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입 벌려, 로제2021.10.28.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마구 울려댔다. 안 그래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제는 거의 터질 것만 같았다. 로제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막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같이 연회에 갈 여인 한 명 구하지 못해 전속 하녀인 나에게까지 파트너 신청을 하는 형편에. 뭐가 그렇게 좋다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거야?’
그녀는 아르문트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기며 생각했다. 아르문트가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게 아닌, 일부러 지금까지 구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 한 채.
“그, 그렇지만 전하. 혹시나, 루니엘라 영애가 다른 오해라도 하시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소문이 났는데…….”
로제타는 결국 다시 루니엘라 영애를 언급했다. 어쩐지 그녀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목구멍이 꽉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르문트의 얼굴이 다시금 괴롭게 일그러졌다. 예쁜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잡혔고, 황금빛 눈동자는 은연히 흔들렸다. 거친 입술 사이로 어딘가 억눌린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자꾸 그 여자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내가 로제타가 오해하게끔 행동했나. 아르문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언행을 되짚어보았다.
“네? 어디서 듣기로는, 전하께서 곧 루니엘라 영애와 약혼하실 거라 하던데요…….”
로제타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약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섯 번의 인생 동안 아르문트를 지키는 데만 집중했던 그녀는 그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루니엘라 영애와 약혼을 맺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건 그저 황실의 사정으로만 여겼다. 시기상 지금쯤이면 약혼 얘기가 조금씩 나오지 않을까 추측하였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마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 양 말했다. 아르문트는 어딘가 짚이는 데가 있는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사나운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을 확인한 로제타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이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약혼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나 봐.’
그래, 무척 다행인 일이다. 거기까지 미래가 바뀌었다면 혼란만 가중되었을 테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잠을 잘 자지 못해서 피곤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녀는 이렇게 믿으며 물수건을 얹은 아르문트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내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어떤 새끼가 네게,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르문트의 말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에 대한 살벌한 분노가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내 아비와 다르다. 제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러 여인을 거느리는 한심한 짓 따위, 할 생각 없어.”
현 황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에 로제타는 깜짝 놀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차마 동조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아르문트가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의아해하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내 마음과 몸을 모두 바칠 대상은 한 명이면 충분해. 그 이상은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약조하지. 내 인생에 정부란 없을 거야.”
아르문트는 아프지도 않은지 화상 입은 손을 들어 다시금 로제타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을 느릿하게 감싸 쥐는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애가 탔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걸까? 로제타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르문트의 시선을 마주했다. 황금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깊어 자꾸 이상한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로제.”
나지막한 목소리는 언제 사나웠냐는 듯 금세 다정해졌다. 그만이 불러주는 애칭을 들으니 축 처졌던 기분이 금세 다시 살아났다. 어쩐지 가슴 부근이 간질거렸다.
“그날, 네게 정식으로 할 말이 있어.”
까칠한 엄지가 그녀의 손가락을 느릿하게 훑었다. 로제타는 차마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휘어지는 눈매에서 애틋한 감정이 배어 나왔다.
“그러니 꼭, 같이 가줘야 해.”
그럴 거지? 아르문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로제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밤. 로제타는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잠이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조금 전 아르문트와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과 몸을 모두 바칠 대상은 한 명이면 충분해. 그 이상은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약조하지. 내 인생에 정부란 없을 거야.”
전하는 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을까. 루니엘라 영애와의 혼담을 ‘쓸데없는 얘기’로 치부하면서.
-“그날, 네게 정식으로 할 말이 있어.”
정식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할 말은 또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공식적인 행사에 자신을 파트너로 대동하려 하는 거지.
‘설마.’
로제타가 이불을 꽉 말아쥐었다.
-“제대로 된 말은…… 내가 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그때 하지.”
아르문트가 갑자기 변한 날, 진중한 모습으로 고백하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겨우 다 지웠다고 생각한 의심이 더욱 선명해진 채로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전하가, 나를…… 좋아하나?’
쿵. 심장이 가장 아래까지 떨어졌다. 로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낯뜨거운 생각에 발가락까지 곱아들었다.
“말도 안 돼.”
지겨울 정도로 많이 중얼거렸던 말이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운 의심은 이제 고작 저런 표현 하나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가벼운 이불을 끌어다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이 방에는 자신밖에 없는데도 혹 누가 자신의 상태를 볼까 두려웠다.
‘만약, 아주 만약에…… 정말 전하가 날,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 수차례 눈을 깜빡거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으나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아르문트라니.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이번 회차 전까지 자신이 봐온 아르문트는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 명의 사내로서 여인에게 구애하는 모습을 어떻게 예측하겠는가.
-“로제.”
그는 아마 달콤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내가 그대를.”
다정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며.
-“연모한다.”
담담하면서도 애틋하게, 고백할 것이다. 그러곤 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입술을…….
“미쳤어.”
철썩! 로제타가 제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그러나 그 아픔보다도 부끄러움이 더 컸다.
‘왜 상상이 되고 난리야!’
그것도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너무 민망해서 세숫물에 코라도 박고 죽고 싶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에게 고백하는 그를 상상할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그런 상황을 기대라도 하듯이.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이다. 아르문트의 짝은 루니엘라 영애로 정해져 있고, 설사 바뀐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난 전하의 기사니까.’
로제타는 피 묻은 입술을 다시금 깨물었다.
‘그것도 전하의 죽음을 몇 번이나 목격한.’
아르문트는 무려 네 번을 죽었다. 이번만큼은 죽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사실은 로제타도 알고 있었다. 저번 회귀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아르문트의 하녀가 된 이번 회차는 그 어느 때보다 변수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그와의 관계는 긍정적이었으나, 많은 것이 달라진 만큼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쳐올지 모른다. 이는 즉 이번에도 아르문트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만약 아르문트에게 충성심이 아닌,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와 지금보다도 더 깊은 관계가 된다면.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르문트는 계속해서 자신과의 기억을 잊고 말 텐데. 로제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괜한 걱정이야. 난 전하께 그런 감정 없으니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전하가 내게 고백하더라도, 거절하면 돼.’
그녀는 얇은 이불 아래에서 공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소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냉정을 되찾을 시간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르문트는 그녀에게 그러한 시간을 단 십 분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둠이 거멓게 내려앉은 새벽,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그의 방에서 낯설지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인간 같지 않은 투박한 기척. 광증이 또다시 발현된 것이었다.
‘젠장, 왜 하필 지금이야!’
로제타가 제 몸을 덮은 이불을 뻥뻥 차며 괴로워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고백받는 상상을 하느라 민망해 죽을 것 같았는데! 어째서 지금 광증이 발현된 건가.
‘테오도르 신관에게 꾸준히 치유받은 이후로는 광증이 나타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건가?’
종일 귀족들의 견제에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심지어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인 마담 르블랑까지 의심해야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너무 얄궂었다. 신이 그녀를 괴롭히려고 했다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로제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끙끙 신음했다. 얼른 방으로 찾아가서 그를 도와줘야 하는데 결심이 잘 서지 않았다. 오 분만, 아니, 일 분만이라도 더 쉬고 싶었다. 그녀는 벽 너머의 상황을 애써 모른 척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무슨 일인지 갑자기 정말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커다랗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뭐지?’
당황한 로제타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방금까지 벽 너머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어느새 몹시 가까워졌다는 것을. 끼이익- 깊은 적막 속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응시했다. 곧 어둠 사이로 환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발견했다. 아르문트였다.
“-?!”
로제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자신의 방을 찾아올 줄이야 상상치도 못했기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를 향해 사르르 눈웃음을 짓더니, 이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화악!
“꺗……!”
“로제.”
너무 당황하고 놀란 탓일까. 로제타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아르문트가 그녀의 침대로 올라왔고, 또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로제.”
아르문트는 아직 말을 다 배우지 않은 아이처럼 로제타의 애칭만 반복해서 불렀다. 그림 같은 얼굴 위로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다만 천사 같은 외모에 속아선 안 된다. 진득한 욕망이 배어 나오는 눈빛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음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전하, 이러면-!”
“또 키스하자.”
로제타는 그를 황급히 제지하려 하였으나 아르문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로제타의 손목을 잡더니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곧 그녀의 손바닥에 두툼한 근육이 담겼다. 쿵쿵쿵. 단단한 피부를 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하고 싶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거친 목소리였다. 그 솔직하고도 낯뜨거운 내용에 로제타는 또다시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저, 전하-”
“너도 그렇잖아.”
그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제타는 얼음이 되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까 자신이 상상했던 걸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할짝. 그가 피 묻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그 속을 파고들고 싶었으나 단단히 닫혀 있어 불가능했다.
“입 벌려, 로제.”
당연히 로제타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불타는 고구마 같은 얼굴로 경직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