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관리의 날2021.11.11.
큰일이라는 소리에 로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전 생에 있었던 ‘큰일’들이 연이어 떠오른 탓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아르문트와 관계된 것들이었다.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녀는 다급히 제 목걸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목걸이는 평소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아르문트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분명 아침에 전하가 커프 링크스를 착용한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그사이 빼기라도 한 건가?!’
로제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르문트의 방이 있는 쪽이었다. 더 생각할 시간이 없다. 얼른 달려가 그의 안위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발을 뗐다. 그러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웬만큼 운동한 사람 못지않은 괴력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하녀로 있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운 힘의 소유자, 멜라니의 짓이었다.
“어휴,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바로 전하부터 찾기는. 그런 거 아니니까 이리와!”
“좋을 때지 뭐.”
그들은 대단한 사랑꾼이 납셨다고 중얼거리며 로제타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영문 모를 상황에 로제타는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아니…… 큰일이 났다며?”
“응, 나긴 했지.”
그런데 왜 내 방으로 들어와? 로제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멜라니와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얼굴에 큰일이 났어.”
“머리랑 옷에도.”
얼굴에 큰일이 났다니.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란 말인가? 로제타는 도무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바보처럼 제 뺨만 더듬거렸다. 멜라니는 그런 그녀를 익숙하다는 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로제타, 너! 이번 연회에 전하 파트너로 참석한다며. 러크가 다 말해줬어.”
그제야 로제타는 상황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둘의 눈매가 왜 이리 사납나 했더니, 저 소식 때문인 모양이었다.
‘러크 자식.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입이 싸지.’
기사단장과 리처드에게 호되게 혼난 이후 제법 빠릿빠릿해졌다 싶더니, 입은 여전히 잘 간수하지 못하는 듯했다.
“으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로제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인했다. 한때는 자신과 아르문트의 관계를 부정하기 바빴던 그녀였으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무어라 더 부연하기도 민망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게, 결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말하면 너희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로제타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고작 외출 한번에도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꾸며주려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무려 황실 연회에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라니. 멜라니와 엘리아가 얼마나 흥분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하던 엘리아까지 목청을 키웠다.
“결심하자마자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니야-!”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고음에 로제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멜라니도 예상 밖의 목청에 깜짝 놀란 듯 흠칫 몸을 떨더니, 아닌 척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야 미리부터 관리를 하지!”
“에이, 무슨 관리까지……. 그리고 착각한 것 같은데, 연회는 내일이 아니라 모레야. 그것도 저녁. 그러니 아직 시간은 충분해.”
로제타가 두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진정시켜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멜라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연회 날짜를 모르고 있겠어? 심지어 나는 그날 도우러 가기까지 하는데.”
“응? 그럼 왜…….”
“내일은 당연히 온종일 관리해야지! 이름하여 ‘관리의 날’이라고. 이미 네 휴가도 우리가 연장해놨어.”
“응, 그리고 우리 휴가도 신청했고! 내일 하루는 오로지 네 관리를 위해서만 쓸 거야!”
온종일이라고? 로제타의 얼굴이 다시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잡혀 있는 것도 힘들어 죽을 것 같았는데, 그 짓을 하루 내내 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신입 기사 때처럼 몇 시간 동안 얼차려를 받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설마, 우리의 정성이 싫은 건 아니지, 로지?”
“몇 없는 휴가까지 썼는데, 설마-?”
로제타의 표정을 확인한 멜라니와 엘리아가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전쟁 중 수많은 적군에 둘러싸였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던 로제타는 단 두 명의 여인에 의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초조감을 느꼈다.
“싫다니, 그럴 리가…… 하하하. 너희 말대로 할게. 너무 좋다.”
그녀는 애써 눈매를 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단한 내일을 상상하니 벌써 눈물이 고일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누워.”
“으앗!”
멜라니는 기다렸다는 듯 로제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얼굴에 시원한 질감의 젤을 치덕치덕 발랐다. 엘리아 또한 로제타의 머리카락에 젤이 묻지 않도록 정리해주며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모레 연회에 예쁜 귀족 영애들이 오죽 많이 오니? 게다가 전하는 웬만하면 파트너와 동행한 적이 없으시니까, 분명 관심이 쏠릴 거란 말이야.”
“물론 우리 로지는 어딜 가도 독보적일 테지만, 그래도 관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 너는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눈을 감고 누운 로제타가 일순 몸을 움찔거렸다.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오른 탓이었다. 예쁜 귀족 영애. 이 호칭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루니엘라 공녀…….’
아르문트의 파트너였어야 할 여자이자, 그의 마음이 마땅히 향해야 할 사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목소리를 떠올리니 절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르문트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와,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죄책감이 마구 엉켜 가슴을 짓눌렀다. 이러한 로제타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친구들은 들뜬 목소리로 질문을 해왔다.
“어머, 로제타. 저 옷이 네가 모레 입고갈 드레스야?”
“세상에, 너무 예쁘다……! 저런 느낌은 처음 봐!”
눈을 감고 있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로젠다이엠에서 맞춘 드레스를 제 방에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으응, 그-.”
“입 벌리지 마! 입안에 젤 들어갈라.”
대답해주려 했으나 입술을 떼자마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럼 질문은 왜 한 거야?’
이런 피부 관리를 받아본 적이 없는 로제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뒤로는 나름 편안한 시간이 이어졌다. 멜라니와 엘리아는 그녀의 피부에 이것저것을 바르고 올리며 수다를 떨었고, 로제타의 역할은 그저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까지 편안하지는 않았다. 드레스를 생각하니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황후가 즐겨 찾는 의상실, 라트랑제에서 제대로 무시를 받았던 기억이었다. 로젠다이엠에서 만든 예쁜 드레스를 루니엘라 영애가 입고 파티에 참석하는 것. 그리하여 라트랑제의 인기를 누르고, 의상실 주인의 사촌인 애슐리 버틀러의 콧대를 꺾어주는 게 자신의 목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틀어져도 너무 틀어져 버렸다.
‘괜찮아, 이 정도 변화쯤이야 되돌려놓을 수 있을 거야…….’
로제타는 괜찮을 거라며 마음속으로 재차 중얼거렸으나, 불안한 마음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 아침 해가 뜬 순간부터 로제타는 어젯밤 멜라니와 엘리아에게 그들의 말대로 하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 ‘관리’의 세계는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어마어마했다. 얼굴 관리는 물론이고, 공들인 목욕에 향유로 마사지까지. 황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아무리 휴가를 썼다고 한들 나름 직장 안이거늘,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정도였다. 엘리아는 자신이 한때 귀족 영애를 모셔본 적이 있다며 예술적인 테크닉으로 로제타의 얼굴과 몸을 지압해주었고, 멜라니는 그동안 로제타의 손을 붙잡고 치덕치덕한 크림을 발라댔다.
“너는 무슨 손이…….”
이렇게 거칠어. 멜라니가 말을 삼켰다. 하녀로 오래 일해온 자신보다 손이 더 거칠다니. 어떻게 귀족 영애가 이럴 수가 있나. 탄탄히 박인 굳은살은 사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생긴 것이었으나, 이를 모르는 멜라니의 머릿속에는 좋지 않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집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당했으면…….’
멜라니가 짠한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저기, 나 밥 좀 먹으면 안 될까? 아까 빵 하나밖에 안 먹어서 배가 고픈데…….”
“안 돼. 참아.”
그러나 그렇다고 먹을 것을 허락해주지는 않았다. 내일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데 빵은 무슨 빵이란 말인가! 굶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 판이다. 로제타는 다시금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한 제 결정을 후회하며 밥 대신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또 잔뜩 시달리다 보니 시간이 천천히 흘러 하루가 지나갔다. 정말로 종일 관리만 받다니. 장담하건대 이것은 모든 회귀를 포함한 로제타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지루한 하루였다. 그리고 마침내 연회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먹을 수 있겠지!’
아무리 어제 만족스럽지 못하게 먹었다고 해도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한 생각이 이거라니. 오늘은 무려 아르문트가 할 말이 있다고 예고한 날이건만, 배고픔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회는 초저녁에 시작될 예정이었고, 그때까지 로제타에게 허락된 음식은 조그마한 케이크와 쿠키 몇 개뿐이었다.
“로제타 양, 조금만 더 참으세요.”
로젠다이엠의 주인, 엠마는 이른 아침부터 로제타를 찾아와 전문적인 솜씨로 그녀를 치장해주었다. 듣자 하니 아르문트가 제대로 꾸며줄 시녀가 없는 로제타를 배려해 그녀를 궁 안까지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 참 고맙긴 했지만, 로제타에게는 이에 감사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치장이고 뭐고 배고파서 더는 못 참겠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만큼 먹는 양도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많은 그녀였다. 건강하고 튼실한 몸을 추구하는 로제타로서는 잠시 예뻐 보이기 위해 굶기까지 해야 하는 귀족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은 허기를 참기도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탈주해, 우연히 만난 러크의 점심을 몽땅 빼앗았다.
“그거 다 내놔요!”
“안 돼! 로제타 이 악마야아!”
러크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울부짖었으나, 로제타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입을 잘못 놀린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니겠는가. 음식을 먹고 방으로 되돌아온 로제타는 포만감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치장을 받았다. 또다시 지겨운 시간이 지나갔다.
“자, 다 됐습니다.”
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도 로제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반쯤 졸고 있기도 했을뿐더러, 지금까지 ‘다 됐다’는 말에 여러 번 속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끝이에요. 확인해봐요, 로제타 양.”
“흐아암, 수고 많으셨어요…….”
로제타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미 멜라니와 엘리아가 작정하고 꾸며준 적이 있었기에, 그때와 별다를 것 없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거울을 확인한 순간,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며 허리 근처에서 살랑거렸고, 옆머리는 곱게 땋은 채 화사한 장식으로 꾸며놓았다. 얼굴에는 무슨 짓을 했는지 눈이 배는 커 보이는 데다, 입술은 장밋빛으로 반짝거렸다. 멍하니 속눈썹을 살랑거리는 모습마저 우아해 보일 정도였다.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려요, 로제타 양.”
엠마가 칭찬한 대로, 루니엘라 영애를 생각하며 제작한 푸른 드레스는 오로지 로제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하게 어울렸다. 작은 보석이 알알이 박혀 곳곳에서 은은하게 반짝거렸고, 하얀 꽃으로 어깨와 허리를 장식한 것도 무척 아름다웠다.
“진짜…… 귀족 영애 같네, 나.”
로제타가 입을 살짝 벌리고 감탄했다. 뒤에서 멜라니가 그녀를 불쌍해하며 왈칵 눈물을 터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로제타.”
듣기 좋은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오자 로제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데리러 왔어.”
아르문트가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