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데이트의 불청객2021.12.16.
다음날, 아르문트는 동이 트기 전부터 일어나 정무를 봤다. 안 그래도 병상에 누운 황제를 대신하여 많은 일을 처리하던 그였으나, 요즘 황궁 내에서 그의 입지가 점점 넓어지면서 업무량 또한 더욱 늘어났다. 그러한 탓에 로제타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일어나 집중해야만 했다. 첫 데이트에 늦을 수 없다는 의지가 워낙 강렬한 덕에 업무 처리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빨랐다. 그리하여 로제타가 느지막이 일어나 몸을 일으켰을 즈음에 그는 이미 모든 일 처리를 끝내고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 로제.”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로제타를 발견한 아르문트는 냉큼 그녀에게 다가가 뽀뽀를 퍼부었다. 그가 이마와 볼에 쪽쪽 입을 맞춰오자 로제타는 간지러워 몸을 움츠렸다. 아르문트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씩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어요?”
“얼마 안 됐어. 피곤해 보이는데 더 자지 그러나.”
로제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주군이 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쿨쿨 잔 것만 해도 호위기사 제명 감이었다. 원래 이렇게 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원망하듯 아르문트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로제타가 이렇게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데는 아르문트의 잘못이 컸다. 어제 오후, 발레리안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아르문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그 탓에 그녀는 기절하듯 잠이 들어야만 했다. 하루라도 빠지면 덧나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 이렇게 매일 많이 해대는데 건강은 괜찮은가?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깨달음을 얻은 로제타조차 체력이 간당간당하거늘, 그녀보다 더 많이 움직인 아르문트는 그토록 하고도 멀쩡해 보였다. 정확히는, 날이 갈수록 그의 욕망은 커졌고 실력도 덩달아 일취월장했다.
“……지금 이거, 신호 보내는 건가?”
로제타가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자 아르문트는 반성하기는커녕 다시금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니요!”
화들짝 놀란 로제타는 질겁하여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녀의 손에 얼굴이 가려진 아르문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로제타는 이러다 아르문트가 이번 생에는 복상사로 죽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트를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을 해두려면 얼른 움직여야 했다.
“로제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허둥지둥 떠나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문트가 고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사랑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의심될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어버버거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정식으로 교제하게 된 이후, 아르문트는 종종 이렇게 사랑을 속삭이곤 했다. 그가 이렇게 표현을 잘하는 사람일 줄이야, 로제타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 반면 로제타는 연회 날 자신도 좋아한다 말한 이후로 그의 앞에서 사랑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부끄럽기도 부끄러웠고, 그녀에게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커다랗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전하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정말 사랑일까? 솔직한 말로, 그녀는 확신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건 분명한데, 아직 사랑까지는 모르겠다.
“그럼 나중에 봐.”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속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 더 재촉하지 않고 상냥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사랑해요, 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니, 사실 그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해준다면, 이따금 제 속을 뒤집어놓는 불안이 잠잠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와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가 고작 며칠이었다. 애새끼처럼 조급하게 굴었다간 관계만 더 망쳐놓으리라.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능숙하게 감추고 로제타에게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에 안심한 로제타는 나중에 뵙겠다고 대답하며 방을 나섰다. *** 데이트의 시작은 장미와 함께였다. 마차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던 아르문트의 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장미꽃이 들려 있었다. 막 피어난 듯 동글동글한 모양의 살구색 장미였다. 주홍빛 햇살 아래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꼭 그림만 같았다. 로제타를 발견한 아르문트는 다소 부끄러운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로제타는 그 아름다운 장면에 시선을 빼앗겨 걸음을 멈췄다.
“……그대가 장미가 만개한 날에 태어났다 해서.”
그는 괜히 다른 쪽을 응시하며 그녀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싱그러운 꽃내음이 빠르게 번졌다.
“고마워요, 전하. 어쩌죠. 전 준비한 게 없는데…….”
로제타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으며 기쁘게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웃어준 걸로 충분해.”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로제타는 자신의 준비성을 탓하며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향하는 첫 목적지는 요즘 가장 인기 있고, 예약하기도 까다롭다는 레스토랑이었다. 로제타가 잘 아는 곳이기도 했다. 이전 생에 발레리안과 즐겨 찾던 데였기 때문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증축 공사를 해서 그나마 예약이 편해지는 곳인데, 가장 인기가 좋을 지금 예약을 잡다니. 과연 황실의 힘이 대단하긴 했다.
“전하, 오늘 너무 예뻐요!”
“날씨 말하는 건가?”
“아니, 전하가요!”
마차가 출발하자 로제타는 눈을 반짝거리며 준비해온 플러팅을 시전했다. 어제 발레리안에게 상담하며 듣기로, 남자에게도 이런 칭찬을 자주 해주는 게 좋다 했기 때문이었다.
“보석 같은 눈에, 이 높은 콧대에, 피부는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전하, 조각상이라도 남겨야 하는 게 아닐까요? 만약에 만들면 저도 하나 갖고 싶어요.”
온갖 미사여구가 봇물이 터지듯 쏟아지자 아르문트의 귀 끝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누가 봐도 잔뜩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떠듬떠듬 대꾸했다.
“그대가 더 예뻐.”
차마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건네오는 칭찬에 로제타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평소엔 그리 능청스럽게 달콤한 말을 건네왔으면서, 이제 와 부끄러워하다니. 이런 그의 모습도 무척 귀여웠다. 그런데 돌연 비슷한 얘기를 했다가 아르문트에게 혼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로제타는 짓궂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전하, 기억나요? 예전에 제가 전하께 얼굴 예쁘다고 했다가 미쳤냐는 소리 들었던 거요.”
“…….”
“그때 참 서러웠었는데.”
아르문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겠건만, 잊을 만큼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로제타가 죄송하다고 빌며 제 앞에 무릎을 꿇던 모습이 아직 생생했다. 가능하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자신을 반 죽여놓고 싶었다. 아르문트는 뼈저리게 후회했으나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전하 대신 독약을 마셨다가 머리채를 잡혔던 것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로제타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르문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새삼 자신이 지은 죄가 크다는 걸 깨달았다. 혹 로제타가 이것 때문에 날 싫어한다면. 문득 떠오른 불안에 아르문트는 다급히 입술을 뗐다.
“로제. 그때는 정말 내가…….”
“농담이에요, 농담. 푸하하! 긴장하시기는.”
로제타가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전하라니. 그녀는 새삼 자신의 다섯 번째 인생이 얼마나 특별한지 감탄했다.
“사실 저는 그때도 좋았어요. 전하가 곁에 계셨으니까요.”
아르문트는 한때 자신을 냉대하였고, 그 모습에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사일 적에는 보지 못하던 면을 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차갑고 까칠하면서도 나름 정이 많은 그의 모습. 신세를 졌다는 이유로 하루에 하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과, 광증 상태일 때 고양이처럼 구는 모습까지. 이제는 모두 소중하디소중한 기억이었다.
“우리, 은근 추억이 많네요. 그렇죠?”
“그런 건 추억으로 치지 말지 그래.”
네게 못나게 군 모습은 제발 잊어줘. 아르문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생각해보고요.”
로제타는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레스토랑은 건물 외벽조차 새로 바른 듯 깨끗했다. 내부는 다소 작은 편이었으나 층고가 높아 답답해 보이지 않았고, 고급스럽고 우아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한창 손님이 많을 시간인데도 직원 말고는 다른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는 능글맞게 눈매를 휘며 농담을 뱉었다.
“어머나. 저를 위해서 건물을 통째로 빌려주신 거예요?”
“그대의 마음에 차면 좋겠군.”
그러나 이게 웬걸. 아르문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여길 진짜 통째로 빌렸다고?’
로제타는 그의 사치에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 이 또한 그녀가 모르던 면모였다. 로제타가 기억하는 아르문트는 항상 최고급 옷과 물건에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필요 없는 사치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품위 유지랍시고 매년 억 소리 나는 돈을 쓰는 그레이한과 달리, 아르문트는 오히려 물욕이 없는 편이었다. 그를 곁에서 모신 평생 아르문트가 뭘 갖고 싶어 하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뭐, 이 정도 사치 정도는 괜찮겠지.’
아르문트에게 배정되는 예산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무리도 아니리라. 로제타는 안심하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가장 좋은 자리로 향했다. 한편, 아르문트는 레스토랑에 들어온 순간부터 로제타의 반응만을 살피기 바빴다. 그녀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로제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지었고, 아르문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직 그의 첫 데이트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흘러가는 듯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고, 로제타는 장미가 마음에 드는지 레스토랑 안까지 가지고 들어온 데다가, 메뉴를 고르는 얼굴도 제법 상기되어 있었다.
‘다행이군.’
아르문트는 안도의 미소를 입가에 걸치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에겐 오늘의 데이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래야 로제타가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르문트는 조만간 그녀에게 넌지시 결혼에 대해 말해볼 생각이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결혼이라니. 그 또한 아직은 이르다는 걸 알았지만, 망설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프러포즈를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로제타가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그녀에게 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려주고 싶었다. 특히 로제타와 자신의 신분 차이가 있는 이상,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렇게 매일같이 관계하면서, 정작 결혼은 생각도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나쁜 짓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아르문트는 데이트를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소중한 데이트는 제대로 빛을 보기 전에 방해받고 말았다. 느닷없이 누군가 나타나 말을 걸어온 까닭이었다.
“거기, 황태자 전하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화사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신나게 식사를 시작하려던 로제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아르문트는 불쾌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윈저프리드 경. 그대가 여긴 무슨 일이지.”
데이트의 불청객, 발레리안은 자신을 향하는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예쁘게 미소 지었다.
“식사하러 왔습니다만, 아쉽게도 오늘 누군가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다는 말에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그러면 당장 돌아가면 되겠군.”
“하하, 언제나 그렇듯 재치있으시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습니까?”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감히 데이트 장소에 나타나 훼방을 놓으려 하다니! 괘씸해도 이렇게 괘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궁이 아닌 곳에서요. 그가 심각한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