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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가슴이 뛰는 이유 (77/145)

77화. 가슴이 뛰는 이유2021.11.25.

로제타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 페이즐리의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한때 그녀는 라그나르의 황태자비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고, 로제타는 황태자의 기사로서 가끔 그녀까지 덩달아 호위하기도 했다. 아르문트가 페이즐리와 동석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로제타에게 페이즐리는 모셔야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다만 현재 페이즐리의 말을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가슴에 몽우리가 진 것 같았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몽우리였다.

16549579258861.jpg‘전하와 침대 위에서 그렇고 그런 짓들을 해버려서? 아니면, 내가 루니엘라 영애의 자리를 꿰차서……?’

로제타는 페이즐리의 뒤를 따라 테라스로 향하며 죄책감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와 침대를 뒹군 것도, 그의 파트너로서 연회에 참석한 것도 모두 마땅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어차피 전하와 루니엘라 영애는 결혼하고도 관계가 썩 좋지 못했고, 심지어 이번 회차의 경우 둘 사이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약혼 얘기가 천천히 나오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전하가 고백하더라도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기도 했으니 별문제 없이 진행될 것이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죄책감을 삭이기 위해 노력해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별 성과는 없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가 통로를 꽉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만 제거하면 마음의 통로가 훤히 트일 것 같은데, 로제타는 자꾸만 다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돌멩이가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테라스에 다다르자 시원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페이즐리는 망설임 없이 커튼을 치고는 뒤를 돌아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언제 가져왔는지도 모를 와인잔을 건넸다.

16549579258865.jpg“달콤한 와인 좋아하세요? 이거, 도수는 좀 높은 편이지만 향긋하고 맛있어요.”

16549579258861.jpg“네, 감사합니다.”

16549579258865.jpg“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16549579258861.jpg“아…… 네, 그럴게요.”

페이즐리의 뜬금없는 요청에 로제타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 앞에서는 잘도 나오던 연기와 가식이 차마 그녀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건 과거 페이즐리가 보여주었던 품위를 흉내 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페이즐리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기사 로제타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말투도 자꾸만 딱딱해지려는 걸 억지로 교정해야 했다. 잠시 대화가 이어졌다. 날씨가 어떻고, 연회 분위기는 또 어떤지와 같은 알맹이 없는 대화였다. 곧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페이즐리는 망설이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16549579258865.jpg“저, 메이필드 영애. 영애만 괜찮으시다면…… 이름을 허락받을 수 있을까요?”

16549579258861.jpg“제…… 이름을요?”

16549579258865.jpg“네. 영애께서도 부디 저를 페이즐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녀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청아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자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일 때는 이런 제안을 받아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이전 회차에서 로제타와 페이즐리는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였다. 로제타는 호위로서 아르문트와 페이즐리의 뒤에 서 있었고, 페이즐리는 그녀에게 무뚝뚝한 인사를 건네올 뿐 별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아주 가끔, 페이즐리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할 때가 있긴 했지만, 로제타가 시선을 인식하고 돌아보면 페이즐리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로제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16549579258861.jpg“어째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십니까?”

또다시 기사일 적 말버릇이 나와버렸다. 페이즐리는 딱딱한 말투가 재밌다는 듯 미소짓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49579258865.jpg“그야, 영애와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쿠궁. 로제타는 일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언젠가 멜라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16549579281246.jpg-“로지, 만약 너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거나, 연적 같은 관계의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서 ‘영애와 친해지고 싶어요-!’ 같은 말을 지껄이면, 절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진짜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 아니니까.”

16549579258861.jpg-“응? 그럼 무슨 뜻인데?”

16549579281246.jpg-“그건 말이야……. ‘너랑 친해지는 척하면서 널 엿먹이고 싶다’는 뜻이야.”

  물론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아가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반박하기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멜라니의 말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16549579258861.jpg‘내가 전하의 정부라는 소문을 들은 거야.’

그래서 경고를 하려고 부른 거고! 로제타가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 루니엘라 공녀가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겠는가.

16549579258861.jpg“……이름은 편하게 부르셔도 좋아요.”

16549579258865.jpg“정말요? 기뻐요, 로제타.”

16549579258861.jpg“그렇지만,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는데요.”

로제타는 떨리는 눈으로 페이즐리를 응시했다. 환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을 밤하늘 아래서 보아도 여신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으며 선언했다.

16549579258861.jpg“저는 전하의 정부가 아니에요.”

16549579258865.jpg“네, 알아요.”

잔뜩 긴장하고 말한 것에 반해, 페이즐리의 반응은 해사하기만 했다.

16549579258865.jpg“전하께서는 따로 정부를 두실만한 분이 아니죠.”

그분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페이즐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16549579258861.jpg‘반응이 이상한데?’

로제타는 눈을 껌뻑거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정부가 아닌 연인으로 여기고 있다거나.

16549579258861.jpg“연인은 더욱이 아니에요! 저를 이곳에 데려온 건, 마땅한 파트너가 없었기 때문이고……. 어쨌든 별 사이 아니에요.”

16549579258865.jpg“흠, 차라리 혼자 왔으면 혼자 왔지, 별 사이가 아닌 사람에게 파트너 제안을 하실만한 분도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페이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제타의 말을 반박했다. 로제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뻐끔거렸다. 페이즐리의 추리가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더 변명하지? 그녀는 다급히 머릿속을 뒤적여 말을 골랐다. 그러나 페이즐리가 선수를 쳤다.

16549579258865.jpg“자리에도 없는 전하 얘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사실 전 황태자 전하께 그다지 관심 없거든요.”

16549579258861.jpg“……네?”

이전 생에는 결혼까지 했으면서 그럴 리가! 그러나 아르문트를 언급하는 페이즐리의 얼굴은 정말 시큰둥해 보였다. 연모의 감정은커녕, 아주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16549579258865.jpg“제가 궁금한 건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로제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안 그래도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금세 그녀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어둠이 컴컴하게 내려앉은 밤하늘 아래, 적금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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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79258865.jpg“로제타. 조금 전에, 버틀러 영애를 제압한 거. 어떻게 한 거예요?”

흠칫. 로제타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자신을 향한 탓이었다.

16549579258861.jpg‘루니엘라 영애가 저런 눈빛으로 날 본 적이 있었나?’

이전 생에는 늘 차분하고 침착해서 어딘가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전에 없던 감정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멜라니가 얘기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따르던 여기사들에게서 보이던 것과 종류가 비슷해 보였다. 약간의 질투가 섞인 흥미, 혹은 향상심. 정답이 무엇이든, 페이즐리가 자신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16549579258861.jpg‘설마 기운이 새어나갔나? 애슐리 버틀러만 느낄 수 있도록 잘 조절했는데…….’

사실 아주 철저하게 조절하지 않기는 했다. 주위에 제 기운을 눈치챌 만큼의 실력자도 없는 데다가, 검을 배운 남자 몇이 있다곤 해도 그들은 대부분 여자가 이런 힘을 가졌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는 멍청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페이즐리가 기운을 감지할 능력이 없으리라 판단한 건 로제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제타는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16549579258861.jpg“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좀 심약한 분인 것 같아요.”

16549579258865.jpg“흐음, 그럴 리가 없는데.”

페이즐리는 가만히 눈웃음을 지으며 로제타를 응시했다. 로제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헤헤 웃으며 손에 든 와인만 계속해서 들이켰다. 페이즐리의 말대로 아주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맛이 났다.

16549579258865.jpg“뭐, 비밀 있는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죠. 진실은 앞으로 더 친해지면 말해주기로 해요.”

페이즐리가 찡긋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휴. 로제타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6549579258865.jpg“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못다 한 대화는 제가 다음번에 직접 찾아가면 이어서 해요.”

16549579258861.jpg“하하, 네에…….”

16549579258865.jpg“사실 마음만 같아선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페이즐리가 아쉽다는 듯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커튼이 있는 쪽이었다. 두꺼운 커튼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누군가 뒤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16549579258865.jpg“보다시피 다른 손님이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

페이즐리가 엄지로 커튼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커튼 너머에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린 로제타는 몸을 움찔거렸다. 굳이 기척으로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키에, 조그마한 머리, 날렵한 턱선과 넓은 어깨 등등. 저런 실루엣의 소유자는 매우 희소하다. 아르문트가 커튼 밖에서 로제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16549579258861.jpg‘얼마나 몰입하고 있었으면 전하가 온 것도 모르고……!’

로제타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두 뺨을 붉혔다. 도수 높은 술을 너무 급하게 마셔서인지 얼굴이 뜨끈했다.

16549579258865.jpg“그럼, 다음에 봐요, 로제타.”

별 사이 아닌 분과 잘해보시고요. 페이즐리가 로제타의 귓가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곤 아니라고 말할 새도 없이 커튼을 들추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로제타는 돌처럼 굳은 상태로 흔들리는 커튼만 바라보았다.

16549579258861.jpg‘루니엘라 영애가 내게 전하와의 교제를 주선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그녀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현실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난간에서 한번 뛰어내려 볼까 고민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직전, 누군가 커튼을 열고 테라스로 들어왔다. 깨끗한 밤하늘을 그대로 머리에 옮겨놓은 것 같은 남자. 아르문트였다.

16549579350407.jpg“여기 있었군, 로제.”

16549579258861.jpg“아, 죄송해요.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는데.”

16549579350407.jpg“아니, 괜찮다. 그보다…….”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향해 느릿하게 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이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16549579350407.jpg“어디 안 좋은가? 얼굴이 빨간데.”

그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로제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도 행여나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플까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16549579350407.jpg“혹, 루니엘라 영애가 그대에게 무슨 짓이라도-.”

16549579258861.jpg“아니요, 아니에요. 영애와는 그저 담소만 나누었을 뿐이에요. 얼굴은…… 아마 술 때문에 붉어진 것 같아요.”

로제타가 깨끗하게 비운 와인잔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아르문트는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79350407.jpg“많이 마셨나? 술 냄새가 나는데. 취한 건 아니지?”

16549579258861.jpg“겨우 이거 마시고 취할 리가요. 전 괜찮아요.”

16549579350407.jpg“겨우 이거라니, 그대가 주당인 줄은 몰랐군. 멋진데.”

16549579258861.jpg“주당까지는 아니거든요…….”

로제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리자 아르문트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두 눈동자에는 애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사랑스럽고 애틋한 것을 보는 시선. 그 낯간지러운 느낌에 로제타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16549579350407.jpg“어쨌든 잘됐군.”

16549579258861.jpg“네? 뭐가요?”

16549579350407.jpg“술 취한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쿵쿵. 쿵쿵. 방금까지만 해도 정상적이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아르문트의 앞에만 오면 고장이 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돌연 테오도르 신관이 조언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16549579281246.jpg-“어떤 상황에 유독 심장이 빨리 뛰는지 기록을 해두세요. 연관성을 찾으면 이유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연관성과 이유. 한 가지 가능성이, 매우 그럴듯하면서도 또 말도 안 되는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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