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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내 파트너가 되어줘 (68/145)

68화. 내 파트너가 되어줘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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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레리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얼음처럼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가 로제타를 향해 서늘하게 반짝거렸다. 꿀꺽. 이를 발견한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필이면 발레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극성 오빠가 따로 없는 저 발레리에게! 좋지 않은 미래가 빠르게 연상되었다. 저 사나운 눈초리만 봐도 확실했다. 그녀는 눈빛만 보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16549577461625.jpg‘그 새끼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근데 이건 뭔 짓거리야? 발레리안은 분명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열심히 아르문트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16549577461632.jpg‘사이는 무슨 사이! 그냥 주군과 기사의 관계지!’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제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속내를 증명했다. 주군과 기사라기엔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그녀 또한 느끼고 있었다. 이미 황태자궁뿐만 아니라 본궁에도 그녀가 아르문트의 정부라는 소문이 퍼졌고, 사용인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그녀에게 태도를 조심하기 시작했다. 소문 덕에 아르문트를 효율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좋았으나, 동시에 그의 미래가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해버릴까 봐 걱정됐다. 특히, 루니엘라 영애를 떠올리면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 어떤 여자가 제 남편에게 정부가 생긴 것을 좋아할까. 아직 결혼은커녕 약혼도 하지 않은 사이긴 했으나, 그래도 미래를 알기에 신경이 쓰였다. 광증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입을 맞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처음부터 스킨십을 한 게 잘못이었나.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나치게 친밀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포옹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16549577461632.jpg‘계속 이러다간 내가 아르문트의 혼삿길을 망쳐버릴지도 몰라.’

돌연 떠오른 생각에 심장 부근이 지끈거렸다. 로제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조심스럽게 아르문트의 몸을 밀어냈다.

16549577461632.jpg“전하, 다른 분들이 계시는데…….”

그녀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속삭이자 아르문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손에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실수했군.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리한 탓일까. 로제타를 보자마자 상황도 잊고 그녀를 껴안아 버렸다. 가느다란 몸을 품에 안고, 그녀의 은은한 체향을 맡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이처럼 무례한 행동이 따로 없었다. 아직 제대로 고백하지도 않아놓고 남들 앞에서 스킨십이라니. 로제타가 질색해도 할 말이 없다. 아르문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 선 세 남자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러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입을 쩍 벌렸고, 리처드는 인상을 찌푸린 채 애써 다른 쪽을 보았으며, 발레리안은 가만히 미소지으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큼큼. 짧게 헛기침한 아르문트는 민망함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16549577461649.jpg“윈저프리드 경. 오늘은 여러모로 고마웠네.”

16549577461625.jpg“……아닙니다, 전하. 이제 시작일 뿐인걸요.”

발레리안은 턱 끝까지 차오른 분노와 질투를 애써 삼키며 대답했다. 푸른 눈동자가 아주 짧은 순간 로제타를 향했다.

16549577461625.jpg“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만나 말씀 나누시죠.”

16549577461649.jpg“그래, 그러지.”

대답은 아르문트가 했으나 로제타는 저 말이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건 오늘 있던 일에 대해 다시 만나 아주 길고 상세하게 얘기하자는 협박이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에게 탈탈 털릴 걸 생각하니 벌써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발레리안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리처드와 러크 또한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방을 나섰다.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비켜주는 것이었다. 탁. 문이 닫혔다. 그 즉시 아르문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초조한 모양인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16549577461649.jpg“로제타. 미안하다. 내가 실례했어.”

그가 곧장 사과의 말을 건넸다.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이기까지 했다. 천하의 아르문트가 혹시나 미움이라도 받을까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저 커다란 덩치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16549577461632.jpg‘귀엽기는 무슨!’

로제타가 자신이 한 생각에 깜짝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빠르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16549577461632.jpg“괜찮아요, 전하. 이해해요.”

회의 중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랬을까. 황후의 그 얄밉기 짝이 없는 얼굴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그러나 그의 혼삿길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로제타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후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77461632.jpg“그렇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주세요. 그, 소문이 나는 것 같아서요.”

아르문트의 얼굴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건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회의에서도 말이 나올 정도라면 이미 황궁 전체에 로제타가 황태자의 정부라는 얘기가 퍼졌으리라. 그런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고 고백까지 미루었건만, 결국은 그렇게 되었나. 그가 씁쓸한 얼굴로 이를 꽉 깨물었다. 무거운 죄책감이 목을 옥죄이는 듯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로제타가 선수를 쳤다.

16549577461632.jpg“피곤하실 텐데 얼른 앉으세요! 피로 해소에 좋은 차를 내어올게요.”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러곤 아르문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급하게 정리를 마친 방은 이전 침실보다는 크기가 작아 어딜 가더라도 걸음을 많이 옮길 필요가 없었다. 사용인을 위한 방이자, 로제타가 앞으로 쓰게 될 침실도 이곳에서 문 하나만 열면 바로 나왔다. 그녀는 새로 얻은 찻잎을 진하게 우려낸 후 발레리안이 만들어준 티스푼으로 가볍게 저었다. 티스푼의 색이 변하지 않는 걸 보아 독은 없는 모양이었다.

16549577461632.jpg“그나저나, 전하.”

로제타는 뜨거운 물을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침묵이 유독 무겁게 느껴져 어떻게든 다른 주제를 찾는 그녀였다.

16549577461632.jpg“황실 연회가 벌써 사흘 뒤네요. 시간이 참 금방 가요, 그렇죠?”

16549577461649.jpg“……그래. 올해 사냥제도 금방이군.”

사냥제. 듣기만 해도 몸이 바짝 긴장되는 단어였다. 그녀가 가장 처음 회귀했을 때, 아르문트를 잃게 된 계기가 사냥제였기 때문이었다.

16549577461632.jpg‘사냥제에는 어떻게 따라간담. 죽지 않는다는 걸 밝힌 이후로는 하루 한 번씩 소원 들어주는 것도 흐지부지됐는데.’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기를 응시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냥제 때만큼은 그의 곁을 지켜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공손한 자세로 아르문트에게 찻잔을 건네주었다. 그러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16549577461632.jpg“참, 로젠다이엠에서 산 드레스는 루니엘라 영애께 보내셨나요?”

큰 의미 없이 한 말이었다. 수차례 회귀한 그녀는 이번 연회 때 아르문트의 파트너가 루니엘라 영애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것이 너무 당연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 이상하게도 드레스를 언급할 때 가슴이 저릿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어색한 분위기 탓이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아르문트는 그 질문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탁. 아르문트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강하게 내려놓았다. 잔이 깨지진 않았으나 뜨거운 차가 넘쳐 그의 손을 적셨다. 매끈한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는 걸 본 로제타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16549577461632.jpg“전하! 손이……! 얼른 차가운 물을-.”

16549577461649.jpg“아니.”

그녀는 서둘러 차가운 물을 가지러 가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16549577461649.jpg“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이 무척 괴로워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바르르 떨렸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77461649.jpg“당연하잖아. 도대체 내가 왜…….”

너를 두고, 왜? 아르문트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삼켰다. 지금,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당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고백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은 정부 소리마저 듣게 했다. 루니엘라 공녀와의 혼담 또한 이곳저곳에서 언급되는 게 사실이다. 비록 그가 의도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현실이 이러하다면 결정을 해야만 했다. 몇 초의 침묵 후에야 결심이 섰다.

16549577461649.jpg“……로제타.”

아르문트가 화상으로 붉어진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애틋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 로제타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16549577461649.jpg“그 드레스. 네 몸에 맞춘 것이잖나.”

16549577461632.jpg“네? 네, 그렇긴 한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대화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로제타는 당황하여 눈만 껌뻑거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르문트의 시선이 어쩐지 진중하고도 달콤했다.

16549577461649.jpg“그러니 네가 입어주면 좋겠는데.”

꼭 제 연정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16549577461649.jpg“이번 연회. 나와 함께 가주겠나?”

내 파트너가 되어줘.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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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로제타는 침묵했다.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았다. 제가 왜요? 이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제 주군에게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할 수야 없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특히 머리 쪽이? 이것도 당연히 말할 수 없다. 어떻게 하녀가 제 주인에게 미쳤냐고 묻겠는가. 그러나 아르문트가 하녀인 자신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는 이 상황 또한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로제타는 입술을 떼었다 다시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의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심장은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어댔다. 당장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의 시야에 아르문트의 손등이 보였다. 그제야 로제타는 그가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16549577461632.jpg“……잠시만요, 전하. 일단 차가운 것부터 가져올게요.”

아르문트는 얌전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시선 끝은 계속해서 로제타만을 쫓았다. 로제타는 애써 그 진득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손수건을 차가운 물에 적셨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루니엘라 영애에게는 왜 드레스를 보내지 않았고, 뜬금없이 왜 내게 파트너 신청을 하는 거지? 모든 것이 불명확했으나, 미래가 바뀌어도 지나치게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직 드레스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파트너 신청도 하지 않았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는 건 연회가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파트너 없이 연회에 참석한 황태자라니! 그레이한 놈이 비웃어댈 것을 생각하면 벌써 속이 다 쓰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아르문트의 파트너가 되자니 그건 또 이상했다. 소문만 더 가중시키는 꼴이리라. 시간이 촉박하긴 하나 황태자의 파트너가 되겠다는 영애는 얼마든지 남아 있을 터. 지금이라도 얼른 새로운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16549577461632.jpg“여기요, 전하. 손 좀 주시겠어요?”

로제타는 애써 침착한 척 연기하며 차가운 물수건을 그의 손에 감아주었다. 잠시나마 시간을 번 덕에 예의 바르게 거절할 명분도 떠올릴 수 있었다.

16549577461632.jpg“전하, 아시다시피 전 전하의 하녀이고……. 집안도 한미하여 전하의 파트너가 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어요.”

아르문트의 단정한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이를 확인한 로제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녀에게 거절당했다고 기분이 나쁜 건가? 그녀는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아부를 늘어놓았다.

16549577461632.jpg“물론 그것만 아니라면 저도 전하와 연회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죠. 연회복을 입은 전하라니 세상에 말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을지 심장이 다-.”

16549577461649.jpg“그럼 됐군.”

아르문트가 빠르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16549577461632.jpg‘오 분은 더 말할 수 있었는데! 아니, 그보다. 되긴 뭐가 돼?’

로제타는 당황한 채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16549577461649.jpg“나와 같이 가는 거다, 로제.”

행복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미소 짓는 아르문트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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