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잔말 말고 입 벌려2021.12.09.
로제타의 머릿속에 적색등이 켜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큰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망했다.’
아르문트의 서늘한 미소를 마주한 그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답을 잘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아주 큰 일이 날 것이다.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리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로제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열심히 갈고닦은 연기 실력을 선보였다.
“어머, 전하! 제 방에는 어쩐 일이세요?”
너무 반가워요! 로제타가 환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연기는 이제 그녀의 전문이었다.
“내 연인의 얼굴을 보러왔지. 종일 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오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전히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나 보군. 로제타는 입술 안쪽을 잘근 씹으며 해맑게 말을 이었다.
“어휴, 그러게요! 오늘 너어-무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뵈었어요. 아구구 허리야…….”
그녀는 제 허리를 통통 두들기는 시늉을 했다. 허리가 쑤시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일 때문이 아니라 아르문트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다기엔 하녀장이 네게 시킨 일이 없다고 하던데.”
“일은 찾아서 하는 거니까요! 하하…….”
로제타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며 애써 웃음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는 벼랑 끝에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아까 나를 보자마자 뒤돌아 도망간 건. 그것도 우연인가?”
망할, 그걸 봤구나!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말대로 오늘 로제타는 종일 아르문트를 피해 다녔다. 멀리서 그가 오는 게 보이거나, 그의 기척이 느껴지면 재빨리 방향을 틀어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제 딴에는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도망간다고 갔는데, 하필이면 아르문트가 그걸 봐버린 모양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로제타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더 변명해봤자 아르문트의 화만 돋울 게 분명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어느새 아르문트는 그녀의 코앞에 서 있었다.
“로제타.”
사나운 음성에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문으로 막혀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아르문트는 바짝 다가와 그녀를 제 품에 가둔 채 말을 이었다.
“나를 원한다 했잖아.”
그래놓고, 도망을 쳐?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살벌하게 이글거렸다.
‘내가 전하를 원한다고 했다고?’
영문 모를 소리에 로제타는 눈만 껌뻑거렸다. 몇 초의 정적 후에야 기억이 났다. 그래,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분명 저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건, 전하의 안전을 원한다는 거였는데요…….”
로제타가 그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리더니, 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비슷한 의미지.”
아르문트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코끝이 스칠 것만 같은 상황에 로제타는 절로 숨을 멈췄다.
‘그게 뭐가 비슷해? 하나도 안 비슷한데!’
항변하고 싶은 말은 있었으나 차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가슴 부근이 간질거렸다. 피부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다시금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의 두 뺨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는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니 잔말 말고 입 벌려, 로제.”
내가 더 미쳐 도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속삭인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로제타의 입술을 취했다. 애틋하면서도 야릇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르문트는 조급하게 로제타의 아랫입술을 물더니, 다소 거친 움직임으로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르문트를 피해 다니기 바쁘던 로제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감고 그와의 키스에 열을 올렸다. 입술을 이리저리 겹치고, 숨결을 섞으며 몸을 맞대는 행위가 이다지도 기분이 좋을 줄이야. 몇십 년을 산 그녀이건만 이런 쾌감은 정말이지 이번 생이 처음이었다.
“으응…….”
간지러운 촉감에 애가 달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자 아르문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신음하는 로제타의 모습에 발정이라도 하듯 더욱 거세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근육이 촘촘하게 박인 몸이 로제타의 부드러운 살을 짓누르고 또 다른 쾌감을 자아냈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자 로제타는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자, 잠시만요, 전하.”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아르문트는 쉽게 밀려났다. 로제타는 그 틈을 타 참았던 숨을 헐떡였다. 헉헉거리며 허리를 굽히자 그녀의 머리가 아르문트의 가슴팍에 닿았다.
“제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
연애하더라도 조금 더 산뜻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관계는 너무…… 선정적이지 않은가, 이 말이다. 물론 어제 아르문트를 유혹한 건 그녀였으나, 지나치다 싶은 쾌감에 로제타는 발뺌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은 그런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차르륵! 로제타가 허리를 굽힌 탓에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제타와 아르문트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를 향했다. 엘리아가 ‘어른들의 즐거움을 위한 물건’이라고 말하며 준 선물. 누가 볼까 두려워 감춰둔 그 붉은색 끈이, 당당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르문트는 멍한 얼굴로 끈을 응시하더니, 이내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작 입맞춤이 아니라, 이런 걸 원했던 거군.”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는 로제타가 이런 물건을 구해오느라, 혹은 이러한 재미를 그에게 어떻게 제안할지 고민하느라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주머니에 저걸 꼭 숨겨올 리 없지 않은가. 혹시나 하는 불안으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눈 녹듯 풀렸다. 낯선 도구였으나 로제타와 함께라면 무엇인들 즐겁지 않을까. 아르문트는 바닥에 떨어진 것을 달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한편, 로제타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기꺼이.”
아르문트는 붉은 끈을 손에 쥔 채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침대로 이끌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내가 구해온 물건도 아니다, 하고 변명할 틈도 없이 그에게 입술이 가로막혔다. 그리고 또다시 질척한 밤이 이어졌다. ***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했던가. 아르문트가 딱 그 꼴이었다. 결국, 그는 그날 밤도 로제타가 잠을 자지 못하게 괴롭혔고, 몇 번을 하고도 지치지 않는지 계속해서 그녀를 유혹해댔다. 다음 날 아침, 로제타는 또다시 후다닥 도망을 치려 했으나 아르문트는 놓아주지 않았다. 일하러 가야 한다 해도 막무가내였다.
“감히 누가 내 연인에게 일을 시킨다는 거지?”
“제가 전하의 연인……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일은 일이죠!”
로제타는 연인이라는 단어를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매우 민망한 탓에 잠시 멈칫했으나, 이대론 안 된다는 생각에 꿋꿋이 주장했다. 물론 그녀가 하녀 일에 재미를 붙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자신의 시간을 보장받아야 그 모르게 일 처리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발레리안을 만나러 간다던가, 의심 가는 놈을 잡아 죽인다는가. 그런 비밀스러운 일 처리를 말이다. 그는 로제타가 계속 잡일을 하겠다는 게 매우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대가 일하고 싶다면 알겠어. 그러나 난 네가 없으면 외로운데, 그리 자주 곁을 비울 건가?”
저 외모로 저런 말을 하다니. 비 맞은 고양이처럼 애처롭게 눈을 반짝이는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하여 로제타는 더욱 아르문트와 붙어 지내게 되었다. 아르문트는 공적인 일정이 아닌 이상 그녀를 항상 곁에 두었고, 덕분에 호위는 아주 편해졌으나 반대로 마음은 불편해졌다.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이후부터 그의 태도가 매우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로제, 아.”
무조건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오, 손수 음식을 먹여주기까지 했고.
“그대는 먹는 모습도 참 귀엽군.”
마지못해 음식을 받아먹은 로제타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왔다. 게다가 질투는 또 얼마나 심한지.
“경, 내 약혼녀에게 함부로 시선 두지 말지.”
“……예, 전하.”
얌전히 호위 중이던 리처드에게 이딴 소리까지 하는 게 아닌가. 물론 리처드가 한때 로제타를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을 아는 아르문트로서는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를 모르는 로제타에게는 그저 염병을 떠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전하가 이렇게 팔불출이었다니. 로제타는 매시간 아르문트의 이상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제일 심각한 건 따로 있었다.
“꺅! 저, 전하?!”
창가에 서서 커튼을 정리하던 로제타는 제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아르문트가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로제타는 몇 번의 경험으로 이것이 야릇한 행위의 전조임을 알 수 있었다. 야살스럽게 휘어진 저 눈매만 봐도 확실했다.
“이러면 안 돼요, 전하! 벌건 대낮에 무슨……!”
그의 방이 2층에 있다고는 하나, 창가에서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물론 감히 황태자의 침실을 엿볼 미친놈은 없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말을 들을 아르문트가 아니었다.
“커튼을 치면 되잖아.”
“그래도 아직 밖이 훤한데-!”
“해가 훤하니 그대를 더 잘 볼 수 있겠군.”
“아니, 왜 갑자기……!”
“갑자기라니.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그리고 또다시 침대행이었다. 이것이 바로 로제타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변화였다. 아르문트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유혹해온다는 것! 매일같이 하는데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다니. 로제타는 제 연인의 정력에 항상 놀랄 따름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녀 자신도 내심 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정말 싫다면 제대로 거절하면 그만이다. 아르문트가 다소 짐승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싫다는 여인을 강제하는 쓰레기는 아니니까. 오히려 그는 거칠게 입 맞추다가도 행여나 그녀가 아플까 노심초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금만 더 하자고 유혹하면서도, 그녀가 힘들어 보이면 냉큼 포기하고 수발을 들기도 했다. 그리고 로제타는 항상 못 이기는 척 그의 유혹에 넘어가 쾌락을 좇았다. 힘드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러면 안 된다는 말도 그저 내숭에 불과한 듯했다.
‘너무 좋은 걸 어떡해!’
이것이 로제타의 본심이었다. 무얼 해도 예쁘다, 사랑스럽다 말해주는 목소리가 좋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정하게 미소 짓는 게 좋았으며, 다소 과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 게 좋았다. 누군가와 연애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문트처럼 감정을 표현하려 할 때면, 뿌리 깊은 불안감이 밀려와 그녀를 멈추게 했다. 계속 감정이 커지면 절망도 더 커지고 말 거라는 불안이었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차마 그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의 기쁨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르문트는 실망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제 감정을 표현해주었다. 어느 날 밤, 몇 차례의 정사가 끝난 뒤 로제타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아르문트가 느닷없이 제안했다.
“로제, 내일 우리 데이트할까.”
“네? 웬 데이트요?”
반쯤 탈진하여 졸고 있던 로제타는 눈을 껌뻑거리며 반문했다.
“우리 아직 정식으로 데이트한 적이 없잖아. 사냥제 전에 한 번은 그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 내일은 선약이 있어요. 전하, 그보다 사냥제 말인데요.”
나를 데려가 줘요! 로제타는 이때다 싶어 얘기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로제타, 설마 내 몸만 보고 만나는 건 아니겠지?”
“네에?! 그럴 리가요!”
로제타는 화들짝 놀라 항변했다.
“저는 전부 다 봤죠. 전하의 얼굴, 몸, 성격, 재력까지!”
“솔직해서 좋군.”
아르문트는 쿡쿡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로제타가 무어라 대답했어도 다 좋다 했을 그였다.
“이제는 그 모든 게 전부 그대 거야. 그러니 마음껏 이용해.”
“힉, 전하. 그런 말 함부로 하면 큰일 나요! 아주 여자 잘못 만나면 된통 당할 사람이네. 다른 여자한테는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로제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무슨 말이 또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아르문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네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왜 만나지?”
아차. 로제타가 몸을 흠칫 굳혔다. 언젠가 운명이 원래대로 흘러, 그가 다시 루니엘라 영애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탓에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헤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냥 가정한 거예요, 가정.”
“그런 가정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
“네. 죄송해요, 전하.”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다그친 것처럼 느꼈다면 미안해.”
다행히 아르문트는 언제나 금방 마음을 푸는 편이었다. 로제타가 무슨 말실수를 하든 미안하다는 말 한 번이면 만사 해결이었다.
“그래서, 어떤 데이트를 할까요? 모레는 시간 괜찮아요?”
“그대와 함께하는 거라면 뭐든 좋아. 시간은 조정하도록 해보지.”
아르문트가 재차 그녀의 이마에, 눈썹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일은 누구와 약속을 잡은 거지?”
“아, 저 친구랑요.”
이번에는 아르문트의 몸이 경직되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옅게 떨리고, 눈동자는 짙은 감정으로 일렁였다.
“……저번에 말한, 남자인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