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내가 그대를 덮친 건가?2021.10.31.
어째서인지 지금의 아르문트는 이전보다 훨씬 조급해 보였다. 호흡도 거칠었고, 눈빛도 어딘가 초조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에는 로제타 또한 너무 정신이 없었다. 아르문트가 제 입술을 핥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
아르문트는 그녀와 입을 맞출 듯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한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거친 숨을 뱉는 모습이 퍽 관능적이었다. 로제타는 그 매혹적인 모습을 코앞에서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 지금 자신은 아르문트에게 원치 않는 입맞춤을 당한 상황이다. 그러니 불쾌해야 마땅한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가슴이 쿵쾅거리고 온 피부가 간질거리는 이 느낌은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그걸 깨닫자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내가 이렇게 변태였나.’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입맞춤을 당하고도 좋아하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욕구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생 연애와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욕구가 쌓인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이유가 무엇이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로제타는 눈을 부릅뜨고 아르문트를 노려보았다. 만만히 당해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녀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아르문트는 목적지를 변경한 상태였다. 시야에 그의 결 좋은 흑발이 찰랑거리는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 곧 목에서 이상한 촉감이 느껴졌다. 춥.
“읏!”
생경한 느낌에 로제타가 신음을 흘렸다. 매우 낯설고도 낯설지 않은 촉감. 아르문트가 또다시 그녀의 목을 빨아들인 것이었다.
“전하! 아, 안 돼요!”
그가 만든 키스 마크 탓에 이미 한 번 곤란했었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이라니. 로제타가 경악하여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순순히 밀려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힘이 두 배는 더 세진 것 같았다.
“싫어.”
네가 키스 안 해줬잖아. 그는 고양이같이 새초롬한 눈매로 대답했다. 그러곤 갈급히 그녀에게 얼굴을 묻었다. 이번에는 쇄골 부분이었다.
‘돌았나 봐, 진짜!’
따끔하게 쇄골을 깨물다가 또 느릿하게 핥아 올리는 행동에 로제타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녀가 한때 아르문트를 조련하기 위해 입맞춤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놈의 고양이 훈련 책에 홀려서 그릇된 판단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전하. 제가 안 된다고 했죠.”
“큭……!”
로제타가 단호하게 그의 얼굴을 떼어냈다. 아르문트의 힘이 워낙 센 탓에 밀어내기가 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래 봤자 그녀보다야 약하니까. 그녀는 아르문트를 단단히 제압한 채로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했다. 그녀가 밤사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르문트가 알 수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로제타가 그에게 약속한 것은 발정이 난 그를 무사히 제압해주는 것이었지, 스킨십으로 조련을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테오도르 신관 덕분에 광증이 발현되는 횟수도 줄어들었겠다, 그를 조련할 생각은 이만 접어도 될 것 같았다. 처음 약속한 대로 얌전히 기절시켜주는 게 최선이리라.
‘내일 좀 아프긴 하겠지만…….’
아르문트가 내일 목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제 의지는 아니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남의 목에 이상한 자국을 남겼으니 그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결연한 눈빛을 하고선 단호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그녀의 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던 아르문트가 갑자기 잠잠해진 것이다. 그녀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몸에 힘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로제타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르문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표정은 언제 사나웠냐는 듯 평온했다. 로제타가 의아한 마음에 눈만 껌뻑거리는 찰나, 갑자기 아르문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름한 속눈썹 아래로 방금과는 어딘가 다른 빛을 뿜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로제타는 혹 그가 난동을 부릴까 그를 붙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아르문트는 얌전했다. 몸부림을 치기는커녕, 멍한 눈빛으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제타?”
그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로제타는 알아차렸다. 아르문트의 광증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가 이성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저, 전하? 정신이 드셨어요?”
그녀는 재빨리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을 떼어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필 이 상황에 정신을 차리다니. 저번에도 그랬지만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이게…… 무슨.”
아르문트는 무척 당혹스러운 듯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주변을 살폈다. 낯선 방의 모습. 잔뜩 흐트러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로제타.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자신.
‘증상이 또 나타난 건가?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아르문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미세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의 시야에 로제타의 입술이 담겼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가 묻어 붉은 입술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 시선을 돌렸으나 연이어 다른 증거들을 발견할 뿐이었다. 로제타의 하얀 목과 쇄골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번들거리는 모습으로. 여인과 밀접한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아르문트였으나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내가, 그대를…… 덮친 건가?”
붉은 입술 사이로 참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목소리 끝이 잔뜩 떨렸다. 당혹스러운 것은 로제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성이 없는 그와 입을 맞춘 걸 들켰다는 사실이 민망하기도 했고, 자신이 광증 상태일 때 어떤지 알면서 굳이 물어오는 게 황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공격하려는 의도로 덮친 게 아니라, 다른 의도로?”
“네.”
제발 아니라고 답하길 바라며 물었으나, 로제타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아르문트는 위화감을 느꼈다. 꼭,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 같지 않은가.
“저, 괜찮아요, 전하. 이번에도 제가 잘 제압 중이었고…….”
이어지는 로제타의 말이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광증이 발현될 때마다, 자신이 로제타에게 몹쓸 짓을 해왔다는 확신을 말이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아까 전 로제타처럼 확 달아올랐다. 제기랄.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욕을 뱉었다. 자괴감이 꾸역꾸역 치밀어 올라왔다. 도대체 지금까지 그녀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엇을 시켜왔단 말인가. 그 와중에 자신의 몸은 로제타와 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미친 게 틀림이 없다.
“전하? 뭐 하시는……?!”
로제타가 말하다 말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난데없이 아르문트가 침대 아래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잔뜩 어두워진 얼굴만 아니었다면 프러포즈라도 하는 줄 알법한 자세였다.
“미안해, 로제타. 입이 있어도 차마 할 말이 없군.”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그대에게 못 할 짓을 했다. 내가 미쳤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널 욕보였을 줄은…… 몰랐어. 미안하다.”
“네? 아니, 다 알고 시작한 거잖아요. 전하께서 원해서 그러신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걸 어떻게-.”
“원래 그런 게 아니야.”
갑작스러운 고백에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그런 게 아니라니? 저게 무슨 말이야? 그녀의 황당한 눈빛을 확인한 아르문트는 죄를 고하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짐승 같다고 말했던 건, 가까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걸 말한 거였어. 맹세컨대 단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입을…… 맞추거나, 취하려 한 적은 없다.”
“……네? 그, 그렇다는 건…….”
로제타가 말을 더듬거렸다. 상상도 못 한 얘기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것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흠흠, 네. 그…… 강하시더라고요.”
-“알고 있다. 꽤 셌을 테지.”
그럼 이때 말했던 것도 정력을 말한 게 아니었구나! 그제야 많은 것들이 이해가 갔다. 왜 아르문트가 밤에 있었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물어왔는지도. 정말 그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아르문트가 다른 사용인에게 이런 식으로 들이대지 않은 게 다행이면서도, 왜 자신에게만 다른 반응을 보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의 이상 반응도 지금에서야 눈치챈 아르문트가 이유를 알고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로제타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그럼 왜, 저한테만 그러신 거예요?”
아르문트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차마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로제타의 차림새가 무척 무방비했기 때문이었다. 헐렁한 잠옷 아래로 맨 살결이 슬쩍 드러났다. 아르문트는 최대한 그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대이기 때문일 테지.”
자신의 본심이 그런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아르문트는 이렇게 확신하면서도 작게 실소했다. 아주 처음부터, 자신은 그녀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이를 통해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제법 흥미로운 발견이었으나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미안해, 로제타.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지.”
필요하다면 몸을 침대에 꽁꽁 묶어서라도. 아르문트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로제타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뇨, 아니에요. 오해였지만 어쨌든 제가 하겠다고 한 거고…… 전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그만 사과하세요.”
“행여나 또 내가 미친 짓을 하려 하면, 곧장 날 걷어차. 마구잡이로 때리고, 머리를 날려도 좋아.”
“네? 그건 조금…….”
그러면 바로 죽을 텐데요.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말을 삼켰다. 그는 그저 당황했을 뿐인 자신과 달리 정말 괴로운 얼굴이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이와 입맞춤을 한 거니, 참담할 만도 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대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온 신경이 쓰여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저게 대체 무슨 의밀까.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두 뺨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그 때문에 잠옷 원피스가 따라 올라가 허벅지가 슬쩍 드러났다.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부디 내 말대로 해줘.”
그는 이불을 끌어와 그녀의 허벅지를 덮어주었다. 까슬한 이불이 다리를 스치는 감촉에 로제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르문트의 눈빛이 몹시 뜨거웠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대에게 입을 맞추고 싶진 않으니까.”
혼란스럽던 마음에 아르문트가 또다시 폭약을 던졌다. 그녀가 흡 숨을 들이켰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온 방에 팽만했다. 숨을 쉬는 것도, 시선을 돌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가슴이 바짝 조여오는 기분에 로제타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 제정신으로는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낸 걸까. 로제타는 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이 발언은 실수였다며 돌이키고 싶었으나,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걸.”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허벅지를 덮은 이불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팔뚝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몰라서 묻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씹어먹을 것 같은 시선이 그녀를 옭아맸다. 흑표범과 같은 황금안이 격렬하게 이글거렸다. 고상한 표정 아래 애써 감춰두었던 욕정이 기어코 튀어나오고 말았다. 광증 상태일 때와 달리, 아르문트는 제 위에 있지도 않고, 또 거리도 그렇게까지 가깝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이 훨씬 더 숨이 막혀왔다. 제 다리에 스칠 듯 말 듯 한 그의 손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마침내 단단한 손가락이 피부에 닿은 순간,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괜히 자극하지 마, 로제.”
안 그래도 미칠 것 같으니까.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