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마음이 의미하는 바2021.12.12.
짧은 순간, 로제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할까. 요 며칠 살펴본 결과 아르문트는 매우 질투가 많은 편이었다. 리처드를 질투하고, 러크를 질투하고, 심지어는 멜라니와 엘리아에게까지 질투를 했다. 자신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황당한 소리까지 하면서 말이다. 지금 저 눈빛만 봐도 확실했다. 만난다는 친구가 남자라는 걸 안다면 분명 엄청나게 신경을 쓰리라는 걸. 어쩌면 그 친구가 정확히 누군지, 어디서 일하는 놈인지 캐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는 남자인 친구와 둘만 만나는 걸 허락할 수 없다며 졸졸 따라오려 하든가.
‘이참에 발레리가 그 친구라는 걸 고백할까? ……아니야, 그래도 질투하는 건 똑같겠지.’
이제는 밝혀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마찬가지로 그렇게까지 발레리안을 자주 만날 이유가 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테다. 아르문트를 제대로 지키고, 그를 노리는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발레리안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아르문트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참된 기사로서 제 주군에게는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신념과, 아르문트의 안전. 그 둘 중 무엇이 중요한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애초에 로제타는 이미 후자를 위해 전자를 수없이 팽개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또다시 진실을 묻어두기로 했다.
“아니요. 내일 만나는 친구는 여자예요. 루시아라고, 본궁에서 일하는…….”
그녀는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뱉었다. 여자라는 얘기에 아르문트의 표정은 금세 밝아졌다. 안심한 게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렇군. 즐겁게 지내다 와.”
내 생각도 종종 하고. 아르문트가 상냥히 덧붙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로제타는 양심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를 위한 거짓말이라고는 해도, 그를 속이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우리 모레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요? 오페라나 연극을 보는 것도 좋고요.”
“좋은 생각이군. 내가 괜찮은 곳을 알아보지.”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제 품에 바짝 그러안았다. 반쯤 헐벗은 살이 맞닿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조잘조잘 이야기하던 로제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졸기 시작했다. 아르문트의 품이 몹시 안락해서 금세 잠이 쏟아진 탓이었다. 이 온기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희미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꺼졌다.
*** 짤랑. 유리컵 안의 얼음이 녹으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로제타는 시원한 컵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앞을 흘끔거렸다. 현재 그녀는 연구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발레리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자, 가장 신뢰하는 사람인 그 앞에서 이토록 긴장하고 있는 연유는 간단했다. 지난번 그의 타운 하우스에서 만났을 때, 만약 전하가 고백한다고 해도 거절할 거라며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 며칠 전 키스 마크를 떡하니 달고 마주해버렸으니까.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해서는!’
사실, 그녀가 발레리안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건 일종의 자기 다짐이었다. 스스로 아르문트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제 마음을 가다듬고자 했었다. 그러나 결국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고백을 받아주었고, 알콩달콩 연애를 즐기고 있었으며, 온몸에 새겨진 붉은 자국을 가리기 위해 목까지 올라오는 상의를 입었다. 저번에 만들었던 붉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아르문트가 매일 새로 만드는 바람에 피부가 남아나질 않는 거였다.
“흠, 흠. 연회 날은 잘 들어갔어, 발레리?”
로제타는 민망함을 참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발레리안은 오늘도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새카만 마법사 로브를 셔츠 위에 걸치고 은으로 된 장신구를 착용한 모습이 퍽 세련돼 보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떻게 된 거야. 너랑 황태자.”
갖은소리는 제쳐두고 단숨에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유독 냉담해 보이는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로제타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게…….”
멜라니와 엘리아에게 소식을 알릴 때와는 달리, 아르문트와 교제한다는 걸 밝히는 게 쉽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회귀를 포함하여 그녀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를 살리려고 회귀해놓고 뜬금없이 연애를 하다니, 발레리안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혹은 다른 여자의 남편 될 사람을 빼앗았다고 탓할지도 모른다. 로제타는 한참 입술만 달싹거리더니, 잘못을 고백하듯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털어놓았다.
“나 전하랑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했어! 그,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돼버렸지 뭐야.”
하하. 그녀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따라 웃어주었으면 좋으련만 발레리안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딱딱하기만 했다.
“어쩌다 보니, 라는 건. 황태자가 널 강제한 거야?”
“아니, 강제는 아니고…….”
날카로운 질문에 로제타가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표현은 무책임하다. 그녀는 얌전히 인정하고 제 진심을 털어놓았다.
“나도, 전하가 좋아져서……. 그래서 만나기로 한 거야.”
네 번의 회귀를 통틀어서 그의 앞에서 이성에 대한 호감을 밝힌 건 처음이었다. 발레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차마 상상이 안 됐기에 로제타는 계속해서 그를 흘끔거렸다. 질투 많은 오라비처럼 여동생을 빼앗길 수 없다며 툴툴거릴까, 혹은 네 상황에 황태자와 연애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조언해올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그의 반응을 예상해보았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그저 차분히 되물을 뿐이었다.
“……황태자가, 좋아졌다고?”
“응. 아직 엄청 깊은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
“……그렇구나.”
발레리안이 조용히 잔을 들어 올려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이내 그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네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다니, 기쁜 일이네. 축하해, 로즈.”
염려와는 다르게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로제타의 연애를 축하해주었다. 발레리안이 예상외로 차분한 반응을 보이자 로제타의 얼굴에는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사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제 선택을 비판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축하해주었다. 그 사실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마워, 발레리! 잘 만나볼게!”
“고맙기는 뭘.”
“그래서 말인데, 상담하고 싶었던 게-.”
그녀는 잔뜩 신이 나서 발레리안에게 연애 상담을 요구해왔다. 자신과는 달리 늘 이성에게 인기가 많았던 발레리안이니 연애에 대해서도 잘 알 거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다만 로제타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발레리안의 눈가에 서늘한 빛이 감돌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탁자 아래 감추어진 그의 왼손이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길이 없었다. 발레리안은 상기된 얼굴로 연애 얘기를 해오는 로제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관자놀이에는 굵은 핏줄이 불끈 솟았다. 제 친동생같이 여기던 로제타가 난생처음으로 연애를 한다는데, 이 소식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발레리안은 제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거슬리고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만 같았고, 당장 그 황태자 새끼를 찾아가 다시는 로제타를 눈에 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며칠 전, 그녀의 목 위에 피어난 붉은 자국을 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살기가 치솟았다. 자신을 부르는 로제타를 피해 달아난 이유는 민망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간, 그녀에게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아서. 그래서 도망치듯 떠난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타운 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마나가 반쯤 폭주했다. 폭발하듯 터져 나오려는 마나를 다스리느라 발레리안은 꽤 오랜 시간 애를 써야 했다. 감히 못난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내 여동생을 건드려서.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이라기엔 제 분노가 지나치리만큼 깊고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는 귀엽게 입을 조잘거리는 로제타를 빤히 바라보며 이유를 고민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로제타가 딴 놈과 연애하는 모습 따위,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일 데이트 가려는데 어떤 옷을 입는 게 나을까? 발레리는 그런 거 잘 알잖아.”
“위치가 어딘데?”
“응? 데이트 장소?”
로제타는 그런 건 왜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발레리안은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냐에 따라 적절한 옷차림도 달라지니까.”
“아아, 그건 그렇겠네. 내일 저녁에 어디 가기로 했냐면-.”
로제타는 아르문트와 가기로 한 레스토랑의 이름과, 그 뒤에는 어떤 연극을 보기로 했는지까지 다 말해주었다. 눈앞의 사내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 뒤로도 쭉 연애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선물해 준 진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자랑하며, 마법 검을 어떤 형태로 바꿀지를 궁리했다. 발레리안은 편하게 검으로 변형할 수 있도록 반지를 제안했고, 그의 말에 따라 원래의 목걸이를 얇은 은반지로 바꾸어 검지에 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본론으로 돌아왔다.
“흠, 그래서…… 연회 날 루니엘라 공작이 전하께 뭐라 했다고?”
로제타는 자신이 이런 중요한 안건 대신 실컷 연애 얘기를 늘어놓는 데만 집중했다는 사실에 잠시 멋쩍어했다. 이성을 되찾고 보니 발레리안의 얼굴도 다소 딱딱해 보였다.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연애사를 너무 길게 떠들어댄 탓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테다. 남의 사랑 얘기를 억지로 듣는 것만큼 고역이 따로 없으니까. 로제타는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앞으로는 자중해야겠다고 반성했다.
“힘을 보태고 싶다고 하더군. 루니엘라 공작은 확실하게 황태자 쪽으로 붙은 것 같아.”
“으음. 이전 생에는 딸과 결혼을 시킬 정도였으니, 의지는 분명해 보이네.”
“아. 이번에도 약혼 얘기를 꺼내긴 했어.”
로제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머릿속에 아르문트와 페이즐리가 결혼식을 올리던 장면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생되었다. 결국, 이번 생도 그렇게 될 운명인 걸까? 로제타는 자꾸만 떠오르는 불안에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발견한 발레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부연했다.
“걱정 마. 황태자가 따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며 거절했으니.”
“……정말?”
“그래.”
“그렇구나…….”
길게 늘이는 말소리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섞여들었다. 마음에 둔 여인이라니. 별것 아닌 표현인데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 로제타의 기분이 벼랑 끝까지 떨어졌다가 금세 다시 올라왔다면, 발레리안의 것은 하염없이 아래로만 떨어지고 있었다. 질투. 그래, 질투가 났다. 황태자를 생각하며 배시시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그깟 놈에게 주기엔 내 여동생이, 나의 로즈가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이리라. 고민 끝에 발레리안은 이렇게 해석했다.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화날 이유가 없으니까.’
발레리안은 그녀를 소꿉친구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사랑했다. 메이필드 자작 부인이 죽고 홀로 울고 있던 로제타를 보았을 때, 제 가문이 몰락하던 당시보다 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던 것도. 그녀가 환하게 웃을 때면 자신의 마음에도 따뜻한 햇볕이 드는 것 같은 것도. 로제타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는, 이 마음도. 모두 가족으로서의 사랑일 뿐일 거라고 믿었다. 인기만 많았을 뿐 연애 경험이 없는 발레리안은 로제타와 다를 바 없이 제 감정에 둔감했다. 그러나 결국 로제타가 제 진심을 알아차리고 인정한 것처럼, 그 또한 언젠가 결국 제 마음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것이었다. 그것도,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