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2021.11.14.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한두 번 파티에 따라갔던 것도 아닌데, 그를 마주하는 것이 왜인지 부끄러웠다. 어쩌다 보니 이틀이나 아르문트를 마주하지 않은 그녀였다. 사실 어제는 몰래몰래 그의 주위를 맴돌며 안위를 살피기는 했지만, 눈길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날 밤, 아르문트의 진심을 엿본 이후로 그를 피하게 된 꼴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그가 정식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한 날이다. 배가 너무 고파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적당히 음식을 챙겨 먹은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르문트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이런 차림이라니……. 으으, 왜 이렇게 민망하지?’
로제타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분명 멜라니와 엘리아가 데이트라며 잔뜩 꾸며준 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는 게 영 부끄럽고 긴장이 됐다. 호위 기사가 아닌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귀족 영애처럼 차려입은 적은 드물어서 그런가. 로제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제 상태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멜라니는 그런 그녀를 답답하게 응시했다.
‘황태자 전하가 부르시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뭐 하는 거람?’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른 로제타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르문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자신이 더 안달이 났다. 그렇기에 멜라니는 로제타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 문을 열겠습니다!”
“자, 잠깐……!”
차마 말릴 새도 없이 멜라니의 손이 문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문이 벌컥 열리고, 환한 조명 속에 아르문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랜만에 커다란 연회에 참석하는 만큼, 아르문트는 화려한 정복 차림이었다. 금장으로 장식된 검은색 정복 위로 새까만 코트를 걸친 그의 모습은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눈부셨다. 살랑거리는 앞머리 아래로는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눈동자가 로제타를 향해 빛을 냈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로제타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또다시 말을 잃었다. 아르문트의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작은 충격이 일 정도였다.
‘만약 오늘 내게 고백한다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 저렇게 멋지게 하고 온 거야!’
로제타가 드레스 자락을 꽉 말아쥐었다. 물론 제 주군은 언제나 황홀하리만큼 잘생겼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하고 오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한편, 충격을 받은 것은 아르문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작은 정도가 아니라 제 속에서 폭탄이 연속해서 터진 것 같은 수준의 충격을 받았다. 황금빛 눈동자는 로제타를 발견한 이후로 크게 일렁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잠시 숨이 멎은 것 같았다.
‘괜히 파트너 신청을 했나.’
아르문트는 이를 꽉 깨물며 그녀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한 것을 짧게 후회했다. 저 찬란한 모습을 다른 놈들이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질투로 속이 쓰렸다. 심지어 제 뒤에 있는 리처드가 로제타를 보는 것조차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떠세요, 전하?”
멜라니가 용감하게 아르문트의 의견을 물었다. 사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미 그의 얼굴에 사랑스럽다는 말이 잔뜩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고생한 만큼 직접 말로 듣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였다. 그래서 멜라니는 ‘미친 황태자’라며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르문트에게 아주 당당한 태도로 대답을 요구했다. 아르문트는 눈썹을 슬쩍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지나친 감이 있군.”
예상 밖의 대답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아르문트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어머나. 멜라니와 엘리아가 동시에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가렸다. 그리고 로제타의 얼굴은 화르르 불타올랐다. 세상에, 전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전하의 머리가 맛이 가기라도 했나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아르문트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했다. 모두가 아는 세상의 진리를 언급한 것처럼.
“전하. 슬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르문트의 뒤에 서 있던 리처드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로제타에 대한 마음은 접었기에 가슴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커플의 눈꼴신 모습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시간을 확인한 아르문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치며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로제타 양, 이만 가실까요.”
로제타가 질끈 눈을 감았다. 다른 놈이 했다면 오글거리고 징그럽다고 생각했을 대사이건만, 아르문트의 입에서 나오자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흥분한 멜라니가 콧김을 훅훅 뿜는 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지칠 줄 모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검은 장갑을 낀 손바닥에 맞닿자 짜릿한 느낌이 피부로 번졌다. 아르문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곤 로제타를 이끌었다. 황태자 궁을 나서자 화려한 황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가 열리는 본궁까지 마차를 타고 갈 모양이었다. 마차에 오른 로제타는 조용히 앉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드레스 차림도 매우 어색한 데다가, 차마 아르문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로제.”
아르문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애칭을 불러왔다. 로제타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조심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시야에 담긴 아르문트의 얼굴에는 피부가 간질거릴 정도로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
“네, 네. 괜찮아요.”
아마 그녀가 긴장한 게 보인 듯했다. 로제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천하의 로제타 메이필드가 부끄러운 티를 낼 수야 없지. 그녀는 이렇게 다짐하며 최대한 여상한 표정을 가장했다.
“전하, 덥지는 않으세요? 옷이 여름에 입기에는 좀 두꺼워 보이는데…….”
“의견은 그게 단가?”
“네?”
로제타가 되묻자 아르문트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톡. 그의 다리가 워낙 긴 탓에 자연스럽게 무릎이 닿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일부러 그녀에게 몸을 붙인 것이었다.
“그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제법 신경 써서 차려입었어.”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손을 은근히 제 얼굴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니 예뻐해 줘, 어서.”
‘펜리르 신이여 맙소사.’
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로제타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두 눈을 마주 보며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자신 스스로밖에는 없었고, 로제타는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어내며 더듬더듬 칭찬의 말을 뱉었다.
“어, 음…… 예뻐요, 전하.”
“영광이군, 로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아르문트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음을 흘렸다. 붉게 물든 그녀의 뺨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는 여기서 더 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으나, 곧 본궁에 도착하리라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우리가 연회장에 들어갈 때면 이미 다른 귀족들은 대부분 도착해 있을 거야.”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은 파티에 늦게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녀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파트너를 대동하는 건 처음이다 보니 분명 관심도 쏟아질 테고.”
이번에는 움찔 몸을 떨었다. 원래 아르문트가 제일 처음으로 대동한 파트너는 루니엘라 영애였는데. 그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대에게 시비를 걸거나, 의도가 어땠든 간에 그대를 불편하게 한다면. 지체하지 말고 내게 말해.”
“말하면 어떻게 해주시려고요?”
로제타가 무거운 마음을 숨기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르문트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글쎄…… 내가 어떻게 할 것 같나?”
여전히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에서는 섬찟한 살기가 느껴졌다. 로제타는 어쩐지 제 주군이 발레리안처럼 변하는 것 같다는 기분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모쪼록 내 곁에 붙어 있도록 해. 행여나 그레이한이 말을 걸면 무시하고.”
“네, 그럴게요.”
그레이한이 언급되자 아르문트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레이한에게 맞고 쓰러진 로제타의 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로제타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전하 곁에 찰싹 붙어 있을 테니까요!”
그래야 확실하게 호위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말을 삼켰다.
“고마워.”
아르문트가 살포시 웃었다. 기다란 눈매가 느릿하게 휘어지는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젠장!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단도로 심장을 찔린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미소는 공격이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어떤 전쟁에서도 패한 적이 없는 그녀였으나, 이 전투 아닌 전투에서는 어쩌면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마음속에 깃들었다.
‘아니야! 미인계쯤이야 이겨낼 수 있어!’
오늘 나의 대답은 거절이야, 거절! 로제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계속해서 되뇌었다. ***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 박동도 더 거세졌다. 아르문트와 맞잡은 손에서는 금방이라도 땀이 배어날 것 같았다. 연회장에서 받게 될 관심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을 회귀해도 그녀는 늘 군중의 관심 한 가운데 있었고, 로제타는 그 시선이 익숙하다 못해 지겨웠다. 그런데도 이토록 조급해하는 까닭은, 연회장 안에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직감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죄책감의 대상인 루니엘라 영애를 마주하게 될 상황도 못내 불편했고 말이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문을 열어라.”
“예!”
연회장 문 앞을 지키던 경비병이 아르문트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이더니,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러곤 목청을 돋우어 황태자의 입장을 고했다.
“위대한 라그나르 제국의 황태자이신 아르문트 볼드윈 폰 라그나르 님과, 그 파트너이신 메이필드 남작가의 로제타 메이필드 양이 드십니다!”
꿀꺽. 로제타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문이 훤하게 열림과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파트너를?”
“메이필드라니, 그게 어디…….”
“세상에, 저 드레스 좀 보세요.”
반응은 다양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 헉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그 황태자가 여자를 대동했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리 상냥하지 못했다. 하녀. 정부. 초라한 남작가. 귀가 좋은 로제타에게는 이러한 단어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무리 회귀해도 달라지는 게 없군.’
로제타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녀와 정부라는 호칭은 이번 생에 처음 얻게 된 것이었으나, 취급은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힘을 얻고 소드마스터 자리에 올라도, 언제나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있었다. 때로는 얼굴과 몸으로 황태자를 유혹해 호위 자리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로제타는 뻔하디뻔한 귀족들의 작태에 권태감을 느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익숙한 얼굴도 많았다. 얼마 없는 고위 귀족들은 너무 많이 봐서 질릴 정도였다.
‘어, 저기에…….’
로제타가 먼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을 인지했다. 그에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전하.”
자주 들었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