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열락의 밤2021.12.02.
로제타는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저런 표정으로 방에 가자는 얘기를 하다니. 그것도 유혹하듯 은근한 목소리로. 다른 의도가 없다고 해도 저건 유죄다. 몹쓸 상상이 머릿속을 꽉 채우자 아르문트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숱이 짙은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자칫 잘못했다간 곧장 이성의 끈을 놓고 그녀를 잡아먹을 것만 같아 곤란했다.
“앗, 제 말은 그냥, 슬슬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아니나 다를까 로제타는 제가 언제 아르문트의 속을 헤집어놓았냐는 듯 재빨리 발뺌을 했다.
“다른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에요.”
정말 다른 의미가 없었느냐 하면은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내심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곳에서 그와 더 입을 맞추고 싶다고 바란 그녀였다. 그러나 아무리 낯 두껍다고 한들 이런 마음을 몽땅 드러낼 수야 없다. 자신과 달리 아르문트는 어쩐지 평온한 것 같아 더욱이 그랬다.
‘전하는 괜찮은데 나만 안달 난 것처럼 보일 순 없어.’
알량한 자존심이 일었다. 한때 로제타는 연애 중인 지인들이 별것도 아닌 데다 복잡하게 머리를 쓰는 걸 이상하다 여겼으나, 이제는 그 마음을 백번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전 이만 쉬러 갈까 해요. 전하는 조금 더 즐기다 오시겠어요?”
“……아니, 같이 가지. 적당히 얼굴도 비췄으니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군.”
“네에, 그래요 그럼.”
그녀가 생긋 웃으며 아르문트의 손을 맞잡았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몇 걸음 걷다 보니 어느 정도 술이 올랐다는 게 느껴졌다. 몸이 평소보다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고작 이 정도 마시고 취하지는 않는데. 아까 루니엘라 영애 앞에서 긴장한 상태로 도수 높은 와인을 급하게 들이켠 게 문제였나. 로제타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원인을 분석했다. 다만 술이 올랐다고는 해도 기분이 좋은 정도일 뿐 호위에 지장이 갈 수준은 아니었다. 이쯤이야 충분히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 적어도 로제타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아르문트는 황태자궁에 도착하자마자 리처드를 돌려보냈다. 원래 같았으면 위험하니 끝까지 호위하겠다고 고집을 부려댔을 그는 군말을 보태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아예 눈치가 없는 인간은 또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문 앞까지 다다랐다.
“도착했군.”
“그러게요.”
로제타와 아르문트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별 의미 없는 얘기만 반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옅은 조명 아래 비슷한 생각이 담긴 시선이 스쳤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다. 로제타가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눈썹이 다시금 크게 꿈틀거렸다.
“전하.”
기어코 로제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달 난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했으나, 그보다는 아르문트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큰 탓이었다. 적당히 술이 올라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이 꼭 꿈같았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꿀까 말까 한 행복한 꿈. 일어나면 이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돼버릴 것 같아 지금 당장은 자러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배시시 웃으며 제안했다.
“우리, 술 한 잔만 더 할래요?”
그러나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이었던 걸까. 아르문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곤란하다는 듯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로제타는 시무룩한 마음에 곧장 말을 바꿨다.
“아니에요,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세요.”
역시 나만 안달 났나 봐!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슬픈 얼굴로 뒤를 돌았다.
“아니.”
그리고 제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안 피곤해, 전혀.”
아르문트가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저지했다. 자연스럽게 몸이 다시 돌아가고, 아르문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니 내 방에서 한 잔만 더 하지.”
갈증이 잔뜩 일은 듯한 얼굴이었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다 보니 한잔으로 시작된 술은 곧 몇 잔이 되었고, 결국에는 와인 한 병이 텅 비었다. 밤이 저물어갈수록 로제타는 점점 술에 취했고, 또 옆에 앉아있던 아르문트의 몸은 점점 그녀와 가까워졌다. 누가 먼저 몸을 기울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깨가 맞닿는 것으로 시작하여 팔이 스쳤고, 나중에는 다리까지 접촉했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매우 만족스러워 로제타는 기꺼이 몸을 비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다시 입을 맞추고 있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한 탓에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별것 아녔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은근한 긴장감 속에 시선이 마주했던 것 때문이었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깍지를 낀 것 때문인가? 아, 내가 먼저 전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키스해달라며 유혹했던 것 같기도 하고. 로제타는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이내 포기했다. 중요한 건 이 입맞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가 아니다. 그와의 입맞춤이 절로 살이 떨려올 만큼 황홀하다는 것. 지금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흐으……. 읏!”
속절없이 밀려드는 쾌감에 로제타는 연신 신음을 흘렸다. 술기운 덕분인지 그녀는 민망한 마음도 없이 그와의 키스를 즐겼다. 아까 테라스에서의 입맞춤은 부드러우면서 신사적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격렬하고 거칠었다. 아르문트는 그녀의 뒷머리를 단단히 끌어당겨 입술을 겹치고 또 겹쳤다. 집요하게 혀를 섞고, 숨결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는 행동은 갈급하기까지 했다. 무뚝뚝하면서도 우아한 그의 평소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 로제.”
그는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사나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왔다. 로제타를 훑는 눈빛은 어찌나 뜨거운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으응…….”
너무 좋아. 로제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단지 입을 맞추고 숨결을 섞는 것뿐인데, 기분은 황홀하리만큼 좋았고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키스가 원래 이렇게 짜릿한 건가.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감탄했다. 정신없이 입술을 겹치고 또 몸을 맞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느새 로제타는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아까부터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자극받은 것이 또다시 아파진 탓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로제타가 다리를 움찔거렸다.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랑한 여체와 경직된 몸이 맞닿았다.
“으읏……!”
“큭……!”
허리가 짜릿해질 정도의 쾌감에 둘은 동시에 신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사납던 아르문트의 눈은 이제 맛이 간 것처럼 흉흉했다. 당장 그녀를 씹어먹고 싶다는 포악한 욕망이 고개를 치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르문트는 이마저 참아냈다.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그만, 로제.”
고백하자마자 침대라니. 이런 걸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정확히는 침대가 아니라 소파였지만, 어쨌든 쓰임새는 같았다. 아르문트는 딱히 결혼한 후에야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식의 신념도 없었고, 진도를 반드시 천천히 빼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서로 동의만 했다면 언제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나 그 상대가 로제타인데다, 그녀가 매우 취한 상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빠르게 관계를 갖는 건 조심스러웠다. 혹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봐, 또는 그녀가 술이 깨고 이 순간을 후회할까 봐 걱정되었다.
“부디 더 자극하지 마.”
조금만 더 했다간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아르문트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로제타는 제대로 취한 것이 확실했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는커녕, 몽롱한 눈으로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더니 엉뚱한 얘기를 꺼내왔기 때문이었다.
“있잖아요, 전하아.”
로제타가 반쯤 풀린 눈을 하고선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저는요…….”
그녀는 말끝을 어물거렸다. 말하고 싶은 게 사실 너무 많아서 어떤 걸 먼저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전하가 안전하기를 바라요. 이번에는 꼭 전하를 지켜내서, 서른네 살 이후의 전하 얼굴도 보고 싶어요. 나를 계속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저 무사하기만을 원해요. 제대로 취한 상황에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아르문트의 무사에 대한 바람이었다. 이전 회차에도 절실히 바라던 것이긴 하나 이번에는 의미가 남달랐다. 로제타는 아르문트를 좋아하게 돼버렸으니까. 그녀는 한참을 말을 고르고 골랐다. 그러나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결국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지나치게 축약된 내용이었다.
“저는 전하를 원해요.”
맹세컨대 이것은 아르문트의 건강과 안전을 원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만 해석되었다.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이렇게 말해오는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르문트는 수도승이 아니었고,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가닥 자제심마저 기어코 허물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지.”
아르문트가 그녀의 뺨을 엄지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곧 말랑한 입술이 손가락 끝에 닿아왔다.
“후회하지 않겠나?”
로제타는 두 눈을 껌뻑거렸다. 후회? 그럴 리가. 네 번의 회귀에도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날의 결정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전혀요.”
“……그래.”
아르문트가 천천히 제 셔츠의 단추를 끌어 내렸다.
“나는 이미 충분히 도망갈 기회를 줬어.”
그러니 아침이 밝고 후회한다 해도 그댈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가 집착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곤 단숨에 로제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짧게나마 중단되었던 쾌락이 다시금 그녀의 몸에 들이닥쳤다. 로제타는 높은 신음을 흘려대면서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속을 파고들어 단단한 근육에 제 몸을 밀착시켰다. 민감한 곳이 스치자 아르문트는 거칠게 눈을 번뜩이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벗겼다.
“으응! 드레스, 찢어지면 안 되는데……!”
“새로 사줄게.”
조심히 벗긴다는 건 아예 선택지에 없는 모양이었다. 투둑. 뜯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더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다시 입을 맞췄다. 소파에서 첫 경험을 하는 것 또한 그가 예상한 건 아니었으나, 지금은 차마 그녀를 침대로 옮길만한 자제심이 없었다. 화려한 드레스가 금세 아래로 떨어지고, 남에게 보인 적 없는 맨살이 드러났다. 로제타는 부끄러운 마음에 슬쩍 팔을 들어 몸을 가렸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곧바로 이를 저지했다.
“가리지 마.”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손이 느릿하게 그녀의 허리를 훑어내렸다.
“예뻐.”
그가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촉감에 로제타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저, 저만 벗는 건 억울해요.”
“그럼 그대가 날 벗겨줘.”
그럼 공평한가? 아르문트가 눈매를 휘며 속살거렸다. 그는 어느새 상의를 모두 벗은 상태였다. 남은 건 바지가 유일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로제타는 그의 말에 따라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그러자 아르문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짧게 신음을 흘렸다.
‘이걸…… 어떻게 감추고 다녔지?’
광증 상태의 그를 상대하며 아르문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원래 남자는 다 이런 건가? 아니면 아르문트가 유독 심한가? 연애 경험이 없는 그녀로서는 정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더 기다려주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 잠깐…….”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로제타가 말을 삼켰다.
“그만둘 거면 아까 그만뒀어야지.”
“그게……!”
“기회는 이미 지나갔어.”
이 대화를 끝으로 마침내 열락의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