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박스석 커튼 뒤에서2021.12.19.
대마법사인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오는 데엔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데이트 장소까지 찾아와 방해할 정도라면 급한 사안임이 분명하다.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로 데이트를 방해하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 테니까.’
만약 별것 아닌 일이라면 정말 가만 안 둔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발레리안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발레리안은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었으나 여전히 눈빛만은 진지해 보였다. 곧 그의 마나가 주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행여나 다른 이가 대화를 훔쳐 듣지 못하도록 방음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이제 중요한 사안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로제타는 아르문트와의 달콤한 시간을 잠시 포기하기로 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아르문트에게는 그 우선순위가 사뭇 달랐던 모양이었다.
“꼭 지금이어야 하나?”
“……예?”
“내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만.”
그 말씀 꼭 지금 올려야 하냐는 말이다. 그가 냉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에 경악한 건 로제타였다. 발레리안의 협력에 감사를 표하질 못할망정, 이렇게 박대하다니. 그것도 고작 데이트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진 발레리안이 앞으로 아르문트를 살리는 걸 돕지 않겠다 선언하면 큰일이다.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정말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발레리안 또한 제법 자존심이 강한 편인지라 걱정이 솟았다. 로제타는 재빨리 테이블 아래에서 아르문트의 손을 꼬집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전하도 참, 농담도. 여기 앉으세요, 대마법사 님.”
로제타가 손짓하자 아르문트도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로제타.”
“……이름은 언제 허락받았지?”
그리고 아르문트는 또다시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정말 허락받은 시기를 묻는 것이 아닌, 허락받지도 않고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냐는 의미의 경고였다. 분위기가 더 얼어붙을 것을 염려한 로제타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저번에 뵈었을 때 서로 이름을 허락했어요. 그렇죠, 발레리안?”
“예, 그렇습니다.”
한 십 년 전쯤에. 발레리안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재밌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에 아르문트의 눈빛은 더욱 서늘해졌다. 로제타에게 접근하는 사내놈이란 사내놈은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리처드나 러크는 그저 짜증스러운 정도였다면, 눈앞의 대마법사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발레리안을 다른 누구보다도 경계했다. 발레리안이 로제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독 자신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제 여인에게 눈독 들이는 상대를 득달같이 알아채고 경계하는 것. 이는 남자의 본능이었다. 심지어 하필이면 발레리안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미남이었다. 로제타가 좋다고 했던 바로 그. 마음 같아선 리처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발레리안의 시선마저 단속하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 만나 이름을 부르는 사이까지 되었는지, 캐묻고 싶은 마음도 한가득하였다. 그러나 아직 발레리안은 선을 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로제타의 염려처럼 그는 아르문트에게 없어선 안 될 인물이기도 하고 말이다. 추잡한 질투를 아낌없이 드러냈다간 로제타가 제게 일찍 질려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기에 아르문트는 조용히 분노를 삭였다. 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온 덕에 침묵이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센스 있게 발레리안 몫의 전채요리까지 가져온 웨이터는 눈치껏 음식을 설명해준 후 자리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멀어지자 아르문트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정보를 가져온 건가.”
1 황자와 관계된 것?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발레리안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1 황자의 수하가 독을 사들인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로제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빌어먹을 새끼가 기어코 일을 치렀구나. 그녀가 머릿속으로 험한 말을 마구 중얼거렸다.
“종류는.”
정작 아르문트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제 방에서 독과 저주가 검출된 이상, 이쯤이야 당연히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루나베리. 무색무취의 신경독입니다. 섭취 시 점점 눈이 벌게지다, 갑작스럽게 흥분하여 날뛰게 됩니다. 그 후 오 분 안에 뇌가 망가져 사망에 이르죠. 굉장히 귀한 것인데 잘도 구했더군요.”
지금까지 저런 독이 쓰인 적이 있었던가? 로제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전 생에는 등장한 적 없는 독이었다. 루나베리라는 이름 자체가 몹시 생소했다.
‘전하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만큼, 1 황자도 더 조급해진 거야.’
앞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 위협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사냥제에 따라가야만 한다. 로제타는 주먹을 꽉 말아쥐곤 의지를 다졌다.
“다만 너무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루나베리는 일반적으로 검출하기 어려운 독이지만, 제가 드린 마법 물품으로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발레리안이 생긋 웃으며 아르문트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정확히는, 아르문트의 주머니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발레리안이 만든 마법 물품인 독 검출용 티스푼이 들어 있었다. 아르문트는 그가 투시 능력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주머니에서 티스푼을 빼 들었다. 로제타와 데이트하면서까지 독살 가능성을 신경 쓰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오는 요리는 물론, 차나 와인, 손을 씻는 물까지 모두 검사해야만 하는 것이 제 현실이었으니까.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발레리안은 1 황자와 황후에 대해 조사한 정보를 더 풀어놓았다. 아쉽게도 그들이 암살 시도의 배후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잡지 못한 듯했다. 얼떨결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로제타는 얌전히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굳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해야 할 이야긴가?’
중요한 사안은 중요한 사안이긴 한데, 굳이 황궁이 아닌 곳에서 말해야 할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황궁에 듣는 귀가 많다고 해도 마법을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이 제국에 감히 발레리안의 마법을 꿰뚫을만한 실력자는 없겠지만, 행여나 다른 대마법사가 어떻게 훔쳐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납득했다. 그녀는 설마 발레리안이 제 데이트를 방해하러 왔으리라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수란을 곁들인 트러플 파스타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메인요리가 나왔다. 진한 트러플 향이 콧가를 스치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움찔거렸다.
“잠깐.”
발레리안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르문트와 로제타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이쪽 숙녀분은 트러플을 못 먹습니다. 다른 메뉴는 없습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새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웨이터는 로제타에게 랍스터 파스타는 괜찮을지 물었고,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아르문트의 눈치를 잔뜩 보았다.
‘굳이 저딴 말은 왜 한 거야!’
그녀가 속으로 발레리안을 욕했다. 아까는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질 않나, 이제는 음식 취향을 아는 것까지 공개하다니. 실제로 로제타는 버섯을 잘 못 먹는 편이긴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저런 배려를 바라진 않았다. 설마 저 자식 일부러 저러나? 로제타가 드디어 의심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르문트의 눈매가 다시금 사나워졌다.
“……로제. 트러플을 못 먹나?”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제타는 그냥 잘 먹는다고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발레리안의 입장만 우습게 되는 데다, 억지로 버섯을 먹다 보면 거짓말이 티가 날지도 모른다. 즉, 지금은 인정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당황한 걸 들키면 더 의심스러울 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버섯류를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앞으로 참고하지.”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런데 경은 어떻게 내 연인의 입맛을 알았을까.”
그것도 나도 모르는 입맛을 말이야. 그가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목소리가 어찌나 살벌한지 살이 다 떨려올 지경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레이디 로제타께서 버섯 샐러드를 들고 계셨거든요. 담소를 나누다 보니 알게 되었죠.”
못 하는 게 없는 발레리안은 거짓말까지 수준급이었다. 사르르 눈웃음을 짓는 얼굴이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이것 하나 모르는 놈이.’
이것 말고도 많았다. 발레리안은 알고, 아르문트는 알지 못하는 것들. 그리고 아마, 평생토록 자신만 알고 있을 것들이 말이다. 제 행동이 매우 유치하다는 것쯤이야 발레리안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유치하기로 했다. 착한 오라비 행세를 하며 혼자 속을 썩이느니, 마음에 안 드는 놈 속을 썩게 하는 것이 그의 더러운 성미에 잘 맞았다. 발레리안은 아르문트의 일그러진 미간을 응시하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에 아르문트의 기분이 더 더러워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 배부르다! 전하, 저는 너무 배불러서 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전하는요?”
컴컴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발견한 로제타가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발레리 자식, 죽여버린다……!’
최대한 살기를 담아 발레리안을 쏘아봤지만, 그는 그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나도 입맛이 없군.”
“그럼 우리 좀 일찍 일어날까요? 극장 구경도 할 겸,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일부러 더 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아르문트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러곤 발레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발레리안, 죄송하지만 우리 먼저 일어나봐도 괜찮을까요?”
아르문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로제타의 눈빛에는 발레리안을 향한 협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더 헛소리하면 네 높은 코를 박살 내버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예, 그러시죠. 마침 저도 속이 안 좋았던 터라, 이만 환궁하려 합니다.”
그래, 네놈이 눈치가 있으면 그래야지. 로제타가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다른 의미로 너무 눈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레이디 로제타께선 아직도 전하를 ‘전하’라고만 부르십니까? 특이하군요.”
제게도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가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덧붙였다. 어떻게 해야 아르문트의 기분이 더욱 진창으로 빠질지, 알아도 너무 잘 아는 것이었다.
*** 극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르문트는 영 말이 없었다. 정말 내내 침묵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로제타가 말을 걸면 곧잘 대답하긴 했지만 어디 한 군데 기운이 빠진 느낌이었다. 일찍이 도착한 그들은 황족을 위해 따로 마련된 박스석으로 안내받았다. 한눈에 극을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커튼을 여닫아 프라이버시 또한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소파는 또 어찌나 편안한지, 로제타는 여기서라면 평생 먹고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하, 배우들 봤어요? 엄청 예쁘고 잘생겼네요. 저렇게 풍성하고 화려한 금발은 처음 봐요.”
그녀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놓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주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르문트의 숱 짙은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화려한 금발. 오늘부터 그가 가장 싫어하는 머리 색이었다.
“전하?”
느닷없이 아르문트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상황에 로제타는 눈만 껌뻑거렸다. 차르륵!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이 단숨에 커튼을 쳤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아졌다.
“로제.”
방금까지만 해도 개방적이고 편안하다고 여겼던 공간은 금세 비밀스럽고 야릇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아르문트가 한 손으로 셔츠의 가장 윗단추를 풀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소파에 반쯤 걸터앉은 로제타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 매혹적인 모습을 응시했다.
“나는 질투가 아주 많아.”
그가 등받이에 손을 짚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질투에 눈이 먼 아르문트가 지금, 그것도 이 박스석의 커튼 뒤에서, 또다시 일을 치르려고 한다는 사실을.