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우리 방으로 갈까요?2021.11.28.
로제타의 붉은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겠다며 다짐했던 것이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속절없이 그를 향했다. 아르문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차갑고 무뚝뚝하다고만 생각했던 얼굴이었지만, 이제 로제타는 그가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연약한 달빛 아래 또렷이 빛을 내는 저 눈동자에 어떠한 감정이 배어 있는지 또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직 내 입장이 그리 당당하지만은 못하지만…….”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섰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천천히 로제타의 손을 감쌌다.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또한, 더 기다리지 못하겠기도 하고.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속삭이는 듯한 음성에도 로제타는 그의 숨결 하나 놓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놓칠 수가 없었다. 일순 이 세상에 그와 자신, 단둘만이 남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죽고 처음으로 시간이 되돌아가던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더 비현실적이었다. 로제타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지금 아르문트가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알고 있었다. 다만 예상한 일인데도 믿기지 않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머리는 복잡한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아르문트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수많은 ‘왜’들을 상기했다. 왜 전하 앞에서만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뛸까. 아무리 당황했다고는 한들, 입을 맞춰오는 전하를 왜 제대로 밀어내지 못했을까. 루니엘라 영애와의 대화를 마친 후 왜 그렇게 기분이 상기되었을까. 거절하겠다고 한번 마음먹었으면 그만인걸, 왜 자꾸만 다짐에 다짐을 반복했을까. 정답은 모두 한 가지만을 가리켰다. 사실은 로제타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를 거절하면 옆에 있기가 힘들어질까 봐, 그것 때문에 거절이 망설여진다고 스스로를 속여왔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걸. 자신은 지금껏 ‘말도 안 된다’라는 전제하에 제 감정을 억눌러왔던 것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로제타.”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두 눈은 어쩐지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한 순간,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혹은 기대해 마지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쿵. 터질 것만 같던 심장이 마침내 멈춰버렸다.
“그대를 연모하고 있어.”
“…….”
“때로는 내 스스로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을 만큼…… 진심으로.”
진심. 결국 그는 이 단어마저 입에 담고 말았다. 가장 믿지 않는 말이라 했던 것이 얼마 전이거늘, 그때와 비교해 아르문트는 바뀌어도 정말 많이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에 짧게 감탄하며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로제타는 차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하얀 두 뺨만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 채로 그를 응했다. 그녀는 예상했던 고백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 복잡하던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미리 연습해두었던 거절의 말은 혀끝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대신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말이 잇새로 튀어나왔다.
“왜요?”
그토록 찾아대던 ‘왜’가 이제는 그를 향한 것이었다.
“왜 절 좋아해요?”
전하가 도대체 왜, 루니엘라 영애도 아닌 나를? 이전 생에선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게 이런 관심을 보인 적 없었으면서. 드세고 강한 본모습에는 관심 없고, 적당히 만만한 하녀라 좋다는 건가? 의도와는 달리 사고가 삐딱한 방향으로 흘렀다. 도대체 무엇이 불만인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유가 너무 많아서 다 얘기하긴 어려운데.”
“얘기해줘요.”
로제타가 눈을 부릅뜨고 요구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아르문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고백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는데. 별난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차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날 똑바로 응시하는 그대의 푸른 눈동자가 좋아.”
갑자기 웬 눈? 로제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종종 분홍빛으로 물드는 두 뺨도, 환한 미소를 짓는 입술도, 모두 아름답고.”
아르문트는 기다란 눈을 곱게 접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은근히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모습이, 연약한듯해도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강인한 속내가, 흔들림 없이 제 생각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그냥 그대의 모든 것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로제타의 눈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대를 만나고, 깊이 알아가게 된 것에 매일 아침 감사하고 있어.”
“…….”
“그대가 나를 비로소 살아가게 했으니까.”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것도, 이 더러운 곳에서 당당히 살아남고 싶어진 것도, 모두 다 눈앞의 여인 덕분이었다. 아르문트는 그 깊고 어둑한 수렁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로제타를 가슴 깊이 존경했고, 또 아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고작 말로 어떻게 이 마음을 다 표현할까.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했으나, 그 이상의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는 그저 말을 삼켰다. 좋아해, 사랑해, 연모한다, 등 비슷한 단어를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말주변이 없어 충분히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군.”
아르문트는 자신이 말해놓고서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태어나 이런 말을 입에 담아본 것은 처음이니, 어색할 만도 했다. 그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봤다. 여유로운 척 행세하고는 있었으나 내심 그녀의 반응이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로제타는 눈가까지 붉게 물들인 모습이었다. 어쩐지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해요, 전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아르문트의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그녀가 거절할 가능성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다 주어도 좋으니, 제발 그런 상황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만약 로제타가 자신을 거절한다면, 자신이 없는 곳으로 떠나간다면.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또다시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무엇이 너무한 것인지, 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무엇도 묻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리고 로제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어떻게 전하를 밀어내요.”
거절하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밀어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를 밀어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행여나 제 마음만 더 아파질까 애써 못 본 척 감춰둔, 연모의 감정을.
“저도-.”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토해내듯 목소리를 뱉어냈다.
“전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제야 꽉 막혀 있던 통로가 터지고 감정의 물결이 온 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 아르문트의 얼굴을 살폈다. 이내 햇볕처럼 따스한 미소가 시야에 담겼다.
“좋아하는 것 같다는 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그가 로제타에게 고개를 기울이더니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깜짝 놀란 로제타가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곤 서둘러 정정했다.
“좋아해요, 전하가 백 퍼센트 좋아요!”
“백 퍼센트라니. 영광이군.”
콩. 아르문트의 이마가 로제타의 것과 가볍게 맞닿았다. 그는 눈매를 여우처럼 휘며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꿀꺽. 그 아름다운 미소를 코앞에서 마주한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 아르문트의 말대로 취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여름밤의 달콤한 분위기에라도 취해버린 걸까. 온몸에 열이 오르고 낯선 욕구가 머리를 지배했다.
“전하.”
“응?”
“그럼 우리 이제, 연애하는 거예요?”
비장하게 건넨 질문에 아르문트는 다시금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대만 허락해준다면.”
로제타는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허락의 말을 뱉으려 했다. 그와의 사이가 정해진 후, 곧장 하고 싶은 행동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 메이필드.”
그러나 입술을 떼려는 찰나, 아르문트가 느닷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로즈.”
갑자기 떠나려는가 싶어 당황하는 것도 잠깐,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왔다. 흡사, 프러포즈라도 하듯이.
“부디 나와 정식으로 교제해주겠나?”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그의 말속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르문트는 느긋하게 품을 뒤적이더니, 곧 고급스러운 보석함을 꺼내 들었다. 그가 가운데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저절로 뚜껑이 열리고 내용물이 드러났다. 로제타는 예상하지 못한 선물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밀하게 컷팅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나, 다이아몬드의 광택과 크기가 여러모로 달랐다. 척 보기에도 가격이 어마어마해 보였다.
“이건…….”
“커플 아이템인데 그대 것만 광택이 덜한 게 아쉬웠거든.”
아르문트가 배시시 웃으며 부연했다.
‘커플 아이템은 웬 커플 아이템? 그냥 귀찮아서 비슷하게 만들었던 것뿐인데.’
로제타는 그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굳이 정정해서 좋을 게 없어 보였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어도 이 정도 눈치야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아르문트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로제타는 전직 기사단장답게 과감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녀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아르문트는 단숨에 몸을 일으키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툭. 값비싼 보석함이 야외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를 쥐고 있던 손은 로제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로제타는 갑작스러운 접촉이 놀랍고도 달가워 입술을 살짝 벌렸다.
“로제.”
아르문트는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며 속삭였다.
“입 맞춰도 되나?”
“네.”
마찬가지로 대답은 빨랐다. 조금 전부터 그녀가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었기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어서요.”
안 그러면 제가 먼저 할 거예요. 로제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닿았다.
광증 상태일 때와는 달리, 부드럽고 상냥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비스듬히 겹쳐져 그 속을 슬쩍 빨아들이다 가볍게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르문트의 커다란 손은 그녀의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으응…….”
맞닿은 입술이 말랑하고 따뜻해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르문트는 더욱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뾰족한 혀끝이 여린 살을 훑고 그녀의 혀를 옭아맸다. 숨결이 뒤섞이는 감각은 생경하고도 짜릿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가슴에 가득 차 몸을 가만두기가 힘들었다. 절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에 로제타는 아르문트에게 더욱 몸을 기댔다.
“하…….”
그것이 일종의 자극이 되었는지 아르문트가 잠시 입술을 떼어내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 드러난 황금안이 숨길 수 없는 욕정으로 이글거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로제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히 참아야만 하는데, 그녀의 곁에 있으면 그러기가 힘들었다. 로제타의 눈동자가, 풋풋한 향기가, 말랑한 살결이. 그녀의 모든 것이 그를 자꾸만 자극했다.
‘안 돼. 적어도 여기서는 절대.’
커튼만 쳐져 있다 뿐이지 이곳은 공공장소였다. 감히 황태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테라스에 머리를 들이밀 미친놈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재차 어금니를 깨물며 제 욕구를 다스리고자 노력했다.
“전하.”
그러나 로제타는 그런 그를 도와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 방으로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