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연회의 시작 (75/145)

75화. 연회의 시작2021.11.18.

시선을 옮기자 웬만한 황족 못지않게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르문트가 도착하기 전부터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던 미남 중의 미남, 발레리안이었다.

16549578846601.jpg“며칠 만에 뵙는군요.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16549578846607.jpg“윈저프리드 경.”

발레리안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저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대마법사가 황태자의 편에 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으나, 단지 소문일지도 모른다며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들어오자마자 먼저 찾아가 인사하는 모습을 이렇게 직접 확인하니, 이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는 따분하다는 듯 샴페인만 마시던 발레리안의 얼굴이 황태자의 곁에선 한없이 밝기만 했다. 그 고고하던 대마법사를 저렇게 홀려놓다니! 몇몇 귀족들이 경악했다. 물론 그의 얼굴이 밝아진 이유는 아르문트가 아닌 로제타 때문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진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16549578846607.jpg“연회에서 경을 마주하다니 별일이군. 그대는 파티를 즐기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만.”

16549578846601.jpg“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를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전하께서 참석하시니 저 또한 마땅히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16549578846607.jpg“마음은 고맙네만 무리하지는 말게.”

16549578846601.jpg“예, 전하.”

그들의 대화 내용을 훔쳐 들은 귀족들은 황태자가 대마법사와 연을 맺은 게 확실하다며 몰래 떠들어댔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런 그들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16549578846637.jpg‘이걸 의도한 거구나.’

자신 앞에서야 물렁하기 짝이 없는 발레리안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몹시 계산적인 그였다. 공손한 인사말도, 그답지 않은 친절도 모두 귀족들에게 제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리라. 아르문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그가 로제타로서는 무척 고마웠다.

16549578846601.jpg“그나저나.”

발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제타 쪽을 응시했다. 그는 목 안에 무언가 걸린 사람처럼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78846601.jpg“파트너분께서 아주 아름다우시군요.”

그런 모습으로 내가 아닌 황태자의 곁에 서 있다는 게 짜증 날 정도로. 발레리안이 날이 선 본심을 숨겼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칭찬을 건네기까지 발레리안은 많은 인내를 해야만 했다. 로제타가 황태자의 손을 잡고 홀로 들어선 순간, 그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푸른 드레스를 입고 곱게 단장한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단지 치장 때문은 아니었다. 발레리안의 눈에는 바지를 입은 그녀도, 하녀복을 입은 그녀도 마찬가지로 예쁘기만 했으니까. 그러나 새초롬한 눈으로 아르문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그와 눈길이 닿을 때마다 옅은 분홍빛으로 물드는 두 뺨이. 그 낯설고도 애틋한 모습이 속이 쓰릴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찰나 같은 순간 발레리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저 얼굴이, 사랑에 빠진 자의 것이라는 걸. 그리고 이대로라면 자신은 영원히 로제타에서 저런 시선을 받아볼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16549578846601.jpg‘아닐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분명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고백을 거절하겠다고 말했고, 루니엘라 공녀를 마땅한 황태자비로 인정했다. 그러니 방금 그 얼굴은 자신이 잘못 본 게 틀림없다. 그는 애써 합리화하며 예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로제타에게 흉한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아름답다는 칭찬에 저도 모르게 제 질투를 담고 말았다. 상냥함을 가장한 목소리 아래 진득한 욕심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다행히 로제타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나, 아르문트는 아니었다. 무릇 남자라면 제 영역을 침범하는 놈을 본능적으로 눈치채는 법이다. 심지어 발레리안은 로제타를 제게 달라는 소리를 한 전적도 있었으니, 의심을 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16549578846607.jpg“칭찬, 고맙게 받지.”

아르문트는 서늘한 표정으로 발레리안을 내려다보며 로제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다지 거세거나 강압적인 손길은 아니었고,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의 접촉이었으나 발레리안에게는 그저 영역 표시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빠득. 발레리안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로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제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로제타만 아니었다면, 눈이 돌아 무슨 짓을 했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16549578846601.jpg“……별말씀을요.”

발레리안이 여상한 척 대답했다. 미묘한 긴장감이 두 사내의 주위를 감돌았다.

16549578878031.jpg

  그러나 다행히 그 분위기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황제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이끌고 홀의 끝쪽으로 향했다. 몇 개의 계단 위에는 황족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황금색 의자에 앉은 황제와 황후가 아르문트를 내려다봤다. 아직 그레이한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16549578846607.jpg“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16549578878038.jpg“……그래. 너도 왔으니 이제 연회를 제대로 시작하지.”

황제는 가래가 낀 듯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두컴컴한 피부를 보아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듯했다. 금방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한 황제는 로제타가 서른이 될 때까지도 죽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병이 심해질 때까지도 아르문트에게 황위를 넘기지 않던 그였다. 황제는 로제타에게 슬쩍 시선을 둘 뿐 그 이상의 관심은 두지 않았다. 다행이다.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찰나, 황제의 옆에 앉아 교태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16549578878041.jpg“어머나, 전하. 오랜만에 보는 아드님인데 조금 더 얘기를 나누셔야죠. 아르문트가 속상하겠어요.”

16549578846607.jpg“저는 괜찮습니다만.”

16549578878041.jpg“게다가 아드님이 처음으로 여자를 대동했는데, 어떤 아가씨일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영애.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르문트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황후의 목적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를 모욕함과 동시에 아르문트를 은근히 깎아내리려는 것이리라.

16549578846637.jpg“라그나르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메이필드 남작가의 로제타입니다.”

로제타는 치마를 살짝 잡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훌륭한 귀족 영애의 모습쯤이야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었다. 수차례 회귀하는 동안 가장 모범적인 사례, 루니엘라 영애를 자주 봐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제 하루 속성 과외를 받은 덕에 나름 이론도 빠삭했다. 황후는 그녀가 이렇게 완벽하게 인사할 줄은 몰랐는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뻔뻔한 목소리로 다음 공격을 시도했다.

16549578878041.jpg“어머, 얼굴이 익숙하다 했더니…….”

다음 이어질 말은 뻔했다. 로제타는 황제에게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고민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16549578878041.jpg“아르문트의 궁에서 일하는 하-.”

16549578846601.jpg“마법사 발레리안 윈저프리드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 발레리안이 끼어들었다.

16549578846601.jpg“아, 이런. 황후 폐하께서 말씀 중이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발레리안은 전혀 몰랐다는 양 능청스러운 얼굴로 사과했다. 일부러 그 순간에 끼어든 게 분명한데 말이다.

16549578878041.jpg“……아니에요, 괜찮아요.”

황후는 개의치 않는 척 대답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발레리안을 향하는 눈빛 또한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16549578878038.jpg“윈저프리드 경. 이거 아주 오래간만이군. 연회에는 무슨 일인가?”

반면 황제의 낯빛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황실의 권위에 크게 기여한 발레리안이니 반가울 만도 했다.

16549578846601.jpg“아, 황태자 전하께서 참석하신다기에,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얼굴을 비췄습니다.”

16549578878038.jpg“아르문트를 보러 왔다고?”

16549578846601.jpg“예. 최근 전하와 사이가 아주 각별해져서요. 물론 폐하에 대한 존경심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지만요.”

발레리안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답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르문트와 은근히 기 싸움을 했으면서 각별한 사이 운운이라니. 과연 공과 사를 구분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황제는 놀란 눈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하더니, 이내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16549578878038.jpg“자네가 아르문트와 가까이 지낸다니 그것참 듣기 좋은 얘기군.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라그나르의 미래가 아주 밝겠어.”

16549578904332.jpg“영광입니다, 폐하.”

아르문트와 발레리안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 모습이 더욱 만족스러운지 황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16549578878041.jpg“폐하. 이제 그만 연회를 시작하시는 게 어떨까요? 다들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보다 못한 황후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제안했다. 황제의 관심이 아르문트에게 더 집중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옆쪽에 대기 중인 악단에 손짓했다.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비로소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6549578878038.jpg“황태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윈저프리드 경도 함께 계셨군요.”

중도파 귀족, 바르가스 자작을 시작으로 수많은 귀족이 아르문트를 향해 몰려들었다. 한 명을 보내면 또 다른 두 명이, 그 두 명을 보내면 다섯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아르문트의 편에 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좋은 현상이었다.

16549578846637.jpg‘확실히 아르문트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있는 모양이군.’

로제타가 안심했다. 다만 호위기사가 아닌 파트너로서 파티에 참석한 것은 처음인지라, 아무래도 불편하기는 했다. 귀족들과 대화하는 내내 그의 옆에서 미소를 걸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들고 있는 샴페인을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고 싶었지만, 로제타는 배운 대로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몇몇은 하녀인 그녀가 우아한 척 가장하는 게 우습다는 듯 조롱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흘끔거렸다. 물론, 그런 이들은 금방 아르문트에게 걸려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16549578878038.jpg“황태자 전하.”

그리고 마침내 많은 이가 고대하던 만남이 주선되었다. 반짝거리는 은발을 고상하게 넘기고, 인자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중년의 남자. 루니엘라 공작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다른 귀족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16549578846607.jpg“루니엘라 공.”

16549578878038.jpg“그간 무탈하셨습니까.”

16549578846607.jpg“덕분에, 건강했지.”

16549578878038.jpg“다행이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방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윈저프리드 경도 함께하면 좋을 것 같군요. 루니엘라 공작은 이렇게 덧붙이더니 조심스럽게 로제타를 응시했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 대화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아르문트는 곤란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 또한 별실에서 루니엘라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혼자 남을 로제타가 걱정되었다. 로제타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읽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16549578846637.jpg“전하. 저는 잠시 디저트를 먹으면서 쉬고 있을게요. 안 그래도 배가 고팠거든요.”

16549578846607.jpg“……그래도 괜찮겠나?”

16549578846637.jpg“네. 물론이죠.”

그러니 편하게 다녀오세요. 로제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혹여 아르문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발레리안이 곁에 있는데 걱정할 게 무어가 있겠는가.

16549578846607.jpg“……그래. 금방 다녀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아르문트는 이렇게 말하며 로제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49578846607.jpg“알다시피, 그대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흠칫.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입꼬리를 씩 올리고 미소짓는 그의 모습에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르문트는 그녀의 마음에 폭탄을 투척해놓고 루니엘라 공작과 함께 별실로 떠났다. 동행하던 발레리안이 로제타를 향해 무언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남긴 말을 곱씹느라 바빠 눈치채지 못했다.

16549578846637.jpg‘정말 고백인가?’

로제타가 풀리지 않는 의문에 괴로워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겼다. 각양각색의 디저트와 과일이 놓여있는 테이블에 다다른 그녀는 눈에 띄는 것을 대충 집었다. 예쁜 노란색의 마카롱이었다. 전하의 눈을 닮았다.

16549578846637.jpg‘별걸 다 갖다 붙여!’

로제타가 제 생각에 수치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곤 노란 마카롱이 더 눈에 띄지 않도록 얼른 치워버렸다. 자신의 입안으로. 달콤한 마카롱을 열심히 씹고 있을 때였다. 아주 얄미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16549578878038.jpg“그런 고급 디저트는 처음 먹어보시나 봐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보였다. 예쁘장한 편이기는 하나, 미인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로제타의 눈에는 그저 그런 정도였다.

16549578878038.jpg“아무도 안 뺏어가니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추잡하게 허겁지겁 먹다가 체하겠어요.”

애슐리 버틀러. 라트랑제에서 로제타를 잔뜩 업신여겼던 그 여자가 이번에도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16549578846637.jpg“앗, 이게 누구야.”

그리고 로제타는 걸려오는 시비를 무시할 마음이 없었다.

16549578846637.jpg“싸구려 인생 버틀러 영애 아니세요?”

16549578958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