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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한 번 더 할까 (80/145)

80화. 한 번 더 할까2021.12.05.

로제타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환희에 취해 차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대한 파도를 탄 것처럼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머리에는 연신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처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했고,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도록 그녀를 부드럽게 보듬어 안아주었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파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져서. 아르문트는 그 눈물에까지 입을 맞추며 동이 틀 때까지 로제타를 안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로제타의 피부 위로 내리쬐었다. 곧 붉은색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느릿하게 팔랑거리며 졸음이 가득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로제타는 멍한 눈으로 두 눈을 껌뻑거렸다. 희뿌연 시야에 낯선 모습이 담겼다. 사각사각한 촉감의 질 좋은 여름 이불, 햇빛이 화사하게 들어오는 화려한 방. 그리고 반나체의 모습으로 제 옆에 누워 있는 아르문트의 고운 얼굴까지. 그제야 어젯밤부터 쭉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인 기억도 함께였다.

16549579771592.jpg‘미쳤어.’

푸른 눈동자가 경악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젯밤의 자신은 미쳤던 게 틀림없다. 아무리 취했다고 한들 그런…… 그런 짓을 하다니! 로제타는 의도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정사 장면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16549579771592.jpg-“잠깐만요, 흑! 전하아, 이건 너무……!”

  라그나르 제국의 제일검이었던 자신은 쾌락에 허덕이며 연신 신음을 뱉었고.

16549579771602.jpg-“조금만 더, 로제. 응? 착하다.”

  아르문트는 울먹거리는 그녀를 야릇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유혹해댔다. 도대체 몇 번을 했던가. 소파에서 시작해서, 어느샌가 침대로 장소를 옮겼다가, 씻겨준답시고 갔던 욕실에서도 기어코 몸을 섞었다. 그 탓에 현재 로제타의 온몸에는 격렬한 밤의 증거나 다름없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고, 고된 훈련에도 멀쩡하기만 했던 허리는 뻐근하게 쑤셔왔다.

16549579771592.jpg‘내가 진짜 미쳤지! 뒷감당을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로제타는 밀려오는 후회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르문트의 고백을 받아주고, 그와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것도 그래도 괜찮은가 싶은데. 사귀자마자 ‘우리 한 잔만 더 할까요’ 따위의 진부한 말로 그를 꼬여내다니! 아무리 합의 하에 한 행동이라고는 해도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절절하게 후회하는 찰나, 탄탄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나른하게 미소짓는 아르문트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16549579771602.jpg“잘 잤나, 로제? 아침부터 그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군.”

16549579771592.jpg“저, 전하. 일어나셨어요……?”

16549579771602.jpg“전하라니. 어제는 그렇게 이름을 불러놓고.”

이제 와 내외하면 곤란하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로제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가라앉은 목소리가 매우 관능적이었다. 별것 아닌 스킨십에도 로제타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말에 잊었던 기억 하나가 또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16549579771592.jpg-“아르, 아르문트! 그만……!”

16549579771602.jpg-“하…… 미치겠군. 더 말해봐, 내 이름.”

  세상에. 내가 전하 이름도 불렀었구나. 그녀가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민망해서 차라리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심지어 지금 그녀는 반쯤 헐벗은 상태로 그와 살을 맞대고 있었다. 어제야 잔뜩 취한 탓에 부끄러운 줄도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는 느릿하게 등허리를 쓸어내리더니, 이내 여우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제안했다.

16549579771602.jpg“오늘은 다른 일정도 없는데. 한 번 더 할까?”

두 번도 좋고. 그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속삭였다.

16549579771592.jpg‘어제 그만큼이나 해놓고 또? 지치지도 않나?’

로제타는 제 주군의 남다른 정력에 혀를 내둘렀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는데, 배를 쿡쿡 찔러오는 무언가가 저게 진심이라는 걸 증명했다.

16549579771602.jpg“아니면 밥부터 먹고?”

아르문트가 지쳐 있을 로제타를 배려하여 제안했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 그녀의 목에 이를 박고 싶었으나, 소중하디소중한 제 연인에게 그리 거칠게 굴 수야 없다. 다만 그렇다고 안 하겠다는 소리는 또 아니었다. 밥을 먹이고 체력을 회복시킨 후에 다시 하겠다는 얘기였지. 그리고 이어진 로제타의 대답은 그러한 그의 기대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16549579771592.jpg“저, 저, 저는 이만 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휴가가 어제까지여서……!”

16549579771602.jpg“뭐?”

명색이 황태자의 연인이 된 그녀이거늘, 일은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하녀 일을 다시 하겠다고? 아르문트는 당황한 얼굴로 되묻고자 하였으나, 미처 입술을 떼기도 전 로제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49579771592.jpg“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고 나중에 뵈어요!”

그녀는 속사포처럼 빠르게 인사를 남기더니 도망치듯 제 방으로 사라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아르문트는 허망하게 떠나가는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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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중에 보자는 인사가 무색하게도, 로제타는 그날 하루 내내 아르문트를 피해 다녔다. 도피라니. 늘 당당하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얼굴로 아르문트를 마주해야 할지, 또 어젯밤에 있던 일에 대해선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연애도 관계도 처음인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6549579771592.jpg‘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개!’

한참 청소 중이던 그녀는 다시금 민망한 기억을 떠올리고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아르문트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감정을 인정하고 몰래 혼자만 좋아하고 말 것이지, 옳다거니 고백을 받아주면 어떡한단 말인가. 호위 상대와 연애라니. 기사가 가장 꺼려야 할 행동이었다. 특히나 로제타는 단순한 호위기사가 아닌,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며 그를 살리려는 입장이다. 그가 죽는 모습을 이미 여러 번 보았으며, 이번 생이라고 확실하게 그를 살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만약에, 또다시 아르문트가 죽고 시간이 돌아간다면? 네 번이나 반복한 짓이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연인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아야 할 뿐더러, 다음 회차의 아르문트는 그녀를 사랑하기는커녕 기억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애틋한 감정도, 소중한 추억들도 오로지 그녀의 것으로만 남게 된다.

16549579771592.jpg‘그걸 정말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로제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어젯밤 스스로에게 던졌어야 마땅하다. 술기운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며 입술을 맞댈 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감당할 만큼 제 감정이 깊은지 면밀하게 살폈어야 했다. 쿵. 로제타는 죄책감에 다시금 머리를 박았다. 더욱 답답한 건, 이 와중에도 아르문트를 생각하면 심장이 콩콩 뛴다는 사실이었다. 어젯밤의 일을 모두 무르고 싶은 마음과, 그냥 복잡한 생각 없이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에서 엇갈렸다. 그때였다. 시야 한 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빛을 내는 외모의 소유자, 발레리안이었다.

16549579771592.jpg‘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졌네. 참, 루니엘라 공작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봐야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법.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아르문트의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파악해야 했다. 그녀는 가까이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16549579771592.jpg“발레리, 안……!”

그러나 이게 웬걸.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발레리안이 홱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분명 시선이 마주했거늘, 발레리안은 마치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려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어쩐지 그의 예쁜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16549579771592.jpg‘왜 저러지? 어제 인사를 안 하고 가서?’

발레리안이 은근 쪼잔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이렇게까지 삐지지는 않는데. 다른 이유라도 있나? 로제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그는 떠나버린 후였기에 정답은 알 수가 없었다.

16549579828681.jpg“로지!”

다시 한참 청소를 하는데 뒤에서 멜라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놀란 얼굴로 뛰어오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16549579771592.jpg“멜라니, 엘리아. 좋은 아침.”

16549579828681.jpg“좋은 아침이고 나발이고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16549579771592.jpg“응? 보다시피 청소 중이지.”

16549579828681.jpg“네가 왜 청소를 해??”

16549579771592.jpg“그야…… 내 일이니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멜라니와 엘리아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로제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모르니 일단 모른척하자는 의미의 눈빛 교환이었다.

16549579828681.jpg“음. 그렇구나. 참, 로지. 어제는 고마웠어. 곤란할 뻔했는데 도와줘서.”

16549579771592.jpg“아냐, 나야말로 네 덕분에 속이 시원했는걸. 그렇지만 앞으로는 조심해. 애슐리 버틀러처럼 성격 더러운 놈이 갑자기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거니까.”

16549579828681.jpg“걱정 마! 내 성격이 더 더러워!”

멜라니는 제 가슴을 쭉 내밀며 외쳤다. 그 호방한 모습에 로제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16549579828681.jpg“그나저나, 로제타.”

흐뭇하게 웃고 있던 엘리아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79828681.jpg“어젯밤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 봐-?”

어떻게 알았지? 당황한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는 능글맞은 얼굴로 손거울을 건네주었다.

16549579828681.jpg“일부러 드러낸 게 아니라면 가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거울을 살펴보니 목덜미 근처에 붉은 자국이 진하게 남은 게 보였다. 워낙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16549579771592.jpg‘오늘 다른 사람을 몇 명이나 마주쳤더라? 거의 ‘나 전하랑 잤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그제야 발레리안이 곧장 떠난 이유도 짐작이 갔다.

16549579771592.jpg‘발레리가 이걸 봤구나……!’

고백해도 거절할 거라며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는 이 꼴을 하고 나타났으니, 황당해서 도망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친오빠나 다름없는 그에게 민망한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에 그녀는 볼을 발갛게 붉혔다.

16549579771592.jpg“으응, 사실…… 어제부터 전하랑 정식으로 만나보기로 했어.”

16549579828681.jpg“뭐? 그럼 진짜 지금까지는 연애한 게 아니었다고?”

16549579771592.jpg“응, 내가 계속 아니라 했잖아.”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지. 멜라니가 당당하게 덧붙였다.

16549579828681.jpg“어쨌든 축하해, 로지. 내가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하나 준비해왔어.”

16549579771592.jpg“뭐? 어떻게 알고……?”

16549579828681.jpg“황궁에는 눈과 귀가 많은 법이니까. 자, 여기!”

엘리아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선물을 건넸다. 로제타는 얼떨떨하게 감사 인사를 하며 포장을 풀어보았다. 귀여운 포장지를 풀자 나온 것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붉은색 끈이었다. 그것도 아주 매끈하고 부드러운.

16549579771592.jpg“이게…… 뭐야……?”

16549579828681.jpg“어른들의 즐거움을 위한 물건이야. 얼른 넣어둬!”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 순수해 보이는 엘리아는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더 많이 배운 변태였다. 로제타는 예상치 못한 선물의 등장에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주머니에 끈을 집어넣었다. 행여나 누가 볼까 두려웠다. *** 로제타는 기어코 그다음 날도 아르문트를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아예 마주치지 않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아침저녁으로 인사 정도야 했지만, 말이 더 길어지려 하면 재빨리 다른 핑계를 대고 후다닥 도망쳤다. 다만 그 와중에도 호위는 해야 하므로 그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있을 수는 없었다. 그저 온갖 지형지물을 이용해 아르문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있는 게 최선이었다. 스스로도 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관계한 이후에 도망을 다니다니. 쓰레기나 할법한 짓이 아닌가.

16549579771592.jpg‘그냥 쓰레기 하지 뭐!’

그러나 로제타는 아직은 그를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욕을 먹더라도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언젠가 해결해야 할 숙제인 걸 알면서도 최대한 미루고 미루는 심리와 비슷했다. 어차피 전하는 바쁘니 조금 더 미룰 수 있겠지. 로제타는 이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그녀도 차마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16549579771602.jpg“안녕, 로제타.”

불도 켜지 않아 깜깜한 로제타의 방에서 아르문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16549579771602.jpg“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

그것도 몹시 흉흉한 눈을 하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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