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 마녀가 바로 저예요2021.10.17.
“황자, 제가 항상 말을 조심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미 회의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당히 나타난 것은 금발의 미인이었다. 긴 곱슬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갖가지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은 기껏해야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타고나기를 워낙 아름다운 데다, 그만큼 치열하게 관리해왔기 때문이었다. 피부는 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하얬고, 팔다리는 몹시 가느다래 조금만 건드려도 다칠 것 같았으나, 분위기만큼은 회의실의 모두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다. 시선 한 줌, 발걸음 하나마저도 예사롭지 않았다. 사나운 눈매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는 그레이한의 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레이한이 그녀를 닮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레이한의 어머니, 아르티나 모르티마르였으니까.
“고귀하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라그나르 제국의 황후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앉으라 손짓했다. 그러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제가 못 올 곳을 온 것은 아니겠지요, 아르문트?”
황후가 곱게 웃으며 묻자 여태껏 여유롭기만 하던 아르문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방에 그토록 많은 저주를 옮겨놓고, 저렇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꼴이라니. 역겨워서 속이 다 울렁거렸다. 아니, 그녀의 곁에 있을 때면 항상 이랬다. 가슴은 꽉 막혔고 피부 위로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익숙한 반응이기에 아르문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형식적인 대답을 했다.
“황실의 큰 어른께서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아드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마음이 급해서 제대로 치장도 못 하고 와버렸네요.”
하. 아르문트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사치스러운 머리 장식하며, 당장 파티에 간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화려한 드레스까지. 치장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굳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그를 조롱하기 위함일 테다. 저런 말에 흥분하는 건 그레이한같은 멍청이나 하는 짓이다. 아르문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황후에게는 최대한 관심을 주지 않는 게 상책이다. 다시 회의를 재개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그레이한 쪽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폐하께서도 몸이 성치 않으신 와중에 우리 동생님까지 이렇게 어머니를 걱정시키다니. 쯧쯧……. 사용인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던데, 이래서 황실의 권위가 제대로 서겠어?”
그레이한은 탁자에 턱을 괴고는 아르문트와 황실의 안위가 퍽 걱정되는 척 말했다. 또다시 아르문트의 건강 상태를 놓고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무려 소문까지 언급해가면서.
“그레이한 이샤벳 폰 라그나르. 여기가 네 침실로 보이나? 회의 중 무례한 언동은 삼가라.”
아르문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의 건방진 태도를 지적했다. 1황자라는 놈이 귀족들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아무리 모르트마르 백작을 등에 업었다 한들 지위가 지위이거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레이한은 팔꿈치를 탁자 아래로 내리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이제 되었냐는 듯 표정은 뻔뻔하기만 했다.
“그리고 소문이라.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레이한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문트는 흥미로운 척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마치 소문의 존재를 처음 들어본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내가 못 말할 줄 알고?’
그레이한이 아르문트를 쏘아보며 지지 않겠다는 양 마주 웃었다. 그러곤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차마 내 입에 담기도 민망하지만……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미쳤다는 말이 예전부터 돌았다던데.”
“그런 낭설을 믿는다는 건가?”
아르문트가 어처구니가 없다며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손을 들어 대신관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여기 계신 대신관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건강을 주기적으로 검진해주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모르트마르 백작이 방금 말하지 않았나. 신관의 능력을 폄하하는 건 곧 국교인 펜리르 신전에 대한 모독이라고.”
그는 모르트마르 백작이 했던 말을 인용하며 그레이한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레이한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신관이라고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지! 네가 정체도 알 수 없는 물건을 신용하는 것만으로 소문의 신뢰성이 높아지는 거다!”
안 그렇습니까? 그레이한이 제 말이 맞지 않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가 보기엔 제법 논리적으로 허점을 찌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변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황후와 모르트마르 백작의 얼굴이 어두웠다. 피식. 아르문트가 웃음을 흘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대신관이라고 모든 걸 알 수는 없지.”
이겼다! 그레이한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미소도 자리를 감췄다.
“내 침실에서 저주의 기운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야.”
“그건……!”
그레이한이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자신이 한 말이니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자승자박한 것이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황후와 모르트마르 백작을 흘끔거렸다. 황후는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를 유지하곤 있었으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모르트마르 백작은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거랑 이거는 상황이……!”
큰일 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레이한은 어떻게든 변명을 짜냈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아르문트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만하세요, 황자. 형 된 도리로 그리 목소리를 높여서 되겠습니까. 우리 아르문트가 얼마나 마음이 여린 분이신데요.”
아니나 다를까 황후가 또다시 끼어들어 그레이한을 지원했다. 지금 그레이한이 더 말해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 나이를 먹고도 어미 품을 찾는 꼴이라니. 아르문트가 그레이한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제가 그리 여리진 않습니다, 황후 폐하.”
“숨기지 마세요, 아르문트. 국보나 다름없는 방을 허물자고 하실 정도라면 얼마나 충격이 크다는 거겠어요. 그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다면 제가 폐하를 대신해서 허락하겠습니다. 그래야 제 걱정도 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시겠지. 그곳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아르문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원래 부모는 자식을 항상 걱정하는 법이랍니다. 건강도, 결혼도요. 아, 이왕 이렇게 모인 것, 아르문트의 혼처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은 생각이라며 황후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귀족들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너무 느닷없는 화제전환이라 당황스러우면서도, 새로운 화제가 그들에게는 몹시 흥미로웠다.
“아니요. 적절한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관계없는 이야기는 넣어두십시오.”
“관계가 없지는 않지요. 폐하가 아프시니 제가 대신 혼처를 정해주는 건 당연한 데다……. 또 진즉에 마음 둘 약혼녀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제 입맛에 맞는 혼처를 정하려 한다는 건 알겠지만, 이번 사건과 혼처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문트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눈살을 찌푸리고 황후를 응시했다. 황후는 아름다운 얼굴 위로 걱정을 가득 담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 궁내의 하녀와 긴밀한 관계가 되셨다 들었습니다. 결혼도 전에 정부를 두시다니, 어미로서는 염려가 되네요. 얄팍한 사술에 휘말린 것도, 그 사특한 물건의 출처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그 여인 때문은 아닌지…….”
황금빛 속눈썹이 느릿하게 오르내리며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겉으로는 상냥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 속내에는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로제타가 언급되자 아르문트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로제타와의 관계가 황후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는 건. 언젠가 황후가 로제타를 빌미로 자신을 협박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했다. 그러나 막상 상황에 직면하자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조심스럽지만…… 세상에는 마녀 같은 여자들이 많답니다, 아르문트. 요사스러운 말로 전하처럼 고귀한 분을 이리저리 홀리는 여인은 조심하셔야 해요. 훌륭한 집안의 영애를 만나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지요.”
어머니의 친구였으면서 몰래 정부가 된 것도, 요사스러운 말로 황제를 홀려 어머니를 죽인 것도 모두 제 얘기이거늘. 감히 저 간악한 입으로 로제타를 마녀로 몰다니. 당장 검을 뽑아 황후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주제 모르고 눈웃음을 짓는 눈도 뽑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화를 냈다간 황후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로제타는 황태자를 홀린 마녀가 될 것이며, 자신은 천한 사기꾼에게 정신이 팔려 미친 소리를 해댄 얼간이가 될 것이다. 이를 알고 있기에 아르문트는 이를 악물고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는 제 처지를, 그 처지가 되도록 방관한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면서. 그는 고개를 들어 회의실 한편에 걸려 있는 검은색 커튼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실내였으나 커튼 자락이 미세하게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귀족 몇몇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 순간, 커튼이 차르륵 걷히고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문트와는 달리, 참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술이라…….”
매력적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피식, 웃음소리도 함께였다.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찬란한 금발 사이로 옅은 미소를 머금은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귓불 아래로는 화려한 귀걸이가 찰랑거렸다. 황금빛 자수가 수놓아진 하얀 망토를 걸친 차림새는 몹시 신성하고도 고결해 보여 마치 신관 같았으나 그렇다기에는 장식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다른 사람이 입었다면 과하다 욕을 먹었을 테지만 남자에게는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잘 어울렸다. 비현실적인 정도로 완벽한 외모, 트레이드 마크인 귀걸이와 화려한 옷차림. 이 모든 걸 충족시키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 대마법사 발레리안……?”
귀족 중 누군가 화들짝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합, 하고 입을 막았으나 이미 모두가 들은 뒤였다. 발레리안은 그에 화답하듯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대마법사 발레리안 윈저프리드, 뒤늦게나마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는 춤을 추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황후의 앞에서도 태도는 늘 그렇듯 능글맞기만 했다. 그의 등장에 황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일그러졌다. 그레이한도 경악한 모양인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 한들 감히 국정을 논하는 회의에-”
“제가 초대했습니다.”
황후가 역정을 내려는 찰나, 아르문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러니 흥분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
여리신 마음에 해가 될까 걱정이 됩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자 황후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발레리안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초대라니요, 대마법사님을 왜……?”
귀족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질문했다. 모두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상황파악을 못 하는 것은 그레이한이 유일했다.
“초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르문트는 발레리안을 상석으로 안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사특한 물건’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윈저프리드 경이니.”
“네, 맞습니다. 그 마녀가 바로 저예요.”
발레리안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