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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판도가 바뀌었다 (67/145)

67화. 판도가 바뀌었다2021.10.21.

귀여운 모습으로 웃고 있다 해서 발레리안이 정말 기분이 좋은 상태냐 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실 그는 화가 난 상태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자신의 위대한 마법이 사술 취급을 받은 것 때문에 분노한 건 아니었다. 모르고 한 소리인 걸 알고 있는 데다가, 애초에 그의 자존감은 멍청한 사람들의 말 몇 마디에 금이 갈 만큼 유약하지 않다. 그를 분노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늘 그래왔듯 오로지 로제타와 관계된 것뿐이다.

16549577301212.jpg‘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뭐?’

기척을 지우고 숨어 있어달라는 아르문트의 요청에 따라 지루함도 참고 기다렸더니, 커튼 너머로 주고받는 내용이 어처구니가 없다. 로제타가 아르문트와 미묘한 관계가 있다는 내용은, 로제타 입으로 사실이 아니라 했으니 불쾌하지만 그렇다 치고.

16549577301212.jpg‘로제타가 마녀라서 요사스러운 말로 저 자식을 홀렸다고?’

기가 차다 못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로제타가 아르문트를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이 그랬다. 펜리르 교를 국교로 지정한 제국은 흑마법을 사술이라 칭하며 엄격히 금지했다. 그리고 이를 몰래 익혀 사용하는 여인을 마녀라 불렀다. 제국의 역사상 여인이 남자와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특히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은 남자만이 타고날 수 있는 고귀한 능력으로 여겼다. 그러나 과거에도 마법의 힘을 타고난 여인들은 존재했고,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남성의 힘을 빼앗았다며 박해받았다. 마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현재는 의미가 바뀌긴 했지만, 정숙하지 못하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여성을 마녀로 모는 악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실제로 흑마법에 손을 댄 사람의 성비는 여성이 훨씬 높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통계가 나온 게 아니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6549577301212.jpg‘저주에까지 손을 대놓고, 잘도 남을 마녀로 모는군.’

아르문트의 방에서 그만큼의 저주가 나왔다는 건, 1황자의 세력 중 흑마법에 능통한 이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놓고 무고한 로제타를 마녀라 부르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발레리안이 해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황후와 그레이한을 응시했다. 겉보기로는 능청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눈빛만큼은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사나웠다.

16549577301227.jpg“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 저주를 감지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이 나왔다는 거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귀족이 큰 목소리로 질문했다. 사사로운 걱정이 많기로 유명한 헤르만 백작이었다. 발레리안은 여전히 시선을 황후에게 둔 채로 대답했다.

16549577301212.jpg“예. 조만간 정식으로 설계도를 공유하겠습니다.”

공익을 위해서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자신이 개발한 마법 물품의 설계도를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곤 했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무료로 공유하겠다니. 그것도 몇 년이나 앞선 기술을! 제 배 불리기에 혈안인 귀족들이 반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발레리안은 다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현재의 단계는 중간 과정에 불과한 데다, 제작 방법과 재료 수급이 워낙 까다로워 설계도를 안다고 해서 쉽게 만들 수 없을 테다. 자신은 이렇게 기대감을 증폭시킨 후 완성본을 판매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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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77301227.jpg“대마법사의 말이 맞다면, 정말 전하의 침실에 저주 걸린 물건이 가득했다는 것 아닙니까.”

여태껏 가만히 앉아 상황을 관망하던 은발의 귀족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소란하던 분위기가 금세 차분해졌다. 핵심을 찌르는 말 때문이기도 했고, 그 화자가 하필 루니엘라 공작인 것도 한몫했다. 그레이한의 외척인 모르트마르 백작가보다도 더 부유하고, 권세 높은 가문. 개국 공신의 후예이자 제국 유일의 공작가. 이것이 바로 루니엘라였다. 황후의 의도와는 달리 황태자의 장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도 바로 그, 루니엘라 공작이기도 했다. 비록 아직 그는 황태자와 1황자 중 그 누구에게도 권력을 실어주지 않고 있기는 했으나 그의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것은 자명했다.

16549577301212.jpg“그렇습니다, 루니엘라 공작.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더군요. 일이 년 안에 가져다 둔 것이 아닐 겁니다.”

16549577301227.jpg“그렇다면 대신관님은 어째서 그 많은 저주 중 하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까?”

발레리안이 긍정하자 루니엘라 공작은 적금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지적했다. 이런 상황은 차마 예측하지 못했는지, 대신관은 무척 당황한 얼굴로 애써 입술을 뗐다.

16549577301227.jpg“저주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오래 살펴보지 않는 한…….”

16549577301227.jpg“지금, 펜리르 신전을 대표하는 대신관이. 황태자 전하를 가장 가까이 모셔야 할 분이!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저주가 없었다 성급히 결론 내렸다는 뜻입니까?”

쾅! 루니엘라 공작이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주변 귀족들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대신관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니엘라 공작만 아니었다면 무어라 맞받아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상대의 권력이 만만치 않았다.

16549577329165.jpg“여러모로 실망이 큽니다, 대신관.”

아르문트가 비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루니엘라 공작이 제 편을 드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이 기세를 놓칠 수야 없다.

16549577329165.jpg“자, 황후 폐하. 이 정도면 제가 사술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이 됐겠지요.”

16549577329186.jpg“……그렇군요. 바쁘신 대마법사께서 황태자를 이리도 신경 써주다니. 기쁜 일이네요.”

16549577301212.jpg“아닙니다, 황후 폐하.”

발레리안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황후가 비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태연한 것을 넘어 그는 공격적인 눈빛으로 황후와 그레이한을 응시했다. 로제타를 마녀로 몰며 폄하한 놈과, 주제도 모르고 로제타를 덮치려 한 새끼. 둘 다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16549577301212.jpg“제국의 국민으로서, 곧 황위에 오르실 분을 극진히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중립을 유지하던 대마법사가 공공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레이한은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고, 황후도 더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귀족들은 아르문트와 황후를 번갈아 흘끔거리며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그 뒤로는 몇 가지 검증과정이 계속되었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적당히 풀며 대신관이 정말 제대로 확인한 것이 맞는지를 심문하였고, 대신관은 제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변명할 증거는 적었다. 당연하게도 그레이한과 황후는 빠르게 발을 빼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처분을 논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황태자의 침실은 허물지는 않되 오랜 시간을 들여서라도 정화하기로 하였고, 저주 담긴 물건을 옮겨둔 범인은 어떻게든 색출해내겠다고 선언했다. 혼란한 분위기 속에 회의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 회의에 관한 이야기가 사교계 전체를 휩쓸었다.

16549577301227.jpg“세상에, 저주가 정말 있었다니. 너무 끔찍하네요.”

16549577301227.jpg“역시 대마법사님은 대단해요. 그런 기술을 모두에게 공유한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16549577301227.jpg“그런 대마법사를 포섭한 황태자 전하도 대단하군요.”

이처럼 아르문트에게 긍정적인 여론도 있었고.

16549577301227.jpg“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출신이 한미하거늘 어떻게 국정에 간섭을…….”

16549577301227.jpg“그나저나 루니엘라 공작은 무슨 생각인 걸까요?”

16549577301227.jpg“루니엘라 공녀가 1황자와 약혼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 속내가 보입니다. 황태자를 사위로 두고 조종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16549577301227.jpg“며칠 뒤에 있을 연회에서 더 추이를 지켜보죠.”

발레리안의 개입이 정당하지 않다는 의견, 루니엘라 공작의 예측 불가한 행보에 대한 염려 등 부정적인 얘기도 적지 않게 들려왔다. 일부는 괜히 교황청을 끌어들여 펜리르 신전에 얕보이게 되었다며 아르문트의 결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황태자를 시해하고자 한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 또한 계속 말이 나오긴 했으나, 다른 얘기에 비하면 쉬쉬하는 경향이 컸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큰일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귀족들의 반응은 무척 다양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모든 귀족이 확신하는 사실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16549577356387.jpg‘판도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모르트마르 백작의 후광을 등에 업은 그레이한이 독주하는 상황이었다면, 이제는 아르문트가 그를 바짝 따라잡았다. 대마법사는 오늘 있던 회의를 제 무대 삼아 아르문트의 편에 서겠노라 당당히 선언하였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황후와 1황자를 수많은 귀족 앞에서 물 먹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귀족들은 필연적으로 아르문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름다우나 유약하고 힘없는 허수아비 황태자에서, 저주에 둘러싸인 상황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대마법사까지 포섭해낸 황위 후보자로 말이다. 심지어 루니엘라 공작 또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루니엘라 공녀와 아르문트의 약혼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루니엘라 공작가와 황태자. 모르트마르 백작가와 1황자. 둘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가. 입장을 정하지 못한 귀족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사흘 뒤 열릴 황실 연회를 기다렸다. *** 아르문트가 회의를 위해 떠나고 몇 분이 지난 뒤. 로제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르문트를 따라가려는 심산이었다.

16549577356392.jpg“저 산책 좀 다녀올게요!”

16549577301227.jpg“뭐? 전하가 여기 있으라 했잖아.”

러크가 당황하여 외쳤으나 로제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러크는 어처구니가 없어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래도 저 하녀에게 단단히 얕보인 게 분명하다.

16549577301227.jpg“로제타!”

러크는 더는 만만하게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목청을 돋우며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멜라니의 친구고 뭐고, 따끔히 한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그러나 이게 웬걸. 분명 자신보다 몇 초 먼저 나간 그녀였거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16549577356392.jpg‘러크 놈 따돌리는 거야 식은 수프 먹기지.’

로제타는 흥 콧방귀를 뀌며 아르문트를 쫓아갔다. 다만 회의실 근처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많은 탓에 내용을 엿듣거나 안까지 쫓아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아무리 그녀가 기척을 잘 지울 수 있다곤 해도 저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들키지 않을 자신은 없다. 내용이야 어차피 추후 발레리안에게 전해 들으면 그만이다. 아르문트를 지키는 것도 발레리안이 있으니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왜인지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어쩐지 요즘에는 아르문트가 더 자주 걱정되는 것 같았다. 굳이 근처 방에 숨어 그의 기운이 무사한지 살피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행히 회의가 끝날 때까지 아르문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로제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 앞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러크가 곧 그녀를 발견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16549577301227.jpg“도대체 어딜 갔던 거야? 한참 찾았잖아!”

16549577356392.jpg“속옷 좀 갈아입고 왔어요. 갑자기 달거리가 시작돼서요.”

그리고 그는 로제타의 말이 끝나자마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속옷이라니. 달거리라니! 생판 남인 자신 앞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러크는 큼큼 헛기침하며 딴 쪽을 쳐다봤다. 괜히 그녀의 사정을 모르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보며 남몰래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저렇게 만만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문트가 방으로 돌아왔다. 로제타는 러크에게는 보여주지 않던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16549577356392.jpg“전하! 수고 많으셨어요!”

그녀는 아르문트에게 쪼르르 다가가 그를 올려다봤다. 황후와 그레이한을 만나 잔뜩 마음이 상했으리라는 예측과 달리 아르문트는 제법 평온한 얼굴이었다. 로제타는 슬쩍 눈알을 굴려 아르문트의 뒤에 서 있는 발레리안에게 시선을 두었다. 눈길이 닿자 발레리안은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16549577356392.jpg‘전하와 있을 때는 그러지 말라니까!’

로제타가 이런 의미를 담아 그를 한번 흘겼다. 그러든 말든 발레리안의 미소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16549577329165.jpg“로제.”

커다란 몸이 로제타를 단숨에 감싸 안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울리자 로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살폈다.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덥석 그러안은 것이었다. 리처드와 러크, 발레리안까지 있는 곳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미소가 자리를 감추는 것은 아주 금방이었다.

16549577329165.jpg“잠시만 이러고 있지.”

로제타는 돌처럼 경직된 채 아르문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발레리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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