마담 르블랑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으며 말했다. 아직도 충격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몸을 바들바들 떠는 그녀였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렇지만 전하, 제 생각에는…….”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로 허물기보다는, 제대로 수사를 해서 증거를 확보한 후에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이나마 범인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아르문트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로제타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마담 르블랑은 어쩔 줄 모르며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걱정되는 마음에 주책을……. 전하께서 어련히 잘 하실 텐데 괜한 소리를 했네요.”
“아니, 아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다, 베티.”
아르문트가 천천히 입술을 말아 올려 웃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이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녀가 얼른 방을 허물라 주장했다면, 아르문트 또한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상대를 의심해야 한다니. 그토록 끔찍한 일이 따로 없었을 테다.
“전하. 이만 가셔야 합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 리처드가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아르문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로제타에게 눈인사했다.
“그럼, 다녀오지.”
기다란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며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로제타 또한 그 아름다운 미소에 화답했다.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 커플이 또 난리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 마침내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르문트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앉아있던 귀족들이 우르르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문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당당히 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상석에는 그의 자리가 있었고, 그 옆에는 1황자 그레이한이 삐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황제는 오늘도 당연히 불참이었다.
“다들 앉게.”
“예, 전하.”
귀족들이 우르르 자리에 앉았다. 절도 있는 모습이었으나 태도와는 달리 얼굴 위로는 아르문트에 대한 불만이 여실히 드러났다. 숨길 마음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 아르문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대들 모두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군. 그래, 감히 내 방에 저주 걸린 물건을 둔 범인은 알아냈는가?”
“제가 먼저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전하.”
느릿하게 시선을 옮기자 예상했던 인물이 보였다. 모르트마르 백작. 현 황후의 오라비였다.
“말해보게.”
“신관들이 몇 시간 동안 전하의 침실을 확인하였으나, 저주의 기운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런, 신관들이 그렇게 능력이 없어서 쓰나.”
아르문트가 여유롭게 대답하자 모르트마르 백작은 곧장 눈썹을 찌푸렸다.
“국교인 펜리르 신전을 모욕하시다니요. 언동을 조심하여 주십시오. 게다가 대신관님 또한 확인하였으나 발견된 건 없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대신관님?”
“예, 맞습니다.”
대신관이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문트는 반박하는 대신 옅은 미소를 걸친 채 그를 응시했다. 그의 침묵을 당황으로 해석한 모르트마르 백작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즉, 전하께서 증거라고 주장하신 그 마법 물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애초에 정확히 어디서 난 물건인지도 모르시니, 신용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1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너도나도 말을 보탰다. 중도파 귀족들은 아무 말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그레이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동생님께서 그런 사기꾼이나 팔 법한 물건을 믿고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다는 건…….”
씨익. 그레이한의 유들유들한 얼굴 위로 비릿한 미소가 걸쳐졌다.
“어딘가 아픈 건 아닌가 걱정되네, 나는?
톡톡. 그가 장난스럽게 제 머리통을 두드렸다. 아르문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대담한 언행에 일부 귀족들이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1황자를 지지하는 이들도 모르트마르 백작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불청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